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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거짓말 용서할 수 없어요 -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사랑 얘기를 하려다 만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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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문장의 숲이 열린다.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비무장지대 내의 수목원을 배경으로 한다. 화가를 화자로 하는 이 소설은, 꽃이 피고 지고, 나무가 계절에 따라 몸을 달리하는 모습을 문장으로 그려낸다.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문장의 숲

책을 펼치면 문장의 숲이 열린다. 김훈의 장편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은 비무장지대 내의 수목원을 배경으로 한다. 화가를 화자로 하는 이 소설은, 꽃이 피고 지고, 나무가 계절에 따라 몸을 달리하는 모습을 문장으로 그려낸다.

“아침햇살은 수련의 어린잎을 통과해서 물 밑에 닿는다. 수련의 여린 잎맥이 드러나고 잔바람에 흔들리는 물의 음영이 수련 잎에 비쳤다. 해가 좀더 올라와서 수련 잎의 그림자가 물밑으로 내려앉을 때, 꽃은 열린다.” (p.118)

“휴전선 이남의 지방을 다니며, 여러 군데의 느낌을 모아둔 거예요.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낸 것이죠. 여행은 생활의 중요한 일부로 다녔죠. 소설 때문에 간 것은 아니에요.” 『공무도하』가 출간된 지 일년 만에 독자를 찾아온 『내 젊은 날의 숲』은, 지난 가을부터 올 초여름까지 여행한 기록이기도 하다.

“숲과 숲의 생명, 전쟁의 폐허, 야만성을 중첩시키기 위해서 수목원을 민통선 안쪽으로 설정한 거죠.” 민통선 내의 수목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 작품을 연구한 곳은 광릉의 국립수목원이다. 이 곳은 김훈이 홍보대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등을 통해 유감없이 발휘했던 김훈의 세밀한 문장이 이야기와 맞물려 아름답게 펼쳐진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꽃이 피고 진다. “에세이와 소설의 문체를 교대로 섞어 쓴 것이죠. 저는 소설의 문장이 소설 전체 서사 구조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문장 하나하나는 그 자체의 독자성과 개별적인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다 모여서 소설 전체의 서사를 만들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장 하나로서 완결성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나무에는 피의 인연이 없어요.”


스물아홉의 조연주는 비무장지대 내의 국립수목원에 계약직 세밀화가로 채용된다. 수목원 밖에는 뇌물죄로 구속되었다가 중풍으로 사그라지고 있는 아버지, 그를 애증하며 지켜보는 어머니가 있다. 조연주는 비리공무원인 아버지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국립수목원으로 떠나왔지만, 가족이라는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면증을 앓는 어머니는 그녀에게 밤마다 전화를 걸어 참혹해진 가족의 연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나는 어미 자식, 부자관계, 이런 게 제일 싫어. 그게 인간의 지옥이에요. 그 안에서 인륜, 효도, 인습이 발생하잖아. 인간이 포유류 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런 거죠. 새들은 그런 게 없어요. 낳아놓고 훨훨 날아가니까. 인간은 그것을 벗어나기 불가능하죠. 공자가 말하는 모든 인륜, 도덕은 인간이 포유류라는 전제 밑에서 있는 것이에요. 공자의 모든 철학은 포유류의 철학인 셈이에요.” 『공무도하』의 작가의 말에 그가 관계를 혐오한다고 적은 대목이 떠올랐다. 김훈이 사람 너머 발견한 것은 숲이었다.

수목원 안에도 사람이 사는 곳은 마찬가지다. 자신을 쏙 빼닮은 자폐아 아들과 함께 사는 수목원 연구실장 안요환을 보며, 조연주는 연민을 느낀다. 꽃과 나무가 피고 지고, 왕성한 생명활동이 벌어지는 숲은, 인연에 지친 사람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공간이 된다. 게다가 비무장지대에 속해있는 탓에,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을 도와 뼈를 그리게 되면서 숲이라는 공간은 생명과 죽음이 중첩되는 곳으로도 그려진다.

“나무를 보면, 나무 하나가 서 있잖아요. 뻗어나간 뿌리에서 또 한 그루의 나무가 나죠. 그럼 이 나무와 저 나무는 개별적인 존재인가? 참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에요. 그것은 단독자도 아니고, 종족도 아닌 특별한 상태인 것이죠. 거기엔 인륜이나 혈연의 관계는 없는 거죠. 그런 것들은 인간보다 훨씬 자유로운 거예요. 다만 큰 종족을 이룰 뿐이지. 다만 그것들은 역사가 수만 년 흘러도 문화나 문명이 발생하진 않을 거예요. 이것이 숲의 자유죠.”

“나무의 씨앗과 풀들의 씨앗이 바람에 퍼져 온 산맥을 그 종족으로 뒤덮어도 그것이 혈연은 아닐 것이었다. 나무들은 각자 따로 살아서 숲을 이룬다는 것을, 가을의 서어나무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숲은 나무와 잎으로 가득 차서 서걱이지만 숲에는 피의 인연이 없다. 가을에, 나는 그걸 알았다.” (p.265)


“사랑 얘기를 쓰려다 그만 둔 거죠”

어떤 인연은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민통선 검문소 대장 김민수 중위가 그렇다. 결코 사랑이나 연애 같은 말은 나오지 않지만, 조연주가 느끼는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에서, 김민수 중위의 덤덤한 말 한마디에서 독자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침에, 소나무 향기 나는 샴푸로 머리를 감았는데, 김중위한테 내 머리 냄새가 어땠을 지를 나는 생각했다. 힘들여 생각한 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이 저절로 내 마음 속에 떠올랐다. 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내 마음이 불안했고, 위태롭게 느껴졌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그래도 좀 편안해졌다.” (p.299)

‘단 한번도 사랑이라는 말을 써보지 않았다’는 김훈의 소설 속에서 사랑의 감정은 이렇게 표현되기도 한다.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그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말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내 마음속에서 분명한 언어로 자리 잡지 못한 말이었지만, 자리 잡지 못하고 멀리서 흔적처럼 다가오는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급한 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 말하여지지 않은 말은.” (p.318)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앞둔 김민수 중위는 조연주에게 명함을 내민다. “제 명함 잘 받으셨지요?” 김훈은 일찍이 이 소설의 결론이 명함 한 장이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을 이어줄 수도 있는 명함 한 장이야말로, 이전 소설에 비해 한걸음 나아간 관계라는 것. 그러나 사랑을 쓴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사랑 얘기를 쓰려다 그만 둔 거죠. 조금 하려고 하다가 그만 둔 거예요. 나는 무슨 사랑이 남녀가 들러붙고 엉키고 이런 건 쓰기 싫어요. 그런 건 쓰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그런 것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아.”

그는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랑이
“태아가 처음 생겨나듯 발생초기의 사랑, 아직 태어나지는 않은 미완의 씨같이 아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것도 사랑의 씨인데, 태어나서 이루어지기를 나는 바라는 거지. 난 거기까지 썼으면 다 쓴 것이라고 봐요.”

소설의 동기는 분명 사랑의 힘이었다. 과연 지옥 같은 현실에 사랑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 속에서 생겨난 회의를 옮겨둔 소설이라고 말했다.
“어떤 사랑의 씨앗을 한번 뿌려보자는 생각이 있었어요. 『칼의 노래』에는 사랑이 없죠. 희망도 없어요. 절망과 고독과 세상에 대한 무서움, 야만성. 그런 것만 있는 것이죠. 이번에는 거기다 약간의 희망을 집어넣은 것이죠. 제목만 보면, 마치 매우 낭만적인 사랑의 드라마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요?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다만, 숲의 생명과 아름다움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인간들이 나오죠. 과학자라고 하지만 뭔지 모르고 헤매는 자들이 나오는 거죠. 뼈를 파는 젊은 장교도 있고요. 그런 배경과 문명 속에서 사랑의 씨앗을 하나 뿌려보고 싶었어요. 아주 작은 소망이죠. 거대하게 완성하자는 게 아니고. 이 씨가 살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한 개의 씨를 겨우 뿌렸다고 생각하면 되겠어요.”


사실의 세계를 기술하는 김훈의 소설 속에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런 김훈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은 사랑이나 희망이 멀리 등대 불처럼 빛나면서 인간을 인도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나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럼 나에게는? 매일매일 일상의 구체성이 있는 것이죠.”

그는 작가의 말에
“여생의 시간들이, 사랑과 희망이 말하여지는 날들이기를 나는 갈구한다.(p.343)”고 적었다. “그런 날들이 오길 바란다고 했는데, 그런 날이 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날들이 안와도 괜찮아요. 그런 날들을 억지로 만들 생각은 없어요. 난 사랑이나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살 수가 있어요. 구태여 사랑과 희망을 말하지 않고도, 기대지 않고도 살 수가 있어요. 내 속에서 나오는 힘으로 사는 거죠.”

그 말은 희망이 없어도 살아야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힘이 있죠. ‘살아야한다’는 거예요. 희망이 없다고 해서 죽어야 하나? 난 그렇지 않아요. 희망이 없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희망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거예요. 『칼의 노래』에 써놓은 얘기가 이런 거죠. 희망이 없는 세계에서 그 사람(이순신)은 살잖아. 생의 본능이죠.”


“난 게으르거나 거짓말하는 걸 용서하기 싫어요.”


새로운 인연과 많은 시간들이 조연주를 스치고 가지만, 결국 그녀의 마음과 기억에 가장 큰 존재로 내려앉는 것은 아버지라는 이름이다. 결국 아버지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기도 한 셈. 김훈이 간직한 아버지의 기억은 어떨까? 그의 아버지 김광주는 광복 전 김구와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경향신문 문화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창작 무협소설 ‘비호’로도 유명한 소설가였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해요. 그 사람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와 똑같은 결함투성이고, 온갖 미숙함과 미완성의 상태에서 돌아가신 분이죠. 근데도 난 그분이 좋아요. 그분을 하나의 인간으로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 아버지는 모범적인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무협지를 썼어요.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썼어요. 3류 작가죠. 자식을 벌어 먹이기 위해서 3류 무협지를 쓰다가 돌아가신 어른을 나는 좋아해요. 내 생각은 참 반 문학적이죠. 아버지 돌아가실 때 좋았어요. 내 세상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훈 역시 집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같이 가부장적이라고 말했다.
“억압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아버지죠. 난 게으르거나 거짓말하는 걸 용서하기 싫어요. 거짓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아주 악질적인 거짓말이 있어요. 애들은 자라는 과정에서 자기가 언어능력, 지능이 발달하면 말로 남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참 어림도 없는 일이죠.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 거짓말은 아주 악질적인 거짓말이죠. 물론 용납할 수 있는 거짓말도 있어요. 어떤 놈이 나에게 돈을 꿔달라고 하는데 내가 돈이 있어도, 저놈이 분명히 안 갚을 놈이다 싶으면 난 돈이 없다고 하겠죠. 그것은 용납할 수 있는 거짓말이에요. 아이들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얘기에요. 이건 상식이죠.”



“말로 할 수 없는 삶, 말들을 가지고 사는 거죠”


“꽃에 대한 어떠한 언어도 헛되다는 것을 나는 수목원에 와서 알게 되었다. 꽃은 말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꽃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때의 패랭이꽃을 세밀화로 그려내려면 그 ‘쟁쟁쟁’한 기운을 화폭에 옮겨와야 할 터인데, ‘쟁쟁쟁’이 물리적 구조를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쟁쟁쟁’은 그 구조 너머에 떠도는 것이어서 화폭에는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 (p.164)

꽃을 있는 그대로 적을 수 없는 심정을 표현한 이 대목은, 끊임없이 말하여질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이것은 내 표현의 한계나 언어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경험될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는 거예요. 삶은 언어화 될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많아요. 그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시간입니다.”

김훈의 소설은 삶을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조연주의 직업이 숲 해설사였다 세밀화가로 바뀐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숲을 해석하지 않고, 치열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과 내 정신, 나의 존재가 이 세상과 직접 맞부딪치기 원하는 것이죠.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거예요. 이런 관계를 차단하려는 게 너무 많아요. 책과 미디어. 인터넷, 기호, 상징, 부호가 그렇죠.

나는 이것들을 거둬내고 맞닥뜨리려는 허영심을 갖고 있어요. 그게 되겠어요? 그런 소망을 포기하지 않는 거죠. 나의 소망의 길을 따라간다면 나는 성철 스님의 뒤를 따라가야 할 거예요. 말을 버리고 펜을 꺾어야 하는데, 그러긴 또 아까워. 역시 글이라는 것은 삶과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할 수밖에 없어요. 말로 할 수 없는 길에, 말들을 가지고 가는 거죠. 그런 모순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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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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