(※현재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미 PD와 나눈 전화인터뷰를 재구성, <시크릿 가든> 사회 지도층 김주원 로엘백화점 사장이 화자로 등장합니다. 네(사)가지가 좀 없더라도, 널리 양해 바랍니다.)
2011년을 앞두고 LG경제연구원과 미디어다음이 ‘한국인의 관심사와 라이프스타일 연구’를 공동 수행했다며? 물론, 로엘백화점 사장인 나한테도 보고서를 보내줬더라고. 대충 훑어봤어. 연구결과, 16개의 열쇳말을 선정했는데, 그 가운데 ‘커피’와 ‘착한 소비’가 눈에 띄더라고.
우선 커피. 댁들은 <시크릿 가든>에서 내가 길라임과 한 카푸치노 키스(거품 키스)만 떠올릴 텐데, 나 그런 커피만 마시는 건 아냐. 내가 마시는 커피는,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커피가 아니야. 커피 산지에서 40년 동안 커피나무만 가꾼 장인이 한 땅 한 땅 정성들여 가꾼 땅에서 유기농으로 자란 커피나무의 체리에서 뽑은 커피라고. 먹어나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착한 소비. 내가 한 마디 하자면, 그건 사회적 영역과 환경 영역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어. 사회적 영역에서 보면 공정무역, 사회적기업, 로컬푸드 등의 제품을 소비하는 거야. 환경 영역에선 저탄소 제품을 비롯해, 재활용품 사용, 동물보호 소비 등을 포함하겠지. 한 마디로, 사회적 가치를 소비하는 거야. 나야, 당연히 그렇게 하지. 사회 지도층의 윤리란 그런 거야. 일종의 선행이지, 선행. 나 가정교육 그렇게 받았어. 이만하면 완벽하지? 그러니까 떨려 죽겠어도 참아. 안 그럼 집어 던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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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커피와 착한 소비. 둘 다 30대 여성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이는데, 나한테는 김태희고 전도연인 우리 라임이도 관심이 많아. 마침, EBS 다큐프라임에서 하더라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좋은 프로그램’으로도 선정됐다는 <히말라야 커피로드>. 라임이와 함께 봤어. 야, 사회지도층이라면 당연히 봐야 할 프로그램이더라고. 커피와 함께 삶이 한 땀 한 땀 키워지는 모습, 커피향보다 더 진하더라고. 오스카도 봤으면 좋을 텐데, 그 윤슬이랑 신혼여행 가고 한국에 없어서 못 봤을 거야.
그래서 우리 라임이를 위해서, 내가 또 기적을 일으켰지. 기억하지? 일본으로 간 <다크 블러드>의 감독 리안 잭슨을 다시 한국으로 불러 라임이 오디션 보게 했던 것! 라임이가 그<히말라야 커피로드>에 무척 감동하기에, 연출한 김영미 PD와 연결시켜줬잖아. 마침,
『히말라야의 선물』이라는 책도 나왔더라고. 라임이와 함께 단숨에 읽었지. 알잖아? 내가 했던 대사 기억해? “돈 잘 법니다. 돈 많습니다. 참고로 취미는 돈 잘 씁니다.” 하하, 농담이야. 돈 써서 된 건 물론, 아니다.
재능기부, 당신이 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어떤 것
김영미 PD는 그러니까, ‘재능기부’였어. 전문용어로 ‘프로보노’라고 하지. 자신의 재능을 사회를 위해 쓰는 것. 가령 나 주원이의 재능은 돈 잘 버는 거니까, 그 돈을 사회를 위해 쓰면 되는 거지. 액션스쿨 대출금을 갚아준다든가, 그런 게 다 재능기부야.
어쨌든 그런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책, 감회가 새롭고 공감도 많이 해줘서 기쁘대. 나랑 라임이도 공감해줬더니, 김 PD도 좋아하더라. 커피 생산자들에게 수익금이 활용될 수 있게 한다는데, 이참에 오스카 콘서트 티켓 샀던 것처럼, 우리 로엘백화점 직원들 읽으라고 왕창 사서 돌려? 사회 지도층의 윤리란 그런 것 아니겠어?
내가 해외를 좀 돌아다녔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선진국에선 재능기부가 아주 활성화돼 있더라고. 엠마 왓슨 알지? 영화 <해리 포터>시리즈의 히로인. 아주 잘 컸지. 라임이 다음으로 예쁜 정도? 영국의 지속가능한 공정무역 패션브랜드인 ‘피플 트리(
www.peopletree.co.uk)’의 공정무역 청바지 모델을 하고 있어.(
☞피플 트리 엠마 왓슨 인터뷰 보기) 재능기부 형태로 시간을 내서 한 거지. 자신의 탤런트, 달란트로 좀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뭔가 기부할 수 있다는 것, 참 좋은 것 아니겠어? 물론 나처럼 돈 잘 벌면 통 큰 쾌척도 하겠지만, 그것만이 기부는 아니야.
김영미 PD도 그렇지. 다큐멘터리스트로서 재능기부 한 거야. 이런 말 하더라고.
“10년에 한 번은 이런 다큐를 만들고 싶었어요. 다큐를 처음 시작하면서 돈에 상관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는 다큐가 있으면 참여하고 싶었거든요. 이번이 처음 도전한 거고, 앞으로도 기회가 닿으면 재능기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또 다시 10년 후에도 기획을 해서 해야죠. (웃음)” 멋지지 않아? 이게 최선이야. 확실해!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커피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자, 본격적으로 커피 이야기 해볼까? 책을 펼치면 이런 질문이 확 덮쳐.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커피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사소하지만 중요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 실은 커피 뿐 아니지. 산업화된 먹을거리 체제와 과잉 마케팅의 홍수 속에 지상의 모든 먹을거리는 본적을 잃고 있어. 온갖 화학물질로 과도한 분칠을 한 채 우리를 좀 먹지. 이 얘긴 또 다음에 할 수 있음 하고, 내가 아는 커피 만드는 짓을 하는 형이 있어. 내 평생 제일 힘들게 밥 한 끼 먹는 여자, 라임이에 이어 제일 힘들게 커피 한 잔 먹는 남잔데, 이 형이 얼마 전 이 책 읽더니 그러더라.
“그와 함께 때론, 나는 울컥한다.… 선물 같은 이 커피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 한 잔이 내게 오기까지 거쳐 온 수고를 생각하면 그렇다. 커피 농사를 짓는 사람부터, 방금 커피를 따라 준 사람까지. 물론, 커피라는 농작물이 자랄 수 있게 해 준 흙, 안개, 햇빛, 바람, 비, 나무 등 모든 자연에 대해서도. 내게 행복을 주기 위해, 지구의 모든 것이 한데 모여 있다. 이 커피 한 잔에 말이다. 참으로 고맙다.… 나는 커피를 만드는 사람이다. 멋으로 맛을 내는 사람이고자, 오늘도 커피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는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다.… 커피 그 자체와 함께, 커피를 둘러싼 다양한 세계에 나는 촉각을 세우고, 사유하고자 노력한다. 아마 그 덕분일 것이다. 내가 다루고 만지는 커피는, 공정무역 커피다.”
그 형은 동티모르 싸메?로뚜뚜 마을 사람들의 커피를 주로 다루는데, 뇌가 아주 서정적이야, 안 그래? 김 PD도 그런 경험을 했나봐. 유기농 공정무역 커피가 익는 네팔 말레마을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벌써 1년은 됐는데, 아직도 말레마을이 많이 생각난대. 그 마을, 안개가 짙게 끼는데, 고산지대다보니 발밑에 안개가 있는 그런 풍경이 선하다네. 촬영팀이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자, 동네 사람들은 밥 먹기 전에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생각했었대. 그렇다고 대개 식후에 커피를 마신다는 것을 알려주긴 싫었다는 거야. 이른바 문명사회에서 만들어놨다고 그걸 꼭 알려줄 필욘 없는 거지. 특별한 날에만 커피를 마시곤 했던 그들의 습관이나 문화 또한 충분히 존중할만한 것이었으니까.
지금도 눈 감으면 아스라이 그려지는 ‘아스레와 말레’ 마을. 그곳은 마치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깊은 산 속 하나의 작은 섬 같았다. 차마 그 고요함을 깨트릴까 싶어 한 걸음 내딛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웠던 곳. 도시의 온갖 소음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말레 마을의 고요함은 너무도 낯설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에 차츰 익숙해지자 처음에는 들리지 않았던 말레 마을만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p.7)
김 PD 말로는 어메이징한 커피였다는데, 군침 넘어가네. 아마도 그 커피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아서 그럴 거야. 네팔 말레마을의 자연주의 커피 농부들이 유기농법으로 한 코 한 코 정성들여 재배했잖아. 사람들과의 넉넉한 만남. 그녀는 파라다이스 같은 동네를 우연히 만난 것 같다고 표현했어. 이 사람들이 다큐를 위해, 책을 위해 기다리고 세팅한 느낌. 그러니, 꿈속이라도 나타나지. 다큐 오래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말레마을 사람들처럼 순진?순수한 사람은 네버. 그곳은 네팔이 아니라, 온전히 ‘말레’인 것 같은. 거참, 가고 싶게 만드네.
말레 마을은 하늘이 내려준 천연 커피 재배지다. 해발 2,000미터에 자리한 말레 마을. 본래 고지대일수록 커피 열매는 단단해지고 밀도도 높아진다. 때문에 고지대 커피는 향이 더욱 풍부하고 맛이 깊다. 히말라야 산자락에 터를 잡은 말레 마을은 이미 맛있는 커피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게다가 이른 아침이면 마을 전체를 뒤덮는 자욱한 안개 역시 커피의 반가운 동반자다. (p.7~9)
어쩌면 그것도 운명이었겠지. 사회 지도층인 내가 스턴트우먼인 라임이를 만난 것처럼. 평생 만나볼 것 없는 세계 같지만, 그게 그렇지 않아. 세계는 잇닿아 있거든. 김 PD도 공정무역에 관심을 가지고 취재하면서 간단히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다가 커피를 발견한 거래. 그걸 만드는 생산자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던 거지.
참, 연인이랑 한 번 해봤어? 카푸치노(거품) 키스! 요즘 이놈저놈 다 따라해. 입술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입술의 역사를 훼손하면 어쩌려고, 하하. 김 PD는 커피라는 아이템이 일상 가까이 있는데도 너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서 좋았다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커피 열매가 까만 줄 알고, 커피가 어떻게 나오는 줄도 몰라. 그러니, 커피와 사람을 엮어서 만들고 싶었던 거지.
그런데 왜 말레마을이었냐고? 일단 네팔을 가서 커피 마을을 수도 없이 돌아다녔어. 근데 확 당기는 곳이 없었던 차에, 말레마을 윗마을에 갔는데, 아랫마을도 있다는 거야. 근데 11가구밖에 없대. 내려가는 길이니 가보자. 실은 마지막 마을이었는데, 딱 마을에 들자 느낌이 팍팍. 다큐 PD다 보니, 사람 인상을 보면 방송용으로 호감, 비호감 이런 느낌이 오는데, 말레마을 사람들 얼굴이 딱 방송용 호감이었던 거야. 어메이징~
또 물었지. 커피 농사를 지어 어디에 쓰고 싶냐, 원하는 것이 있냐. 커피나무를 사줬으면 좋겠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웬걸, ‘커피에 대한 공부’라고 얘기했대. 감동이 팍팍, 바로 짐 싸들고 망설일 필요 없이 낙찰. 아, <히말라야 커피로드>와
『히말라야의 선물』의 탄생 배경이랄까. 이것도 삼신할머니의 랜덤 덕분일까, 하하.
습관처럼 무심코 마시던 커피 한 잔에 담긴 사연이 궁금했다. 과연 이 커피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키워지고 있을까. 결국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꾸려졌고, 우리는 네팔 커피 생산지로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p.13)
말레마을 ‘사람들’의 커피에 담긴 이야기 한 자락
막연한 믿음이 있었대. 사람이 있고, 커피가 있으면 분명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말레마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니까. 물론 애로도 있었지. 11가구, 얼마 되지 않는 가구인데, 모여 살 수 없는 지형이었던 거야. 꼭대기에서 맨 밑에 집까지의 거리가, 거의 서울의 도봉산을 올라가는 거리? 경사가 심해 모여 살 수도 없고. 그 산 중간에 살면서, 위로는 강남, 아래론 강북이라 부르면서, 촬영팀도 나름 그곳을 즐기면서 이야기를 담았어.
우리가 믿고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은 커피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반드시 그들만의 서로 다른 수만 가지 이야기가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단순한 커피 재배기가 아닌 커피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그들에게 커피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p.13)
라임이가 궁금하다며 물어봤어. 커피가 말레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의미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증인이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며. 역시나, 그런 과정이 있었대. 카메라를 처음 보는 사람들이니 카메라를 들이대면 차렷 자세가 되기 일쑤. 그러다 보름 정도 지나니 자연스러워졌대. 물론 촬영팀의 노력도 뒤따랐겠지.
촬영을 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생활이나 생각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이 변화하면 변화하는 대로, 실수하면 실수하는 대로 그대로 카메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마을 사람들에게 커피는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연구의 대상이 되어갔다. (p.212)
김 PD 말에 의하면, 마을 사람들은 정말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대. 다큐나 책이 성공적으로 나온 건, 그 사람들이 아낌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공을 돌려. 촬영팀도 그들과 친해지면서 말레 마을 주민이 됐고. 여하튼 뭣보다 자신들이 한 것보다 더 많은 걸 보여주려고 했던 마을 사람들을 만난 건, 행운이었대.
헌데, 남편을 사별한 미나.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미나. 나는 궁금했어. 그녀가 커피나무를 심기 위해 황무지 개간을 하다가 쓰러지는데, 같이 땅을 파고 싶었지만, 그건 그녀를 진정 배려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약을 건네줬는데, 그때 그 마음. 그러니까, 맥락은 다른데 이 김주원이가 라임이를 찾아가 매달렸던 그때 그 장면이 이상하게 떠오르더라고. 내가 그러잖아. “그래서 앞으론 모든 해볼 생각이야. 남의 집 앞에서 누군가를 몇 시간씩 기다리는 이런 멍청한 짓 포함해서 말이야. 내가 그쪽 인어공주 한다고. 그러니까, 난 지금 그쪽한테 대놓고 매달리고 있는 거야. 등보이지 말고 얼굴 좀 보자.”
김 PD와 촬영팀이 내가 라임이에게 했던 것처럼 할 수 없는 거지. 그들은 방문자거든. 평생 미나 옆에 있어줄 수는 없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그 마음. 미나가 혼자 내성을 키워 더 큰일이 와도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이었던 거지. 다큐를 촬영하는 중에 배고프거나 아픈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촬영을 끈대. 그걸 외면하고 카메라를 돌릴 수 없어서. 물론 다큐하는 사람마다 다른데, 먹을 것이나 약을 주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어. 맞다 아니다, 옳다 그르다, 의 문제는 아니고.
재밌는 건, 그들이 준비해 간 약품들 덕분에, 그들은 말레마을의 무면허 의사노릇까지 했다네. 마을 사람들이 아프면 찾아오곤 해서, 하루에 세 번까지도 진료를 했대. 크크. 미나에 대해선 짠했나 봐. 스물다섯. 여자로서 정말 예쁠 나이지만, 남편을 사별하고 아이 넷을 키우는 그녈 보면서 안쓰럽고 마음도 아프고.
그래도 커피나무를 키워 아이들을 공부시킬 거란 믿음이 생긴 건, 그런 과정들을 직접 옆에서 본 덕분이었어. 어디 그녀라고 한 번만 아팠겠어. 힘들고 짜증나서 촬영팀에게도 그걸 내색한 적도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대. 곡괭이를 들고 함께 황무지를 개간해 줄 순 없어도 동기부여를 하면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 그러니,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라고 물을 순 없겠더라고.
우리가 급한 대로 촬영 가방에서 해열제를 꺼내 물과 함께 건네주니 미나는 미안해하며 약을 삼켰다. 촬영이고 뭐고 같이 땅을 파고 싶었지만, 이 모든 과정이 온전히 그녀의 몫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미나가 이 힘든 고비를 넘어서고 그 땅에 당당하게 커피 묘목을 심는 것.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도와주는 것은 그녀를 진정으로 배려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p.272)
또 하나 더. 미나도 그렇고, 다슈람이라는 남자. 마을 어른 중 한 명이자 나름 경제적으로 잘 사는 아버지를 뒀음에도 집안이나 마을의 도움을 못 받거든. 남편과 사별해서? 전처의 자식이어서? 그건 어떤 전통이었나요?
아니나 다를까. 과부에겐 관대하지 못한 관습이 있대. 김 PD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말레마을 사람들을 천사라고는 안 하잖아요? 사람이 있었을 뿐이에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지. 전통과 관습이고, 그게 그들의 세상엔 법칙이었던 거지. 우리 문분홍 여사가 라임이에게 그렇게 대한 것도 엄마의 세계에선 그게 법칙이었던 거야.
남편 잃은 여자는 기댈 곳이 없고, 심지어 시가에게도 모멸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관습이 있는 게지. 옛날 우리나라도 그런 게 있었잖아? 그럴수록 미나는 성격이 더 억척스럽고 강해질 수도 있겠지. 다슈람은 김 PD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가족 중 하나인데, 그는 가정을 위해 무엇이든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아빠였대. 자상하고 자신이 어릴 때 당한 상처를 자식에게 주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그러다 커피와 가족을 위해 두바이로 2년 동안 이주노동자로 떠나고. 다슈람이 없는 동안 아내가 겪은 슬픔이나 외로움도 직접 목격하면서 자신도 아팠지만, 그래도 남편이 남긴 커피를 수확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하기도 했대.
커피에 담긴 이야기 한 자락 한 자락엔 라벤다 향이 있어. 라임이가 내게 그랬듯,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김 PD에겐 기적이지 않았을까. 김 PD는 삼개월 여를 함께 있으면서 같이 배워간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어. 다큐 촬영이 아니라 커피 농사를 하는 느낌이었고, 이들은 촬영팀을 통해 커피를 마실 것을 배우는,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고나 할까. ‘커피’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세계가 아닐까. 커피 한 잔, 삶의 이야기 한 자락. 그리고 커피 스토리텔링.
일상이 달라지는, 공정무역 커피의 힘
그런데, 이런 것도 있어. 그들은 사회 지도층이 아냐. 한국 기준에서 보자면, 커피 농부들은 사회 지하층에 가깝지. 유기농법, 이런 것에 대해 알 턱이 없잖아. 책을 읽거나 학습한 게 아니란 거지. 그런데, 신기한 게 편하고 빠른 방법 대신 느리지만 자연과 공생하는 방법을 택하고 땅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건강한 커피나무를 길러낸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거든. 이런 태도와 자세는 어디서 나온 걸까? 물어봤지.
김 PD도 그랬다는 거야. 말레마을에 적응하면서 든 의문이었대. 유기농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땅을 황폐화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유기농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자연과 환경이라는 강의를 들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잘 알고 실천할까. 그렇게 배운 우리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잘 안되는데!
옥수수. 그것을 통해 머리에 전구가 반짝했대. 말레마을 사람들, 옥수수가 주식이고, 그걸 먹고 사는데, 버리는 게 없다는 거야. 우선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옥수수 싸고 있는 껍데기는 소가 먹는대. 옥수수 대와 먹고 남은 건 불 피울 때 쓰고, 뿌리는 불이 안 붙을 때 투입하면 아주 좋대. 그런 옥수수 뿐 아니라, 다른 것도 다 그런 거야. 버리는 것이 없다! 쓰레기가 안 나오는 거지. 되레 촬영팀에선 쓰레기가 대량으로 나오고.
이런 말을 하네.
“이 사람들은 자연에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 습관이 됐구나 싶었어요. 삶과 땅, 인간이 삼위일체가 돼서 사는 사람들이구나. 묘목 장을 짓는 것도 비닐로 된 차단막이 아니라, 나뭇가지 잘라 와서 해를 가리고요. 커피 농사도 이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죠. 모든 것을 자연에서 찾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들. 그래서 건강한 커피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마을 사람들은 유기농법이야말로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한 농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은 해본 적도, 하고 싶지도 않다는 말레 마을 농부들. 이런 고집 속에서 단순히 커피 수확량을 늘리기보다는 깨끗한 커피, 건강한 커피를 키워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p.141)
먹고 마시는 것이 어떻게 오는지 안다는 것은 그러니 중요하지 않겠어. 그러니, 김 PD의 일상도 바뀌었지. 첫사랑 같은 동티모르에서 커피가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던 그녀도 이젠 단순히 어디어디 커피라고 생각지 않아. 어떤 사람들의 커피인거지. 즉, 동티모르 사람들의 커피, 네팔 말레마을 사람들의 커피, 이렇게 된 거야.
특히 비싼 커피하우스에서 로스팅이 잘 된 커피를 먹어야 맛있는 커피인 줄 알았는데, 그런 환상도 깨진 거야. 말레마을에서 그냥 불을 피워 프라이팬에 볶고 절구에 찧어서 주전자에 끓여먹는 커피도 엄청나게 맛있다는 것을 알았지. 에스프레소머신? 커피메이커? 그거 다 어줍지 않은 문명의 이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대. 산지에서 먼저 커피 맛이 대부분 결정 나고 자본주의의 값비싼 이기들은 장식에 지나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런 생각에서 얻은 삶의 지혜.
“때로는 불편한 것도 좋은 것 같아요. 편한 것만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이젠 약간의 불편함도 즐기려고 해요. 주서기가 없으면 손으로 짜기도 하고, 즐기기 시작하니까, 불편하다는 느낌도 없어요.”
암, 알면 달라지지. 나도 라임이를 알아서 그렇게 바뀐 거잖아. 사회 지도층이 그렇게 바뀐 것 봤어? 그게 다 어메이징한 경험을 하면 그리 되는 거라고. 그렇다고 그 어메이징한 경험이 아주 비싸고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지금 김 PD의 이야길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안 그래? 100여 년 전만 해도 양탕이라고 불리던 커피가 한국에서도 가장 익숙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됐는데, 커피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오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그걸 알면 달라질 거야.
백 년 전만 해도 ‘양탕’으로 불리며 환영받지 못했던 검은 음료가 어느새 한국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커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커피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 커피를 키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p.12)
생각해 봐봐. 생산자 없이는 커피도 없잖아. 생산자의 마음, 즉 태도와 자세에 따라 건강한 커피가 나오느냐 아니냐가 결정되잖아. 농부가 좋은 커피를 만들겠다는 노력이 없으면 질 떨어진 커피, 오염된 커피를 마시게 되는 거고. 김 PD 말에 따르면, 커피나무에 농약은 필수래. 우리가 해로운 커피를 마실 것이냐, 건강한 커피를 마실 것이냐는 전적으로 농부에 달린 거야.
그것이 곧 커피가 어떻게 오는지 알아야 하는 이유지 않겠어? 사람의 얼굴을 한 커피. 결국 관심이 가장 중요한 거야. 내가 라임이에게 쏟은 관심을 생각해 봐. 응? 대단하지 않아? 내가 그랬잖아. “난 그런 댁이 얼떨떨하고 신기해. 그래서 나는 지금 딱 미친놈이야.” 김 PD 얘길 들으니 그래. 자연, 환경, 철학 등 커피에도 세상이 이치가 다 들어 있는 거지. 커피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생각한다는, 내가 안다는 커피 만드는 그 형은 책을 읽고는 아래와 같은 말도 하더라.
“커피 열매가 익기까지 기다림의 미덕이 있듯,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일상에서 필요하듯, 우리는 지난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공정무역이 빈곤을 단박에 벨 수는 없으며, 세상을 뒤집을 수는 없다. 허나, 이 책을 읽는다면, 내가 만드는 커피를 마신다면, 앞으로 커피는 댁들이 평소 알던 그런 커피가 아냐. 커피 장인(농부)이 한 알 한 알 정성스레 심은 커피콩으로, 바리스타가 그 노력과 마음에 자신의 마음과 노동까지 담아 빚어낸 선물인 거다. 그게 바로 내가 아는 커피의 관계(학)이다.”
늘 공정무역 커피만 유기농 커피만 찾아 마시라는 건 아냐. 한 번쯤은 커피를 누가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거지. 어릴 때, 밥 먹으면서 부모나 선생으로부터 얘기 많이 들었잖아. 이 쌀을 만든 농부를 생각해 보라고. 같은 맥락이지. 앞으로 커피를 마실 때, 그걸 생각해 본다면 이전에 커피를 마실 때와는 달라질 거야. 사회 지도층인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본다, 그러면 내가 확 따진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히말라야의 햇빛과 안개, 그리고 농부들의 정성 어린 손길을 머금고 마침내 말레 마을 올해의 첫 커피가 완성되었다. 한국에서 무심히 마시던 한 잔의 커피. 그 안에 말레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이렇게나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p.304)
우리 로엘백화점에도 공정무역 커피를 입점해야겠어. 물론 한국에서 공정무역은 걸음마 단계지만, 그런 게 다 사회 지도층의 윤리 아니겠어? 먼저 노블리스 오블리제. 김 PD에게 백화점에 공정무역 상품을 입점할 때 쓸 만한 멘트를 재능기부 해달라고 그랬더니, 이런 말을 건네더라. 친구의 커피!
“친구의 커피죠. 예를 들어 친구가 동네 슈퍼를 내면 다른 마트나 슈퍼에 가지 않잖아요. 공정무역도 딱 그거 같아요. 하나를 사더라도, 자부심을 갖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소비, 그런 게 럭셔리한 소비 아니에요? 세상을, 평화를 생각할 수 있고요. 먹고 싶고, 쓰고 싶은 소비가 아닌 이런 소비가 정착되리라 생각해요. 공정무역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친구의 슈퍼를 도와준다는 마음이면 돼요. 200만 원짜리 가방을 사는 것보다 더 럭셔리한 소비죠. 천 년 만 년 살 것도 아닌데, 럭셔리한 소비하고 싶지, 치사한 소비하고 싶지 않잖아요. (웃음) 마음도 넉넉하게 해주고, 친구가 자립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굉장한 거예요. 1,000만 원 불우이웃돕기만큼이나 공정무역 상품을 쓰는 것도 좋은 거고, 착한소비자가 되는 길이에요.”
더 나은 세계, 함께 만들자
“삼신할머니 랜덤 덕에 부모 잘 만나 세상 편하게 산 남자, 저랑 놀 주제 못 됩니다.” 라임이가 했던 말, 기억하지? 그런 나랑 놀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난 이제 김 PD가 말한 ‘럭셔리한 소비’를 하고 있거든. 김 PD와 촬영팀 덕분에 사회 지도층의 덕목을 하나 더 쌓긴 했는데, 궁금한 거야. 앞으론 어떤 다큐를 준비하고 있는지.
아니나 다를까! 공정무역 다큐 시리즈를 생각하고 있대. 커피가 아닌 다른 품목을 통해서라도 또 다른 말레 마을 사람들을 찾아 나서고 싶다는 거야. 우리 백화점에서 드라마를 찍게 했던 것처럼, 후원을 한 번 해봐? 라임이랑 상의 좀 해봐야겠어.
더 많은 관심이 ‘더 크고 빠른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지 않을까. 나와 라임이 사이의 세 아이에게도 그런 세계를 물려주고 싶거든. 그땐 우리 아이들이 네팔 아이들, 동티모르 아이들, 멕시코 아이들과 옆집 친구처럼 가까워질 거야. 김 PD는 공정무역이 그런 이해를 돕는 시초가 될 거라고 하네.
돈 많은 나 주원이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이 커피 농부들, 카레이서가 차에 가진 애정처럼 커피를 다뤄. 소매치기나 성추행범을 보면 생판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뜨거운 커피를 확 부어. 돈도 없고 커피나무를 가꾸느라 온 몸은 상처투성이 주제에 우리 같은 놈들을 위해 1분 1초 커피나무를 가꿔, 그런 농부들이야.
난 이렇게 멋진 농부를 본 적이 없어. 이게 내 대답이야. 혹시 주위에 우리 백화점 주식 갖고 있는 사람 있으면 빨리 팔라고 해. 그 백화점 사장이 커피 농부들에, 공정무역 커피에 빠져서 일생일대의 인수합병을 망치는 중이거든. 이젠 주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알았어. 당연히 우리 로엘백화점에? 공정무역 커피가 입점할 거고. 사회 지도층이란 그런 거야. 참, 한류스타 오스카도 공정무역 커피에 대한 노랠 내 놓을 거야.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거든.
저기… 당신도 오늘 내가 한 말, 잊지 말고, 세계를 함께 떠올려보자고. 무슨 소리냐고? 그래서 내가 좀 전에 저기… 하면서 수줍게 말 꺼내는 거 못 느꼈어? 응? 김 PD의 말로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미국 시애틀에는 한 집 건너 커피하우스가 있다는데, 그래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을 실감하고 있대. 내가 라임이를 사랑할 때 잠 못 이루는 거 봤지? 그렇게 세계도, 사랑하고 커피 만드는 사람도 생각하고 관심을 갖자고.
내 말 무시하면 알지? 나, 신경 안 써도 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사람들이 우릴 쳐다본다고? 내가 방금 가난한 커피 농부들에게 신경 쓰자고 했으니까. 만약 신경 쓰기 싫다, 생각하기 싫다, 그러면!!!! 나, 안 해 너랑, 아무 것도. 그냥 깨우쳐 주는 거야, 그쪽한테 내가 얼마나 먼 사람인지. 주원앓이 같은 거 하지 말고 내 이름 들먹이지도 마. 대신 신경 쓰면 너는 나의 봄이고. 그러니, 주문을 외운다. 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
참, 지난 14일 발렌타인데이, 라임이한테 공정무역 초콜릿을 받았어. 라임인 그런 여자야. 난 이렇게 멋진 여자를 본 적이 없어. 라임아, 너는 나의 따뜻한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