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대표작가 황석영의 필생의 역작 남한 자본주의 근대화의 여정
참 대단한 작가다. 최근에 문화부장관 입각설 운운, 노벨문학상 후보론, M본부 <무릎팍도사>에 출연, 케이블방송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까지 출간 이후로 끊임없이 클로즈업되고 조명을 받고 있는 일명 ‘황구라’ 황석영 작가는
‘문학 이외의 인생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공식입장을 밝힌 대로 한국문학에 전념해온 한국의 거장 소설가이자 ‘트위터하는 남자’, ‘식스팩도 을 것 같은 68세 현역작가’이다.
생애에 꼭 한번 만나야 할 작가인 그를 보기 위해 8월 24일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화요일 저녁 7시 반 한겨레신문사 강연회장에는 여석 없이 120명이 꽉 차게 모여들었다.
『삼포 가는 길』,
『한씨연대기』,
『장길산』,
『돼지꿈』,
『무기의 그늘』,
『손님』,
『오래된 정원』,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까지 수많은 걸작을 낸 한국현대문학의 큰 장군답게 강연장 마이크는 일필휘지 문장보다 더 수려하게 진행된다.
정말 문화부 장관을 만나러 온 것처럼 다소 긴장하고 있는 청중들의 마음 열게 하는 데도 프로다. 한겨레신문사를 설계한 조건영 건축가 얘기를 화두로 던진다.
“건물 참 불편하고 쓸데없는 공간도 많다”라고, 오늘 같은 날엔
“비가 샌다 인마”라고 한다며 첫방에 웃게 한다. IMF 때 공포의 삼겹살이라고 부르는 황지우 작가와 민중을 위한 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포장마차를 디자인했다가 망했다는 일화까지 덧붙이며 민중과 황석영 작가 사이에 자연스러운 이음줄을 만들었다.
15년간 문인으로 살지 못한 트라우마
한 시대를 담아온 거장 황석영 작가에게서 펜을 빼앗은 시절이 있었다. 자그마치 15년간 집필권한조차 부여하지 않은 정말 감옥 같은 교도소생활이었다. 그래도 휴지 같은 곳에 메모를 수두룩하게 적으며 내면의 콘텐츠를 가득 양산해둔 세월이었다.
“쟤 이제 소설가로서는 인생 끝났다.”라고 비웃던 이들에게도 마치 도박판처럼
“내가 다 따줄 테니까” 하는 자신감이 그에겐 있었고, 보란 듯이 사회로 나온 지 6개월 후에 집필은 시작됐다.
“100년 전부터 들어온 현대 서구문학과 달리 우리는 고전의 고유방식을 잃어버렸다. 대가들은 그 시대의 고유형식을 완성해내지 않았느냐. 나 역시 내 집처럼 하나의 양식을 짓겠다.”
그 시점부터 방북하고 망명하고 감옥살이하고 사회봉사도 하면서 남한자본주의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수집한 자료는 넘쳐났지만,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구성하려니 아홉 번을 뒤집어도 안됐다. 작가로서 15년간의 트라우마를 풀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지극히 사적인 소설을 쓰며 정화과정을 겪는다. 현실주의소설의 객관성과 엄격한 규율을 무시하고, 1인칭에서 3인칭으로도 갔다가, 고백체와 객관체를 번갈아 자유롭게 넘나들며 글쓰기를 했다. 그 책이 바로
『오래된 정원』이다. 그리고
『손님』을 기점으로 비로소 본래의 집필 프로젝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억압, 간섭, 참견은 거부한다! 센 강을 산책할 때처럼 자유롭게
남한 자본주의사를 쓰겠다고는 했지만 주변의 간섭이 상당했다. 파리에서
『바리데기』 쓸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는데! 자유롭게 한반도와 전 세계를 담는 것 같았다. 쓰다가 나가면 센 강을 산책하면 되었고, 누가 나오라는 이도 들어가라는 이도 없고, 자신을 알아보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여기저기 억압, 간섭, 참견, 닦달이 들어오니 못 배기고
“강남 형성사 안 씁니다” 하고 미루게 되었다. 그러다 인도네시아 문학행사에 얼굴마담으로 초청받아 김인숙 작가와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축제인 줄 알았더니 그가 딱 싫어하는 포럼과 세미나 위주의 교실이었다.
“난 교실이 싫어” 하며 교실이데아를 외치던 황석영 작가는 때마침 연락이 닿은 화가 지인들이 있는 곳으로 도주하듯 발리로 왔다.
“김인숙 작가가 꽤 미인이고 거긴 다 홀아비들이어서 좋아서 난리가 났지.”라며 농담을 던지는 그는 바로 이곳에서 다시 『
강남몽』의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곳은 섬 자체가 예술가의 섬이다. 동남아의 제주도 같은 곳인데 중국과 인도네시아 사이에서 힌두교의 음습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가정마다 양식화해놓고 대중화했다. 집 한 채마다 개인사원을 하나씩 다 갖추고 제사 지내는 것도 아주 흥미롭다. 비 오는 날은 비의 신을 상징하는 파란 꽃을 떼서 올려놓고, 바람부는 날은 바람의 신을 뜻하는 붉은 꽃을 올리는 등 색깔별로 기르고 있다. 재밌고 근사하다. 거대한 종교도 사람에게 다룸 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녁엔 우리가 잘 아는 이런 춤도 추고(살짝 팔을 들어 양쪽으로 몸을 흔들어주심), 영화도 봤는데 캐릭터가 어찌나 단순하던지, 악역도 나오고 용도 나오고 '홍땅똥' 하며 뒤에선 해설을 한다. ‘지금 원숭이 신이 내려왔는데~’ 하며 다소 우스우면서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경험이었다. 우리에겐 조선 시대부터 온 꼭두각시놀음이 있지 않은가. 봉산탈춤처럼 판을 펼치고 5명의 캐릭터를 골랐다. 그리고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듯이 『장길산』만큼 방대한 분량이지만 1권짜리로 얍삽하게 내보기로 결정했다.”
교실에서 탈출하니 그에게 필생의 역작이 써지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대하 장편소설처럼 정색을 하고 리얼리즘으로 풀어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캐릭터화된 인물은 백화점 주인 김진, 재벌의 후처인 화류계 박선녀, 밤거리문화에 등장하는 깡패 홍양태, 정치자금을 만드는 심남수, 먹이사슬의 제일 밑에서 쫓겨난 임정아다. 사실은 한 캐릭터가 더 있는데 다음 작품을 위해 남겨놓았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하며 앞으로 새 작품을 또 쓸 테니 잡숫듯이 맘대로 하라고 농을 던지는 황 작가. 이 인물들은 읽다 보면 누군가 자연히 연상되는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차례로 붕괴하던 1995년 시점을 배경으로 했다. 개발독재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시작되고, 내수중심이던 자본주의가 밖으로 펼쳐지고, 민중의 산이 대량산업과 소비사회의 욕망에 휩쓸리어 소비 대중으로 변화되던 시점이다. 그래서 중요한 때다.
“15년 사이에 공주교도소에 있을 땐 책 내면 다 30만 부씩 팔리던 출판계 최고의 호황이었다. 또래 작가가 부러워서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100억씩 벌었고, 난 그때 감옥에 있었다. 곧 IMF가 왔고, '고용의 유연성'이라고 포장하여 동물원의 울타리를 다 제거하고 맹수가 다 잡아먹는 시절이 되었다. 그리고 금융위기까지 오더니 중산층 1/3이 몰락했다. 그들의 인생목표란 것이 강남에 집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들 학교 보내는 데 생애를 바친 늙수그레한 이들이 말할 것이다. ‘여보, 우리가 잘 산 걸까?’ 이 눈치 빠른 황석영이 부모 도움 없이는 집도 못 사는 요즘 시대에 『강남몽』을 쓴 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의 회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황석영 작가가 전태일의 고용인을 TV 화면을 통해 본 적이 있다. 유심히 머리 하얀 노인네를 보는데 전태일에 대해서 묻자 그가 오래된 회한이 담긴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란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그랬다며, 그때 좀 잘해줄걸” 하던 그의 모습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어 다큐소설 『
강남몽』에서도 권선징악적 판단을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찰자로 다가섰다. 박정희를 근대화의 아버지로 볼 것인가, 한국 민주주의를 한 세대 정체시킨 인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가 해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 ‘자유’ 자체가 불온하고 ‘정당성’의 근거가 별로 없던 시대를 거쳐 왔던 저자의 사회적 회한이 느껴진다.
“이 시기의 자료들은 워낙 방대하다. 하지만 조정래나 박경리 작가의 글은 너무 길지 않느냐. 여자들이 전 부치고 나면 몇 페이지가 지나가더라. 감옥에서 『태백산맥』 읽었는데 에피소드의 나열이 많고 구성을 좀 더 극적으로 하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더라. 감옥에 있으니까 다 읽었지. (웃음) 박경리 작가는 돌아가실 때 근대문학의 분수령이 끝났다는 평을 받은 대단한 분이다. 『강남몽』도 12~13권 나올 분량이지만 한 권으로 압축해서 호흡도 빠르게 화면 그리듯 영화처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신명나는 그늘이 되고 싶었던 흰 그늘
그는 김지하의 <흰 그늘>을 언급해본다. 황석영 작가가 충절을 바친 정치집단이 없지만 때때로 오해도 받는다. 그믐에 빨래가 널려 있으면 허연 부분도 어둡게 보이듯, 푹 삭은 젓갈처럼 인생의 우여곡절에서 나온 그늘이다. 울다 웃으면 어디에 털 난다지만 실컷 울고 실컷 웃으며 신명나게 놀면서 민중연희처럼 갔어야 했는데 진지한 근현대사 자료들과 함께 그러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황석영이란 이름도 굴레였고, 지금 강연회를 기대하며 또롱또롱 쳐다보는 눈빛들도 다 억압이란다. 그래도 조건영 건축가 말마따나 大황석영이 한국 현대사를 가지고 놀 순 없는 것이다. 그는 지난여름 프랑스 르 몽드 지에서
『심청』이 휴가지에서 읽어야 할 추천 문학도서 1위로 선정되기도 한 작가다. 그만큼 영향력이 글로벌하다. 필생의 작품을 마치자마자 바로 새 작품 집필에 돌입하는 그가 조로한 한국문단의 병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후배 작가들을 긴장케 할 정도로 일주일에 5~6일은 맹렬하게 운동한다. 마치 지옥을 통과하듯이 워밍업과 기운발이 계속 필요하고 앞으로 20년은 더 쓸 생각이란다. 나이 든 선배는 그런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걸 보여주고 찾는다. 『
강남몽』도 책 안 읽는 젊은 세대들과 빛나는 개인에게까지 필수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추천도서가 될 것만 같다. 트위터를 통해 젊은이와 소통하는 커뮤니케이터, 황석영 작가의 강연은 이렇게 열정적인 분위기 가운데 마무리되었다.
“다음 작품은 독하게 담배 끊고 키보드 두드릴 테니 기대하시라.”
『독자와의 시간』-소설가 이상의 이상을 품은 황석영夢
황석영 작가가 기득권을 가진 강대국들 사이에서 대륙 대한민국을 순수하게 꿈꾸며 차근차근 진행해온 몽골과의 ‘알타이연합’은 정치적 의혹 및 비방을 낳았고, 지금은 천안함 사건과 함께 통일로 향한 명분도 흐지부지된 상황이다. 그는 삼국지를 번역한 생각이 열린 작가이다. 신제국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그는 국내외로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기에 가능한 평가일 것이다. 소설가는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이고 그는 손에 든 꿈을 하늘 위에 달기 위해 노력한 대작가라고 평하고 싶다. 이어서 『
강남몽』 읽고 결말에 허무했다는 한 독자에게도 꿈 깨면 허탈하듯 그게 구성의 묘미라고 전했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작가다. 그리워 미치겠다고 직접 말하기보다는 철길이 비어 있고, 어린 소년이 찢어진 비닐우산을 들고 서 있는 풍경을 그려내는 것이 소설적이다.”라고 말해준다.
이쯤 되니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는 작가지망생의 질문이 자연스레 넘어온다. 그는 단번에 말한다.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거다. 그리고 궁둥이로 쓰는 거다.” 그만큼 글은 정신적 작용을 몸이 대부분 해내는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일단 글쓰기는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현실을 반영하고 재편성하고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라며 인생이라는 스토리텔링을 포착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독서를 많이 해야 사물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조언도 덧붙인다. 길게 이어지는 사인회를 둘러보며 참석자들을 보니 뜻깊은 강연인 만큼 정말 연령의 폭도 다양하다. 8살 김시연 어린이는
“작가님 재밌고요. 사인도 해줘서 기뻐요.”라고 설레는 마음을 나눠줬다. 머리가 희끗한 김종연(65세) 어르신은
“통쾌했다. 황석영 작가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훌훌 털어버리는 분으로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만들어버리는 조르바 같다.”라고 말해주었다. 작가를 만난 후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전혜연(39세) 씨는
“소설가를 너무 정치적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항상 보면 아이 같은 느낌이시다. 속에 있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시곤 하는데 오늘도 청중에게 맞게 멋진 강연이었다.”라며 문학에 대해서 앞으로 더 듣고 싶은 속내를 보여줬다. 이렇게 위대한 소설가로 더 오래 기억될 황석영 작가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던진 멘트를 마음에 새기며, 아직도 비가 촉촉이 내리는 하늘을 향해 우산을 편다.
“편지를 제대로 쓸 수만 있으면 누구나 다 위대한 스토리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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