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이 있었고, 돌아옴이 있었다. 그 어긋남이 시를 떠올리게 하는 밤이었다. 서울 산울림소극장에는 그녀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콜레라가 뿌리박힌 도읍을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겐 기다림이 있었다. 그 기다림에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으로 화답한 허수경 시인. 기다림은 이렇게 조곤조곤 읊조리고 있었다.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시인 허수경, 우리는 오래도록 당신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래,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이지 말고 내게로 와라.’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나도 당신도 그렇게 자랐다. 식량 생산의 산업화 즉, 산업화된 먹을거리 체제에 의해 우리는 길러졌다. 풍부하고 다양한 것처럼 포장한 ‘공장식 농업’에 의한 값싼 공장형 식품 시스템이 소와 돼지를 단지 움직이는 구조물로, 그들을 업신여기게끔 만들었다. 산업화된 양계장의 닭들은 햇빛을 보지 못한다. 치킨집으로 향할 육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말하고, 그들은 말하지 못한다는 논리로, 인간의 생존을 위해 너희들에게 자존 따위는 없다며, 인간은 몹쓸 짐승이 됐다. 그러니 시인이 필요하지. 중병을 앓는 세상엔 의사보다 시인이 필요하다. 의학보다 시가 더욱 절실하다. 『음주사유』의 저자 박기원은 그랬다. “시집이 팔리지 않아도, 이 세상에 병이 있는 한 시인은 사라지지 않는다.” 동감한다. 고로, 시는, 시인은 멸종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가장 마지막에 멸종할 무엇이다.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채호기 시인은, 언어는 사물이나 인간의 몸을 떠다니는 ‘의미의 도구’가 아니라 그 일부라고 했다. 몸을 관통하는 언어야말로 시가 될 수 있다. 시인은 자기 몸의 일부인 언어를 끄집어낸다. 시는 그래서 나온다. 허수경 시인도 그렇다. 그의 언어는, 곧 그의 시는 몸을 통과해서 우리에게 온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이 박힌다. 심장이 뛰는 이유다. 그녀는 말했다.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탄생한다.”(‘시인의 말’ 중에서)
이날, ‘허수경을 사랑하는 선후배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화음전’이라고 했다. 최원정 KBS아나운서의 사회로 김경미, 김경주, 김이듬, 심보선, 이병률, 함성호 시인이 함께 했고,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음악이 붙었다. 그들은 허수경 시인의 몸을 관통한 언어가 박힌 사람들이리라. 함께 한 독자들 역시. 허수경 시인의 간절한 소망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커피 노동자인 나도 마음속으로 소망을 빌었다. 노동자, 동물(생물), 환경을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키기로 마음 먹은 것을 지켜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허수경 시인의 낭독으로 문이 열렸고,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릴 때」(p.28)이 인사말이었다.
문득 나는 한 공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도심의 가을은 가을 공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 저녁에 지는 잎들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장의 몸으로 땅위에 눕고
(…)
술 취해 잠든 늙은 남자를 남기고
나는 가을공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원정 KBS 아나운서와 허수경 시인이 대화를 나눴다.
처절한 고독이 느껴지는 시였다. 굉장히 감정을 많이 싣고, 울컥하는 느낌으로 읽어주셨는데, 독일에서 썼나? 계기는?
“해질 무렵 공원을 갔다. 거기엔 늘 앉아 있는 분들이 있다. 집이 없거나, 방이 없는 분들이다. 술에 취해 있는 분이 있었는데, 그걸 바라보면서 쓴 시다. 며칠 전 낭독회에서 울 뻔 했는데, 10년 만에 서울에 와서 마음이 그랬나 보다.”
10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감회가 어떤가?
“고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냄새다. 특히 음식 냄새다. 보통 길을 가다가, 양파를 넣고 된장을 끊이는 냄새 같은 걸 맡으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나는 그렇다. 그 냄새를 맡으니 마음이 힘들었다. 왜 그동안 못 들어왔나 싶어서. 다들 그렇지, 뭐. (웃음)”
왜 10년 동안 못 왔나.
“(목소리가 작게 나오는 마이크를 교체하며, 웃음) 웃어주니 마음이 편해진다. 굉장히 불편한 얘길 하려고 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공부 한답시고 거기 있었는데, 박사 논문 쓰는데 오래 걸렸다. 집안 사정도 있었다. 그 정도로만 하겠다. 나중에 오면 개인적으로 말해주겠다. (웃음)”
고고학을 전공했다고 들었다. 왜 갑자기 전향을 했나?
“겉멋 들어서 그렇지 뭐. (웃음) 낭만적인 생각으로 고고학을 시작했다. 낭만적인 생각으로 뭔가 시작할 게 아니다. 고고학은 딱딱하고 해야 할 것도 많고, 땅도 측량해야 하고, 나처럼 숫자에 약한 사람은 혼도 많이 난다. 예상치 못한 여러 어려움이 있었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서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인디아나 존스, 좋아한다.”
『아틀란티스야, 잘 가』를 읽었는데, 꼭 읽어라. 감동받았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했다. 경실이가 몹시 뚱뚱한 여자로 나오는데, 어렸을 때 진짜 그랬나.
“정말 그랬다. 부끄러운 이야기는 금방 해치우려고. (웃음)”
앞으로의 소망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스무 살 어린 세대들이 앞으로 겪어야 할 시절은, 우리가 겪은 시절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여러 여건이 그렇다. 젊은 세대들이 일은 많이 하지만, 가난한 상황으로 흘러간다고 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한다. 그런 가운데, 시인, 노점상, 노동자들이 어떤 의미에선 노동만으로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없는 상황으로 갈지 모르겠다.
둘째로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위치를 노점상, 노동자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몸을 통과하지 않은 시는 시가 아니란 느낌을 받는다. 몸을 통과해 나가는 시는 뭐냐. 어떤 시를 읽을 때 내 몸에 와서 박히면, 그 시를 쓴 시인이 몸 바깥을 통과해 여러분에게 가는 것이다.”
이어,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무대가 어우러졌다.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멤버, 송은지에게 허수경 시인은 동아리방의 스타였다. 소주를 마실 때면, 늘 허 시인의 시를 이야기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니, 이날의 첫 대면과 낭독은 영광스러운 자리. 다른 멤버, 민홍은 이번에 그녀를 처음 알았는데, 시를 읽고 무척 감동했다.
“이런 말 잘 안 하는데…”하면서 운을 뗀 그는, 처음엔 슬픔, 이후엔 따뜻함으로 전이된 감정을 언급했다. 사투리의 향연도 좋은 느낌이었다.
「안녕 슈퍼맨」을 첫 곡으로 선곡한 이유를 묻자,
“시집에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어떤 노래를 할까,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지난해 어린이를 위해 만든 노래이자, 어린이들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없는 것 같아서 동요라는 이름을 붙여 7곡을 발표했는데, 그 노래들 가운데 2곡을 들려드리자 정했다.”
(소규모아카시아밴드)
동아리방에서 했던 얘기 중에, 이런 말도 있었다. 허 시인은 약주를 많이 하실까? (웃음)
“지난 낭송회에서 한 분이 걱정을 했다. 혹시 심리적으로 이상이 있을 정도로 술을 마시느냐고. 그건 아니고. 술이라는 시적인 이미지를 좋아한다. 술은 오랫동안 빛과 어둠과 시간이 합쳐져서 나오고 깊어진다. 그 깊은 액체를 마시면 인간의 영혼이 흔들리거든. 그래서 술이다. 술 많이 먹나? 조금씩 먹어라. (웃음) 오늘 선후배 시인들이 와 있는데, 10년 만에 다시 한 재회고, 처음 본 후배 시인도 있다. 그러니, 술 한 잔 안 하면 죄지.”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낭독. 「아직도 해가 뜨지 않아서」(p.94)
가만히 종이를 내놓고 너를 그려본다
너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하여 그려본다
너의 얼굴 자리에다 기타를 그려넣는다
너의 코에다 입에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음악을 그려넣는다
아, 너의 얼굴은 음악을 기다리는 기타가 되어 있다
(…)
마지막 숨을 쉬면서 이슬에 젖는데
나는 태어나지 않은 음악을 너의 얼굴로 가만 들여다보려 한다
이어진,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노래는 「개나리 본부」.
최원정 아나운서는 이날을 ‘집들이 하는 날’로 묘사했다. 소박한 잔칫상을 나눠먹으며 추억과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런 날. 함께 한 다른 시인들과 시를 나눠먹고, 이야기를 마실 수 있어서 그런 표현을 했나보다. 심보선, 함성호 시인이 먼저 함께 했다. 함 시인의 「나의 도시」(p.10) 낭독이 있었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스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
물 위에 뜬 건 무의식뿐, 무의식뿐,
건덩거리는 입술을 위로 올리고 죽은 무의식뿐
인연을 물었다. 우선, 시를 쓰는 심보선 시인의 허수경 시인과의 인연.
“허수경 선배는 ‘21세기전망’의 동인인데, 한 번밖에 못 뵀다. 94~95년이었나. 독일에서 귀국했을 때였는데, 내가 갓 등단하고 동인 술자리에서 처음 뵀다. 말씀을 붙이고 싶었는데, 정말 까마득한 선배라 옆에서 뻣뻣하게 혼자 독백하면서 있었다.”
허 시인은 그런 그를 기억한다. 말 없고 구석에서 술만 좋아하는 후배로. 말을 나누지 못한 이유는 단순하다. 후배가 말을 안 붙이니까. 선배가 먼저 말을 붙이기 그래서 말을 안 했다.
허 시인과는 20년 지기인 함성호 시인은 십여 년 만의 만남인데도 낯설지 않다고 했다. 심심할 때마다 허수경의 시를 찾아본 덕분이랄까.
“시들이 상당히 충격이었다. 허수경의 시가 준 충격은 그 이상한 가락에 있다. 나는 그걸 ‘뽕끼’라고 부른다. 조선에선 록이든 미술이든, 모든 예술엔 뽕끼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신파에 청승, 그런 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걸 뽕끼라고 하는데, 허수경 시의 뽕끼에 충격 받았다. 훔쳐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 시인이 화답한다.
“2월에 함성호 시인의 시집이 나온다. 한번 두고 보자. (뽕끼가) 있는지 없는지. (웃음)”
판형도 그렇고, 파격적이다. 이번 시집을 접할 때, 어떤 느낌이었나.
심보선 :
“이런 판형, 디자인, 한국에선 시도되지 않은 실험이다. 다른 책이나 장르는 몰라도 시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역인 것 같다. 파격이나 도발을 해도 괜찮고, 시집 자체도 파격과 도발을 했는데, 높이 사고 싶다. 제목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인데, 아까 함성호 시인이 뽕끼를 말했듯, 제목만 봐도, 그 이상한 가락이 느껴진다. ‘빌어먹을’과 ‘차가운 심장’ 사이에 쉼표가 없었다면, 심장에 대한 진술이 될 텐데 쉼표를 찍음으로써 절묘한 틈, 공간이 생겼다. 그게 가락인 것 같다. 역시 제목 하나에도 허수경 시인은 절묘하고 이상한 가락을 만들 줄 아는구나, 제목 자체로 절창이 되는구나, 싶더라.”
심보선 시인의 낭독에 앞서, 이런 멘트가 날아왔다.
“허수경 시인의 시를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면, 경지와 지경이다. 그게 뭐냐면, 노래의 경지는 범접할 수 없는데, 그 노래를 들려줄 수 없는 것이 세상은 이 지경이라는 거다. (웃음)” 「아름다운 나날」(p.46)의 낭독.
(…) 영화를 사랑합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울고 싶어요
사용기간이 지난 약을 그 대륙에 팔러 나선 유럽의 약장수처럼
검은 비닐 바다를 통과해서 사막 바께쓰 속을 지프차로 건너가던
학살자의 검은 안경처럼
울고 싶어요, 그 말을 할 때마다 영화가 보고 싶어요
두 시인이 퇴장하고, 다른 두 시인이 다가왔다. 김경미 시인과 이병률 시인. 김 시인이 「여기에서」(p.14)를 읊었다.
(…) 지금 그대 없는 자연은
언어가 되었다
놀았다
더운 물속에 쓰라린 상처처럼
바람 앞에 얼굴을 가리는 새처럼
결국은 아팠다
놀았으므로 지극히 쓰라렸다
세 분, 공통점이 있다. 방송국 작가 출신이라던데.
김경미 :
“남 들러리 서는 일에는 안 가는데, 허 시인이 온다고 해서 기꺼이 나왔다. 그녀를 알게 된 건, 1980년대 실천문학에서 첫 시집을 내고 실천문학사에 몇 번 찾아갔다. 한 번은 굉장히 좋은 시인의 시집이 나올 거라고 하는 거다. 속으로 질투했다. 어떤 시인인지 보자는 마음이었는데, 만나고 나선, 친해야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이었다.
허 시인이 가진 가락 등을 나는 갖진 못했다. 갖고 싶은 부러움도 있었고, 가깝게 지냈다. 나는 그때 방송일을 하고 있었는데, 허 시인도 방송일 하러 들어왔더라. 겉으론 화려하나 방송국은 복잡하고 견딜 수 있을까 우려했는데, 뜻밖에 잘 견디더라. 방송국 일도 좋아하고.
단편적인 기억은, 독일 가기 전에 갈지 안 갈지 고민하는 거다. 그때마다 나는, 가보는 거지, 하면서 남의 일이니 쉽게 얘기했다. (웃음) 안 되면 돌아오면 되잖아,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그렇게 얘기한 건, 금방 올 줄 알았다. 그런 장면이 생각이 난다.”
허수경 :
“나는 그 당시 신해철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를 했다. 그때는 신해철씨가, 지금도 그렇지만 유별났다. 튄은 의미로. 진지하고 호기심 많은, 지적인 청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인끼리는 그런 게 있다. 다른 사람이 쓴 시가 마땅찮으면 안 만난다. (웃음) 경미 언니를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시를 쓰는 동료 가운데 한 명이라고 여기고 살고 있다. 언니는 안 그랬어? 나만 그랬던 거야? (웃음) 그땐 확신이 없어서 누군가가 붙잡으면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독일에 가본 적도 없고, 잘 모르고, 그래서 붙잡아주면 주저앉으려 했는데, 다들 그러는 거다. 가봐.”
김경미 :
“그때 안 잡은 건, 속으로 고소한 측면도 있었다. 조금. 너 가서 고생해봐라. 물론 애정에서 나온 생각이고. 진짜 그땐 갔다가 금방 올 줄 알았다. 가서 여행하면 되고, 안 되면 돌아오면 되고.”
이병률 :
“방송국에 있을 때, 막내여서 말 붙일 군번이 아니었다. 이미 심적으로는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어서인지 더 어려웠다. 대학 때 시를 공부하면서 김경미 시인을 먼저 알았고,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조금 가까워진 인연이라면, 허수경 시인은 그때 연은 아니었다. 시를 기획하고 메일 드리는 정도였는데, 못 뵀던 분이어서 그런지, 마음이 절절했었던 것 같다. 며칠 전에 처음 뵀다.”
진한 데이트를 했다는 얘길 들었다.
이병률 :
“식사하자는 청을 드렸다. 다른 시인들과 함께 뵙겠다고 시간을 내달라 그랬는데, 운 좋게 나만 뵀다, 그전부터 시로 만나 봬서 낯설진 않았고, 뭐 들고 싶으시냐고 물으니 짬뽕이라고 하시더라. 탕수육도 먹고. (웃음) 그것만 먹은 건 아니고 많은 걸 먹고 마셨다. 그런 기대도 있었다. 어떤 분일까, 시와 사람은 어떻게 관계할까. 자극을 많이 주셨고, 불안한 앞으로 갈 여러 길에 대해 무조건 120% 용기를 주셨다. 집에 오니 새벽 3시가 넘었던데, 필요한 말씀을 많이 들어서인지,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얘길 들으니 따듯한 선배라는 생각이 든다.
허수경 :
“사실, 이병률 시인이 (술을) 두 번 사고, 나는 한 번 샀다. 여기 오니 후배들이 술값을 막 내는 거다. 이병률 시인과의 인연은, 그가 『찬란』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내가 해설을 썼다. 당시 시집 원고를 보내줘서 읽을 수 있었다. 터키에서 발굴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일하면서 틈틈이 읽었다. 마음속으론 인연이 각별하다.”
이번 시집 어떻게 봤나.
이병률 :
“허수경 시인은 시집마다 특성이 있다. 이번 시집도 이전 시집과 다른 문법과 성향으로 시를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집 한 권을 노래하듯이 지었다는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그런지 읽기가 편했다. 허 시인의 정신세계가 정말 어렵고, 대중들이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고민하게 하는데, 이번은 사생활도 용기 있게 툭툭 털어놓은 부분도 있다. 역시 독자들을 의식한 것 같진 않은데, 소통 면에선 예전보다 수월하고 폭이 넓어서 이해하기 쉬웠던 것 같다. 이번 시인선의 큰 판형은 허 시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읽는데 좋더라.”
이 시인의 낭독이었다. 「여기는 그림자 속」(p.91).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거겠지,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태양 안에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 타는 줄도 모르고 어느 가운데를 건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시인들은 얼굴을 바꿨다. 다른 시가 흘러나왔다. 김경주 시인과 김이듬 시인의 등장. 우선, 김이듬 시인의 「기차역에 서서」(p.92) 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당신은 그날 기찻길에 놓여 있던 시체였는지도
(…)
어쩌면 당신은 그날 그 여인숙이었는지도 세상 끝에는 여인숙이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 멀리멀리 끝까지 갔다가 결국 절벽에서 뛰어내린 실업의 세월이었는지도
(…)
당신은 그랬는지도 우리가 멀리서 보이지 않는 서로의 몸을 향하여
입을 맞추려고 할 때마다 사라지는 정신이었는지도
김이듬 시인은 진주에서 올라왔는데, 허수경 시인과 고향이 같다. 고향에서 허 시인은 어떤 시인으로 알려져 있나?
김이듬 :
“지금 처음 뵀다. 92년, 허수경 시인이 독일에 가셨을 즈음에 나는 세상을 헤매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를 쓴다고 하니, 주위에서 허 시인을 아느냐고 묻는 거다. 거의 레전드급이라고나 할까. 진주에서 글 쓰는 사람, 책 읽는 ?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허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귀여운 고향 후밴데, 무시무시하다. 어떤가.
허수경 :
“저리 키가 큰지 몰랐다. 재미난 얘기 해줬는데, 김민정 시인 어디 있나. 독일에 있을 때, 김 시인이 책을 한 박스씩 보내주곤 했다. 독일은 물건이 오면 세관에 가야 한다. 세관원이 물어보더라. 독일에서 팔 거냐고. (웃음) 안 팔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번 시집이 첫 시집이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다. 다섯 번째 시집인데, 네 번째까지의 시집은 선배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번 시집은 후배들의 영향을 받고 쓴 시집이다. 독일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후배 시인들이 무척 좋은 시를 쓰고, 나랑 다른 시를 써서 매우 좋았다. 후배들에게 무척 고맙다.”
김경주 시인 얘기를 참 많이 했다던데, 김 시인은 허 시인으로부터 사랑 받은 것을 알았나.
김경주 :
“직접 듣진 못했다. (허수경 : 인터뷰할 때, 여러 시인을 이야기했는데, 기자가 김경주 시인을 좋아하니까 그랬나보다. 꼭 한 번 김 시인을 읽어보라.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지구인이 쓴 시가 아니라서 그렇다. 외계인이 쓴 시다. 외계에서 날아온 목소리 같다.)”
신혼여행에서 언제 돌아왔나?
김경주 :
“튀니지, 모로코에 갔다가 그저께 왔다. (좋던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첫 전화가 김민정 시인에게서 왔는데, 허수경 시인이 오셔서 낭독회를 꾸리는데, 와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내에게 그 이야길 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 처음 뵀는데, 마음속에서 인연을 만들어가려고 했던 시인중의 한 분이었다. 시를 처음 쓸 무렵에, 첫 시집에 실린 「폐병쟁이 내 사내」, 거의 시를 못 외우는데, 그 시만큼은 외운다. 이리 시작한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꼴 갖춰…”
습작 시절에, 시를 쓴다면 이 시의 폐병쟁이 같은 남자가 돼서 허 시인에게 사랑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년 있다가 데뷔했는데, 허 시인이 독일로 떠난 줄도 몰랐다. 서울 오면 있을 줄 알았는데, 갔더라. (웃음) 허 시인의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이 서울 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배고프던 시절, 허 시인의 어떤 구절이 도움이 됐다. 독일 갈 때마다 주소가 있었는데, 한 번도 연락을 못했다. 이번 기회 통해 마음속에 인연을 만들려고 했던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큰 산이고 은은한 등불이 된 선배인거 같다.
허수경 :
“후배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말은, 그냥 빈말이 아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은 우리 시의 미래가 될 테고, 나는 과거가 될 거다. 나이가 들면서 분명히 잘라 말하자면, 나보다 나이 어린 시인들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배가 후배한테 영향을 받는 게 웃긴 게 아니다. 같이 교통하는 전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하고 말 것도 없이 후배들 시집이 참 좋았다.”
외계에서 온 목소리 같다던 김경주 시인의 목소리,「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p.22).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 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 인연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
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
독자들과 허수경, 묻고 답하다
6년차 주부인데, 지도교수와의 러브스토리를 듣고 싶다.
“어떻게 얘기를 해야 하나. (웃음) (남편이) 지도교수였다. 박사 논문 심사를 해야 하는데, 남편이 논문심사 했다고 뭐라고 할까 봐, 외부에서 논문 심사할 분을 모셔오기도 했다. 사랑이야기라고 할 건 없고, 발굴도 함께 다니고 하다 보니… 밥을 같이 자주 먹으면 연애를 하게 된다더라. 발굴 작업을 하면서 두 달 동안 하루 세끼씩 같이 먹다보니 정이 들었다. 이번엔 같이 오진 못했다.”
다른데도 많았을 텐데, 왜 독일로 갔나?
“그때 독일이 가장 쌌다. 등록금도 없고, 기숙사비도 싸고. 두 번째 이유는, 독일 대학이 갖고 있는 정신 때문이었다. 2차 대전 종전 후 생겨난 정신인데, 세계 어디든 독일에 있는 대학 지원자 누구에게도 공부할 자리를 주겠다는 것이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오늘 낭독회하면서 만지작거리던 손수건이 자꾸 눈에 띄더라. 애착을 가진 것도 같고. 그 손수건은 어떤 의미인지.
“이런 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쑥스러워서 그랬다. 이 손수건은 지난 낭독회에 찾아온 분이 준 거다. 시를 읽다가 목을 매니까 손수건을 건네주고 가셨다. 오늘도 그런 일이 생길까봐 준비한 거다. 오늘이 두 번째 낭송회인데, 동료 시인들이 와주고 도와줘서 그런지 마음이 편하다. 손수건으로 눈을 닦을 일이 없다 보니, 자꾸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독일에서 20여년 있었는데, 미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로 나를 돌려주고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독자들 덕분이다. 국제 거리에서 미아가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독자를 생각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감사한다.”
마지막 낭독.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p.52).
네가 들어갈 때 나는 나오고 나는 도시로 들어오고 너는 도시에서 나간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나올 때 들어가는 내가 들어올 때 나가는 너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 도시에서 태어났지, 모든 도시의 어머니라는 그 도시에서 도시의 역전 앞에서 나는 태어났는데 너는 그때 죽었지 나는 자랐는데 너는 먼지가 되어 도시의 강변을 떠올랐지 그리고 그날이었어 전철문이 열리고 네가 나오잖아 날 바라보지도 않고
(…)
너는 누구인가, 닫히는 전철문 앞에 서서 먼 구멍으로 들어가던 내가 사랑하던 너는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