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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한 칠레 광부들이 영웅이 아닌 이유 ②

생존자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비밀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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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주의를 더 이상 믿지는 않지만 그러나 인류의 생명력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그래서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많은 이야깃거릴 갖고 있다.


 

 

영웅주의를 더 이상 믿지는 않지만 그러나 인류의 생명력과 세계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그래서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많은 이야깃거릴 갖고 있다. 테렌스 데프레의 『생존자』 에 나오는 이 인용문은 읽을 때마다 영원과 순간이 딱 마주치는 느낌을 준다. 황량하고 끔찍한 삶, 우리가 죽던지 살던지 우리의 고통에 철저하게 무관심한 하늘, 그런데 그 와중에 우리를 묶어주고 공포에 맞서게 하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살고 싶게 하는 뜻하지 않은 하나의 불빛.

“미칠 것 같은 고통과 공포감이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반짝이는 별들로 온통 뒤덮인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슬픔 가득한 우리들의 감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달빛이 창살 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날 밤 따라 달빛은 유난히 눈부셔서 창백하고 여윈 재소자들의 얼굴에 유령 같은 모습을 더해주었다. 마치 모든 생명력이 탈진해 버린 사람들 같았다.

나는 갑작스런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수많은 시체들 속에서 나 혼자만이 산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별안간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구성진 노랫가락에 의해 깨졌다. 콜 니드라이(kol nidrei,고대 히브리의 기도음악. 막주 브르흐가 첼로 협주곡으로 만들어 널리 알려졌다-역주)의 애처로운 곡조였다.

나는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몸을 일으켜 둘러보았다. 그곳 벽 옆으로 하얀 달빛이 하늘을 향한 노인의 얼굴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는 경건한 무아지경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고요히 노래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이미 무감각한 시체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생기를 돌게 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달빛에 젖은 그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주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 노인에게 방해가 될까봐…노인은 우리가 듣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노래를 그쳤을 때 우리들은 환희에 넘쳐 있었다. 우리만큼 한없이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진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환희, 죽음을 모르는 신비로운 기도의 힘을 통해 다시 한번 생기에 넘치는 세계로 깨어난 환희에… ”


생존자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비밀은 뭘까? 그들은 어떤 일을 겪더라도 인간 영혼의 보다 깊은 곳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을 간신히 긍정하고 지탱하게 해준다는 것, 살아남고 애를 쓰는 것은 희망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생명에의 의지는 희망보다 강렬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꾸역꾸역 견뎌낸다고 생각하는 일상의 노동, 자질구레한 슬픔, 시시한 성취들이 그렇게 경멸할만한 상투적이기만 한 것일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의 눈으로 본 한 그루의 나무, 한 점 구름, 한 병의 술의 의미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독일군이 퇴각할 때 전염병 때문에 아우슈비츠에 남겨진 프레모 레비는 굶주림과 땅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 병실의 다른 환자들을 위해 투혼을 발휘해 먹을 것을 찾아오고 병실을 덥힌다.

 

“요란한 대포소리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드문드문 들렸고 간헐적으로 자동 소총 소리가 들려왔다. 벌겋게 타는 나무만이 빛을 발하는 어둠 속에서 샤를과 아르튀로, 그리고 내가 앉아 식당에서 찾아낸 허브로 만든 담배를 피우며 과거와 미래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인 얼음 뒤덮인 드넓은 평야 한가운데서 병원균들이 우글거리는 어두운 병실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과 화합했다고 느꼈다. 우리는 피로에 지쳐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드디어’ 쓸모 있는 어떤 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어쩌면 천지창조의 첫날을 보낸 하느님 같은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밤이 되어 샤를과 아르트르, 나, 이렇게 세 사람이 난롯가에 모이면 다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온갖 이야기를 다할 수 있었다. 아르튀르가 보주의 프로방세르 사람들이 일요일을 어떻게 보내는지 이야기 해줄 때면 너무나 좋았다. 어둠 속에서 우리 뒤와 우리 위에서 여덟 명의 환자들 역시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일상 생활 속에서도 불행과 행복, 희망과 절망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 숭고함과 용기, 정의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한가지와 그리고 생존자의 마지막 문장.

“내가 자네한테 우리들이 겪은 일을 말해주는 것은 자네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고 힘을 내게 하기 위해서야…이제 절망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는 자네가 알아서 결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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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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