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앤 더 시티> 보고 뉴욕 가면 다르다?
여행과 책 그리고 세계
앞으로 연재할 글의 제목은 <여행과 책 그리고 세계>입니다. 고전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여행 전 혹은 여행지에서 읽는 것 일겁니다.
*고전 연재의 성격을 좀 바꿔봤습니다.
앞으로 연재할 글의 제목은 <여행과 책 그리고 세계>입니다. 고전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여행 전 혹은 여행지에서 읽는 것 일겁니다. 고전은 세상의 어떤 가이드북도 제공하지 못한 도시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를 들면 저는 얼마 전 스페인 여행 때 홋타 요시에의 『고야』를 읽었는데 그 책이 없었다면 프라도 박물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을 뻔 했습니다. 그 생각만으로 아찔합니다. 제가 이스탄불에 가기 전에 오르한 파묵의 책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해협의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발굴하는 고고학자인양 그렇게 오래 서성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피렌체에 갔을 때 지옥을 지구의 중심에 놓은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더라면 피렌체의 자애로움과 꽃의 두오모의 아름다움을 지금처럼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했을 겁니다. 만약 그라나다에 가시는 분이라면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나 로르카의 인상과 풍경을 같이 읽으면 알함브라와 알바이신 두 개의 관점으로 도시를 볼 수 있게 될겁니다.
런던에 가기 전에 코난 도일, 찰스 디킨스를 읽거나 파리에 가기 전에 발자크나 스탕달, 보들레르를 읽거나 미서부 여행 전에 존 스타인벡,뉴욕 여행 중에 피츠제럴드를 읽으면서 그 작가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어떻게 묘사했나를 읽어보면 최고의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가들의 묘사들이 얼마나 정밀한지 저는 얼마 전 그랜드 캐년으로 가는 길에서 나다니엘 호돈의 『주홍 글씨』의 첫 몇 페이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거나 아예 아무것도 읽지 않고 뉴욕에 가는 것과 피츠제럴드를 읽고 뉴욕에 가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아마 다른 차원에서 다른 사람이 다른 세계를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겁니다. 도망자와 추격자가 한 도시를 각기 묘사해 본다면 그 도시는 얼마나 달라 보이겠습니까? 아마 그 정도 차이는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좋은 여행은 영원한 학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뭔가 배우고 얻어옵니다. 이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여행지를 선택하는게 아니고 여행지 속의 자신의 자세를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사실 여행지와 나도 어떤 관계를 맺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깊은 관계를 맺기엔 우리 너무나 바쁩니다. 여행지에서 뭔가 경험하고 깊이 느끼기보다는 여행을 소비하고 돌아와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쩌면 우린 여행지란 문 앞에 서서 그 문고리를 잡고 애처롭게 두드리고 있는 나그네 신세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방이 안되면 헛간이나 마굿간, 그것도 안 되면 등불이라도 하나 이 어두운 밤에 쥐어달라고 말하면서요. 그런데 예수는 그런 여행길의 마굿간에서 태어나 별에겐 진리의 방향을 가르켜주는 변치 않는 이미지, 마굿간에는 환희와 성스러움의 이미지를 부여했습니다. 인간 내면의 빛, 하늘에서 비추는 빛. 이 두 빛의 만남이 우리가 마주치는 여행지의 이미지라면 참 좋겠습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 새겨진 여행지는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작은 창문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시점에서 보들레르가 생각이 납니다. 보들레르는 촛불로 밝혀진 창문보다 더 깊고 더 신비롭고 더 풍요롭고 더 어둡고 동시에 더 눈부신 것은 없다. 햇살 아래서 보는 것은 유리창 뒤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항상 흥미가 덜한 법, 어둡거나 밝은 이 구멍 속에서 삶이 숨쉬고 삶이 꿈꾸며 삶이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보들레르는 어떤 행동을 했냐면요.
“지붕들의 물결 저편에서 나는 본다. 벌써 주름투성이의 가난한 중년 부컀이 외출 한번 하지 않고 언제나 몸을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을. 얼굴, 의복, 몸짓, 거의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을 가지고도 나는 이 여인의 역사를, 아니 차라리 이 여인의 전설을 엮는다. 그리고 때로 그것을 나 자신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기해준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이 아닌 남들 속에서 살았고 괴로워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끼며 ?리에 눕는다.여러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는가? 그러나 만일 그 사실이 내가 살아 있도록 나를 도와주고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과 내가 무엇인가를 느끼게끔 도와준다면,나의 밖에 있는 현실이 무엇이든 뭐 그리 중요한가?”
보들레르더러 6박 7일 모스크바나 도쿄에 다녀오라고 한다면 그가 어떻게 했을지 상상해봅니다. 아마 검은 피부의 미인들 뒤를 쫓다가 술집에서 다투다가 불 꺼진 창문 아래서라도 신비로운 사향과 장미향을 맡으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는 초라한 행인, 아버지와 아들, 창녀, 도둑, 걸인들에게서라도 뭔가 보고 배우려고 할 것입니다.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전설을 부여하겠지요. 제가 여행지의 작은 언덕에 올라서 약간의 조망이라도 확보한다면 가장 자주 떠올리는 문장 역시 보들레르의 문장입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나는 산에 올랐다
그곳에선 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병원도,창가도,연옥도,지옥도,도형장도,
그곳에선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오, 내 고뇌의 수호자 사탄이여. 그대는 안다
내가 거기서 헛된 눈물이나 흘리러 간게 아니란 걸‥”
…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오. 더러운 수도여!
창녀들, 그리고 강도들 그대들은 내게 그처럼 자주 가져다주나
무지한 속물들은 알지 못하는 갖가지 쾌락을
(파리의 우울 에필로그 중에서)
내가 거기서 헛된 눈물이나 흘리러 간게 아니란 걸. 이 말은 어딘지 사람 마음을 사무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혹시 헛된 돈이나 쓰고 오기 때문일까요? 헛된 눈물이나 흘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여행지를 조망할 때 꽃잎하나, 고사리 잎 하나, 간판 하나, 나뭇잎 이름 하나 사무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생 라자르역 근처 호텔 다락방에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 다락방에서 보이는 것은 앞집의 창문뿐이더군요. 매일 자기 전 지붕에 난 창으로 반은 하늘을 반은 그 집의 창문을 바라봤습니다. 나는 사람 눈이 두 개인 이유와 그리고 보이는 것은 항상 보이지 않는 것에 에워 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것이 혹시 우리 은하와 존재의 속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암흑물질이 가시적인 물질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많다고들 하니까요. 그래서 모든 것을 볼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상상해보려고 하는 것이 아주 인간적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모든 곳에 있다는 말처럼요.
저는 여행지의 호텔방에서 하나의 기억이라도 베게에 흘려 두고 오는 일이 없도록 꿈쩍도 하지 않고 책을 읽는 밤을 꼭 보냅니다. 그런 밤에 오래된 도시의 골목에서 누군가 급히 걷고 앰뷸런스가 달리기도 하고 개가 짖기도 하고 이슬이 내리기도 합니다. 아코디언 소리를 들은 적도 있고 교태스런 웃음 소리를 들은 적도 어쩌면 착각이겠지만 지퍼 내리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 소리가 어찌나 감각적으로 생생하든지 온갖 상상이 다 되더군요. 여행 중 혹은 여행가기 전 꼭 그 도시가 낳은 고전을 한권 읽고 가길 바랍니다. 밤의 창문 안에서 나는 모든 소리들이 점점 더 크게 수런수런대다가 꼭 비밀을 한 가지씩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이 연재의 첫 번째 책은 여행지에 대한 책이기라기 보다는 여행지에서의 자세에 관한 책으로 제게는 읽힙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입니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