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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억 명품녀’와 신정동 살인사건 ②

우리를 슬프게 하는 속물, 그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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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은 남이 다 나에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한 다음에야 보편적이고 소박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타인에 대한 매혹이 사라진 뒤에야 타인에 대한 증오도 사라졌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비프는 이 황금 만년필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다음에야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오는 세일즈맨 윌리는 서른넷이 되도록 제구실을 못하는 큰아들 비프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비프와 해피 형제는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비프 : 언제나 네 옆의 녀석보다 한발 앞서야 해. 그러나 여전히 거기에 네가 말한 미래가 있다는 거지
해피 : 내가 항상 바라던 일. 내 아파트, 내 자동차, 내 여자들. 그런데도 빌어먹을, 난 외롭다고
비프 : 집을 짓고도 그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살지 못하잖아
해피 :맞아. 그렇지만 그 친구가 가게에 들어오면 그 안에서 사람들이 바다 갈라지듯 쫙 갈라지지. 회전문으로 들어온 작자가 연봉 52,000달러짜리거든. 대가리에 든 거라곤 내 새끼손가락만큼도 없는 놈이지만 말이야……. 거들럭거리는 놈들에게 해피 로먼이 성공하는 걸 보여주어야 해. 그놈이 걸어 들어오듯이 나도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그러고 나면 형과 같이 갈게. 함께할 거야. 오늘밤 같이 있었던 샬럿이라는 여자는 다섯 주 후에 결혼할 여자야
비프 : 진짜?

해피: 그럼 가게에서 부사장 줄에 선 놈의 여자야. 무슨 생각이었는지 몰라. 아마 과도한 경쟁심 같은 거였겠지. 그 여자를 데리고 가서 쓰러뜨렸더니 호호 그 계집애 나한테 붙어 떠나질 못해. 이러는 내가 싫어. 그 여자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오는 대로 받고, 그러기를 즐긴다니까!
비프 : 목장만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뭔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윌리는 속물이긴 속물인데 결국 실패로 끝나기 때문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속물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체면 (“내 아들은 곧 연봉 25000짜리가 될 거예요” “내 아들들은 높은 자리에 있지요.” 라든가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나를 알아본다니까요”) 인맥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해”) 아주 좋은 인상(마치 면접 보는 신입사원들이 그러는 것처럼)이다. 그는 성공하는 사람에겐 뭔가 따로 성공 비결이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은 정글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검은 다이아몬드가 가득 찬 정글이다 라고 생각한다. 윌리가 비프에게 썩 꺼져 버리고 목수가 되든 카우보이가 되든 맘대로 하라고 고함치던 그날, 그들의 대화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였다. (목장이 좋을 것 같다든가 스포츠 용품 가게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든가) 그런데 이 대화는 회한에 가득찬 것이고 헛된 희망에 기댄 것이었다.

마침내 비프는 넥타이를 매고 예전에 알던 (안다고 착각하는) 사장님에게 터무니없는 사업 자금을 부탁하러 간다. 그렇게 여섯 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가 얻은 것은 사장의 힐긋 스쳐보는 눈초리뿐이었다. 그런데 사장실에서 돌아나올 때 비프는 무심코 사장실의 황금 만년필을 훔친다. 그런데 이 비참한 도둑질이 뜻밖의 회심의 기회가 된다. 비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진실을 아셔야 할 때에요. 전 금방이라도 사장이 되어야 했어요. 이젠 그런 것들을 끝장내려는 거예요.”
“그러면 나가 죽어라! 아비에게 반항하는 자식아. 나가 죽으라고!”
“전 오늘 손에 만년필을 쥐고 11층을 달려 내려왔어요. 그러다 갑자기 멈춰 섰어요. 그 사무실 건물 한가운데에서 말예요. 그 건물 한복판에 멈춰 서서 저는 하늘을 봤어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봤어요. 일하고 먹고 앉아서 담배 한 대 피우는 그런 시간들을요. 그러고 나서 만년필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말했죠. 뭐 하려고 이 빌어먹을 물건을 쥐고 있는 거야? 왜 여기 사무실에서 무시당하고 애걸해 가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전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


그러고 나서 비프는 우리에게 꿈이 있었다? 그건 꿈이 아니라 가짜 꿈이었다고 말한다. 세일즈맨이 죽던 날은 마침 그들의 집 할부금을 다 갚던 날이기도 했다. 집을 사느라 진 빚은 다 갚았으나 그 집에 살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세일즈맨 윌리에게 현재는 밀린 보험금을 갚아야 할 유예 기간일 뿐이었다. 인생은 여기 말고, 저기 어디 다른 곳, 먼 곳에 있었다, 소비 사회의 속물에게도 현재는 한낱 유예 기간일 뿐이다. 왜냐하면 만족은 싫증을, 욕망은 다른 욕망을, 충만함은 곧 새로운 결핍감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수한 추구로서 윤리는 현재를 손에 넣는 것이란 올리비에 라작의 말이 생각이 난다.

미시마 유키오는 가면의 고백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나는 욕구가 없는 것을 욕구했으며, 욕구하는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는 윤리적인 인간의 바로 정반대 쪽에 서 있었다”

 

속물도 있지만 또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하는 사람도, 누릴 수 있는 것을 양도하는 사람도,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죄를 지을 수 있었지만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란 질문은 질문이 아니다. 왜 무엇을 할 것인가만이 질문인 듯하다. 새로운 욕망을 갖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욕망에 대한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 우리는 수시로 속물, 더 새로운 속물, 속물이 아닌척하는 속물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동물에 대한 혐오감에서 지배적인 감정은 ‘동물을 만질 때 그 동물이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속물을 말할 때 갖는 감정도 이와 같다. 속물이 나를 알아볼지 모른다는 희미한, 어렴풋한 두려움이 더욱 독창적인 속물들을 낳는다.

『적과 흑』의 쥘리앙 소렐은 남이 다 나에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한 다음에야 보편적이고 소박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타인에 대한 매혹이 사라진 뒤에야 타인에 대한 증오도 사라졌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비프는 이 황금 만년필은 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다! 라고 선언한 다음에야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나의 실패와 패배감에 대해 고백을 하고 싶은 날이 있지만 그 고백 전에 나는 그것을 왜 욕망했었나? 그 욕망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 것이었나? 그 순간 타인들은 내게 누구였는가? 를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일매일 나 자신이 벗어나고 있는 거짓과 허위의식과 나 자신을 그릴 듯이 묘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젠 내겐 거의 믿음이 되어 버렸고 그것이 그나마 다른 ‘인간’이 되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어슴푸레한 빛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고백하는 가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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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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