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의 귀재, 가요계의 어린왕자. 지난 22년간 최고의 수식어를 독점했던 가수 이승환 씨를 만나기 위해 강동구 성내동에 자리한 드림팩토리를 찾아갔다. ‘꿈공장’이라는 동화에나 나올법한 공간을 마련해놓고 ‘공장장’을 자처하며 수많은 직공들과 음악을 논하고 만들어냈던 현장.
하지만 토요일 한낮에 찾아간 드림팩토리는 더 이상 어린이들이 찾지 않는 놀이동산처럼 다소 을씨년스러웠다. 기자 역시 그의 음악에 매료돼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의 공연에서 5시간을 함께 내달렸던 ‘자랑스러운 팬’이기에, 약속된 4층까지 계단을 오르며 ‘중견가수가 2000년대에 음악을 한다는 것’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을 해야만 했다.
“드림팩토리는 개인적으로는 자랑스러운 후회를 하는 곳이죠(웃음). 1990년대 풍요롭고 다채로웠던 음악의 상징이고, 그래서 이제는 몰락해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런 공간? 예전에는 녹음실에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왔었는데,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죠. 저희 말고도 많은 녹음실들이 없어졌어요. 이제 가요계는 녹음보다는 마케팅에 돈을 많이 쓰니까요. 시류를 따라가지 못해서 드림팩토리가 망해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정도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남고 싶어요.”
최첨단 장비를 갖춘 녹음실에 뮤직스쿨과 공연스태프 양성학원까지, 그야말로 꿈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드림팩토리는 이제 모든 공간을 임대를 줘야 하는 상황. 그 안에서 이승환은 홀로 나이 들지 않고 꿈을 움켜쥐고 있다.
“드림팩토리는 키치적인 제 색깔 그대로 만들었고, 그래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좋아요. 물론 이제는 회사가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임대밖에 없어서, 모든 공간을 임대를 줘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요. 지난 2~3년간 무척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많이 놓았어요. 기대나 설렘이 없어서인지 마음도 많이 편해졌고요. 언제나 꿈꿨던 잔잔한 삶을 이제야 누릴 수 있겠구나 싶어요.”
지난해 발매된 10집 역시 그에게 ‘내려놓음’을 강요했다. 완벽한 앨범, 최고의 공연. 어쩌면 그 ‘열정’이 그에게 독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22년간 너무 열정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10집은 거의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제가 했던 노력의 120%를 쏟아냈는데, 인구에 회자되는 걸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회자되지 않으니까 상처를 받더라고요. 주변에서 많은 분들이 ‘공연을 하지 말라’고 해요. 공연을 너무 많이 해서 스스로를 깎아먹고 있다고요. 저한테 공연을 하지 말라는 것은 정말 직언이고 충언이죠. 그래서 잠시 열정을 놓자, 휴지기를 갖자고 생각하고 있어요.”이런 얘기를 듣자고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 아니었기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러다 문득 열렬 팬인 기자 역시 최근 2~3년간 그의 공연에 가지 못했음을 기억해냈다. 신경 써야 할 일상과 책임져야 할 업무가 늘어나면서 ‘우리의 스타’에게는 그만큼 관심을 줄였다. 30대가 그렇지 않던가. 기존 팬들이 나이를 더해가면서 가수 이승환은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스탠딩 공연을 하면 못 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농담 삼아 ‘추억을 팔고 사는 가수입니다’라고 하는데, 예전에 제 음악을 들었던 분들은 아예 지금 음악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요. 늘 하는 얘기가 이승환은 ‘천일동안’ 뒤부터 별로였어.. 실제로 5집부터 내리막길이었지만, 마니아층은 오히려 그때부터 많이 생겼거든요. 괴리감이 생기는 거죠. 어떤 게 대중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바로 그것이 문제다. 올해 나이 46살인 이승환은 여전히 ‘젊은 음악’을 추구한다. 또래의 뮤지션들이 관객들의 입맛을 염려하고, 무대가 아닌 제2의 다른 공간에 삶의 터를 잡는 동안, 그는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음악을 좋아하길 바랐고, 젊게 음악을 하는 가수를 고집했다.
“괴리감은 음악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많이 느껴요. 이제 대부분 학교나 학원으로 가서 교편을 잡고, 만나면 학교시스템이나 학장님 얘기를 하니까요(웃음). 저는 젊게 음악을 하고 싶어요. ‘왜 우리의 선배들은 요즘 음악을 듣지 않지?’라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저는 오버그라운드의 느낌보다는 인디밴드들의 음악을 좋아해요. 인디씬에서도 오버 가수지만 저에게 반감을 갖지 않고 있다고 들었고요.”
덕분에 2월 26일 악스-코리아에서 열리는 <차카게 살자 season2>에도 ‘국카스텐’ ‘데이브레이크’ ‘원모어찬스’ ‘10CM’ 등이 대거 참여를 알려왔다. 지난해를 건너뛰고 새롭게 무대를 마련하는 시즌2는 무엇이 다른가?“시즌1이라고 말한 10년간의 <차카게 살자>는 중반 이후부터 파티 형식이었는데, 갈등이 많았어요. 자선공연인데, 자선을 빙자한 향락이 지나치지 않았나.. 그래서 시즌2에서는 자선과 봉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많은 자선단체들이 참여하고, 관객들도 체험할 수 있도록. 또 예전에는 밤을 새워가며 했는데, 이제 낮부터 시작해서 지하철과 버스가 끊기기 전에 보내드리려고요(웃음).”요즘의 볼거리 많은 공연들. 그 시초는 바로 이승환이었다. 닥치면 바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아이디어. 하지만 이제 그는 과잉보다는 밸런스를 강조한다.
“지금도 스태프들이 얘기하는데 큐시트를 볼 수가 없었대요, 너무 빽빽해서. 5시간 넘게 공연하는데, 한 곡도 그냥 넘어가는 곡이 없었으니까요. 그때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재미와, 공연문화를 선도한다는 자부심이 있던 시기였죠. 지금은 음악을 절대 헤치지 않는 연출, 언제나 음악이 기본이 되는 무대를 강조해요. 요즘은 특히 어쿠스틱 사운드가 좋아서 완벽하게 음악만 있는 공연을 하고 싶어요.”
볼거리 많은 공연을 비롯해 자선공연인 <차카게 살자>, 음악 위주의 <이승환이 꿈꾸는 음악회>, 클럽에서 록음악으로 꾸며지는 <돌발콘서트>까지. 그 수많은 공연들 중에도 그의 마음에 유독 깊게 남아 있는 무대가 있다.
“가장 처음이 기억에 남죠. 1990년 8월30일, 신나라 라이브홀이라는 소극장이었는데, 200명 정도 들어가는 공연장이 매진됐어요. 또 2007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했을 때는 폭우로 모든 기기들이 작동을 멈췄는데, 다들 패닉상태였죠. 하지만 모두 저를 따라와 줬고, 그때 스태프와 밴드, 관객들과 나눴던 끈끈함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요.”그는 요즘의 다채로운 내한공연과 국내 페스티벌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제가 지난해 제프백 내한공연을 추진했어요. 요즘은 좋은 뮤지션들의 내한공연이 많아요. 플레이밍 립스 공연은 정말 좋게 봤고요. 또 국내 다양한 페스티벌 덕분에 많은 인디 밴드들에게 좋은 무대가 열리는 것 같아요. 사실 ‘짙은’이나 ‘언니네이발관’ 같은 밴드는 유명하지만 체조경기장에서 만 명 이상 모아 놓고 공연하기는 힘들잖아요. 그런 무대 역시 빈익빈부익부가 심하다는 게 문제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다채로운 무대를 접할 수 있으니까요.”이런 공연쟁이 이승환이 올해는 공연 계획이 없음을 내비쳤다.
“전혀 계획이 없어요. <차카게 살자>가 올해 마지막이지 않을까… 이번 공연 이후에 밴드와는 오랫동안 안녕을 고할 것 같아요. 저는 하면 열심히 하지만, ? 하면 그냥 또 잘 지내거든요. 정 붙일 곳이 필요해서 연말 공연 끝나고 강아지를 샀어요. 한동안 강아지에게 헌신하는 삶을 보낼 것 같고, 책 많이 읽고 악기 연습하고 운동하면서 지낼 것 같은데요. 쉬는 동안에 여자 친구 생겼으면 좋겠고요(웃음).”목소리가 모든 악기를 압도하는 공연,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뮤지션,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 이승환이 꿈꾸는 미래다. 하지만 꿈공장을 나서는 기자의 발걸음은 다소 무거웠다. 현실은 언제나 꿈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요계는 변했다. 나이가 무겁게 더해진 대중들은 새로운 것에 파고들 기력을 잃고 과거에 기대 위로를 얻는다. 젊은 세대들은 또래 뮤지션들과 소통하게 마련이다. 덕분에 이승환에게는 잔잔한 삶이 허락돼 버렸다.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리라 믿는다. 이승환은 늙지 않는 마음이 젊음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꿈을 이루는 방법 역시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있을 것이다. 게다가 치열한 삶에는 여유가 생기게 마련이고, 젊은 세대들의 안목은 커질 수밖에 없지 않던가. 그때 잠실 주경기장에 다시 모으면 된다. 팬들 역시 그날의 아쉬움을 잊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공연은 이미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고, 우리는 그런 ‘이승환의 공연’이 벌써부터 그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