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교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빈약한 점을 안타깝다고 말한다. 저자의 대표작인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의 경우도 ‘회화사’란 제목을 붙였다면 많이 팔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그만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낮고, 많은 책이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미술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고 이 책을 준비하게 된 데에는 이제 그와 같은 비판에서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식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한국 미술사 강의를 집필하게 된 큰 이유다.
“한국미술사에 대한 연구와 저술의 역사는 어언 100년을 헤아리고 이제까지 ‘한국미술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10권 남짓 된다. (…) 미술사의 진정한 통사는 각 분야사의 기계적인 덧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분야사 연구의 모든 성과를 아우르면서 일관된 미술관에 입각하여 서술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 ‘한국미술사’는 김원용 이후 나오지 않았다. 더욱이 전문적 연구 성과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서술하여 교양으로, 길잡이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한국미술사 입문서는 더더욱 없었다.
(…)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어느 학문이든 그 분야의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와 입문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솔직한 이유는 그동안 한국미술사 연구의 당면 과제가 분야사를 더 깊이 천착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통사의 저술은 일단 미루어둔 데 있다.
그리고 좁은 분야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업이 길어지면서 전 분야를 폭넓게 보는 학문적 풍토는 자리 잡을 수 없었던 면도 있다. 때문에 분야사의 골이 깊어질수록 통사의 길은 점점 멀어져간 것이다. 저마다 익숙한 저공비행에 몰두할 뿐 아무도 ‘위험스런’ 고공비행은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p. 8~9)
저자는
“미술의 역사가 곧 인류의 역사”라고 말한다.
“원인을 고인류학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고 부릅니다. 이는 1925년 레이먼드 다트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발견한 300만 년전 다섯 살 난 어린아이 두개골을 당시에 <네이쳐>지에 발표하면서 붙인 이름입니다. ‘오스트랄로’는 남쪽이라는 뜻이고 ‘피테쿠스’는 유인원이라는 뜻이지요.”
원인의 존재는 1962년 다른 화석의 발견으로 더욱 명확해졌다.
“부인, 아들, 며느리 모두가 고고학자인 루이스 리키가 탄자니의 올두바이 고지 협곡에서 175만 년 전 인류의 화석을 발견하여 호모 하빌리스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도구를 만들어 쓸 줄 아는 ‘손재주 있는’ 동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저자는 이때부터 인류의 구석기시대가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호모 하빌리스가 자갈 끝을 깨서 사용한 뗀석기는 아주 초보적인 도구였지만 그것은 그냥 ‘깨진 돌’이 아니라 ‘깨뜨려 만든 도구’라는 점에 주목해야합니다.”
“이후에도 원인의 화석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계속 발견되어 현재까지 11점이 학계에 보고 되었습니다. 그중 1974년에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화석은 360만 년 전, 키 120센티미터의 이십대 후반 여성이었습니다. 발굴단이 이 화석에 이름을 지을 때 마침 카세트에서 비틀즈의 노래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가 흘러나와 ‘루시’라고 명명했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현재까지 원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몇만 년 전일까? 저자는 1993년에 발견된 약 440만 년 전 화석이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류의 기원을 대략 500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발굴 작업이야 말로 ‘붓’과 ‘삽’으로 이루어지는 고되고 지난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문화재청에서 근무할 당시 그는 한 발굴단에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고심 끝에 그 발굴단의 이름을 ‘붓과 삽’이라고 붙여주었다고 한다.
전곡리 유적과 고인돌 그리고 고분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유적지로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가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꾼 기념비적 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탄강 언덕 위에 위치한 전곡리 유적은 1978년에 보웬이라는 미군 병사가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미국 인디애나대학 고고학과에 다니다가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하여 동두천 미군부대에 복무 중이던, ‘미군’이었습니다.
겨울에 한국인 애인과 한탄강변에 데이트하러 갔는데, 커피를 끓이기 위해 돌을 주워 모으다 무언가를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습니다. 그는 이 돌들을 이곳 지도와 함께 미국의 교수에게 보냈고, 이를 받아 본 교수는 한국의 고고학자인 김원용에게 신고하라고 권하면서 발굴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현재 확인된 고인돌 수는 북한에 1만 5000기, 남한에는 3만기가 발견 되었는데 있는데, 전남 지방에만 2만 기가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 특색입니다.”
많은 고인돌 중 특히 우리나라의 강화도, 화순, 고창 지역의 고인돌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북방식 고인돌은 기념 조형물로서 장중한 멋을 풍깁니다”
저자는 이 날, 북방식 고인돌을 소개했다.
“굄돌을 탁자 모양으로 반듯하게 짜고 그 위에 넓적한 덮개돌을 얹어놓은 형태여서 구조적인 힘을 보여주면서 무엇인가를 떠받들고 있는 듯한 경건함이 있습니다. 북방식 고인돌이 언덕배기나 산자락에 설치되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대지 예술 같은 감동을 주죠. 황해도 은률, 강화도 부근리, 평양 문흥리 고인돌 등은 그중에서 명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해도 안악에는 조선 태종 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하연의 공덕비가 있어 오랫동안 하구대라고 불리던 언덕이 있었다. 1949년에 농지를 정리하던 중 이 언덕이 고구려 무덤임을 확인하면서 월북한 미술이론가 김용준을 책임자로 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안악 3호 무덤이다.
안악 3호 무덤은 이제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조성 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묵서가 쓰여 있어 고구려 고분벽화의 편년을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고분이 되었다.” (p. 112)
“550년 무렵이 되면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반 환경이 앞 시기와 현격히 달라집니다. 사회 전반의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벽화의 경험이 많아지면서 대상 묘사에 능숙해지는 것이지요.” 사신도는 약수리무덤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종송 무늬로 그려진다.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 벽화 90기 중 34기에는 크고 작은 형태로사신도가 있는데, 이 중 ‘강서큰무덤’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최고 명작으로 손꼽힌다.
“평양시 강서구역 삼묘리에는 3기의 고분이 있어 이를 대중소로 이름을 붙였고 동네 이름도 삼묘리입니다.” 강서큰무덤의 사신도는 고구려 사신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청룡과 백호는 가는 허리의 늘씬한 몸매로 유연성이 살아 있고, 주작은 날개를 펴고 장쾌히 날아갈 기세이며 현무의 뱀과 거북은 뜨겁게 포옹하는 순간을 담아냅니다. 각 도상은 형상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그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하지요.”
마지막으로 저자는 우리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왔기 때문에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우리나의 문화가 지분을 가질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특히, 미술사는 문화사를 통해 간직됩니다. 한 나라의 문화란 인식이 건축과 미술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즉, 문화사의 꽃은 건축과 미술입니다.”
12장으로 구성된
『한국 미술사 강의 1』은 선사시대부터 발해까지를 담고 있다.
“쓰고 나니까 사백 페이지더군요. 몇 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웃음).” 또한 저자는 12장을 모두 쓰고 난 뒤 주위의 역사학자와 관련 전공자들에게 비판적 열독 및 검증을 요청했다고 한다. 고마운 회신을 받고, 다시 2달이 걸려 출간한 이 책은
'History' of Korea Art가 아니라
'Story' of Korea Art로 교양과 상식으로서 한국미술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일반인과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입문서로 쓰여졌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