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오마이 뉴스와의 강연 때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을 받았었다. 물론 이 질문은 고전 강연 때마다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새로울 게 없다. 그런데도 매번 받을 때마다 이 질문이 역설적으로 가장 새롭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나는 다소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 대략 매주 한 권씩의 고전을 읽어 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 와중에 나는 고독과 외로움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한 가지 더 적막감이란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이 사회의 다수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의 우리가 겪고 있는 일종의 편집증 같은 것, 이를테면 도스트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나는 혼자인데 너희들은 모두 한통속이구나” 같은 의심(그렇게 해서 우리는 외로움이 자신만의 비밀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자기 자신과만 대화를 나눌 때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외로움은 넓은 길, 서로 닮은 거대한 길 속에서 갈 곳을 잃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고독이라면 어렴풋한 빛 속에 일부러 홀로 떨어져 길을 걷는 것과도 같다.(이 장면이라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크리스마스나 혹은 볼라뇨의 『먼 별』이 생각이 난다.)그리고 이때의 대화는 엄밀히 말하면 나 홀로 하는 대화가 아니다.
모든 사유는 엄격히 말해서 고독 속에서 행해지며 나와 나 자신 사이의 대화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 속의 둘의 대화는 나의 동료 인간들의 세계와의 접점을 상실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사고의 대화를 이끄는 나 자신 속에 재현되기 때문이다. 고독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 속의 둘의 대화가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해서 타자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체를 확정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한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내게 고전은 고독 속의 내가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필요로 했던 질문이었던 것 같다.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은 배경 소음과도 같은 책들이라고 했다. 갑자기 현재의 모든 것들이 아득해지고 멀리서 희뿌옇던 것들이 경이롭게 다가와 나를 에워쌀 때 나는 텅 빈 거리에 무엇인가 솟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고전은 그 질문으로 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그 질문은 우리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너무나 절실하고 소중해 보이기 때문에 매혹적이다. 언젠가 우리가 그 질문을 마주치게 되리란 믿음으로 쓰인 책이 고전들인 셈이다. 그래서 고전을 읽다가 우리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려 애쓰게 되고 우리가 언젠가 우주에 떠도는 한 줌의 먼지가 되리란 것을 명백하게 알고는 있어도 더욱더 열정적으로, 좀 더 명예롭게 삶을 사랑하기로 작정하게 된다. 놀라움과 진지함과 그리고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설렘과 어떤 은총의 느낌을 갖고.
그리고 적막감에 대해서는 나중에 노신의 『아큐정전』에 관해 이야기할 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지만 하여간 나 역시 적막감 때문에 쓰고 있다는 것 정도로만 우선 말해두겠다.
그런데 지난 오마이 뉴스와의 강연 땐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란 질문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이야기했었다. 지난주에 내가 굳이 『부활』을 예로 든 것은 청문회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 청문회의 첫날, 나는 회사 앞 식당에서 이런 대화를 들었다. 까맣고 건장한 세 남자였는데 그들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편히 앉아서 해장과 요기를 겸해서 국밥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저런 짓을 했으면 당장 감방에 끌려갔을 텐데……”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좀 있는 사람들은 다 저런 걸 할 줄 알지? 어디 가르치는 데라도 있나?”
“그러고도 공직자가 되면 우리한테는 국가를 위하라고 말하겠지? 자기들은 자기들이 한 일과는 완전히 담쌓은 척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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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를 듣자마자
『부활』의 네홀로도프가 생각이 났다. 명문 귀족 공작인 네홀로도프는 자신이 십여 년 전에 농락하고 버린 어여쁜 하녀 카츄사가 매춘부가 되었다가 독살 혐의로, 무죄임에도 징역형을 선고받는 바로 그 자리에 우연히 배심원으로 참석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카츄샤를 구해낼 결심을 한다. 그 순간 그의 감정은 뭔가 그녀를 위해 도움 될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그것이 만약 결혼이라면 그것까지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카츄사를 면회하러 다니면서 수많은 죄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억울한 죄인들을 위해서는 이런저런 고위직의 사람들을 만나 힘을 좀 써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때마다 그는 좀 당혹스런 감정에 빠진다. 자신의 가혹한 처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몇몇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 오히려 가해자들의 못된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공직자에 대한 한 가지 생각을 굳히게 된다. 즉 공직자들은 자신은 그렇게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민중은 그런 생활을 하면 곤란하고 민중이 이 같은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민중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심각한 의문이 그를 사로잡는다.
무엇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이 벌을 받고 동시에 그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거리를 활보하며 자기와 똑같은 일을 한 사람을 재판하고 벌주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미치광이인지, 아니면 내가 보고 있는 그 같은 짓들을 하는 그들이 미치광이인지?바로 이 부분이 청문회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연상했던 것들이었다. 톨스토이는 이 의문을 카츄사와의 사랑과 더불어 네홀로도프 부활의 출발점이자 필연성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부활을 다시 읽으면서 톨스토이가 내게 묻고, 내가 다시 톨스토이에게 물을 질문을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 발견할 수 있었고 그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 두 가지를 우선 적어보겠다.
첫 번째로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하는 차장 검사 셀레닌이다. 젊은 시절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던 셀레닌이 뜻밖에도 카츄사의 상소를 기각해버린다. 네홀로도프는 놀란다. 셀레닌은 도대체 어떻게 세월을 보냈던가? 셀레닌은 자신의 인생을 ‘그것이 아님’으로 설명한다.
젊은 시절 너그럽고 총명한 모범생이었던 그의 목표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직에 들어갔다. 그런데 관직은 그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그는 현실이 평소 자기가 바라던 것과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즉 ‘그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싶지 않아서 그냥 그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결혼 역시 거절하면 상대방 여자가 상처받을까 봐 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데 치중하게 되었다. 그는 가정생활도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그것이 아님’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점차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실이란 인간 개개인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집단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가장 큰 ‘그것이 아님’이었을까? 바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허위를 행하고 있단 의식 없이, 평온하게 아무런 기쁨과 위안을 주지 않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은 허위들이 모여서 결국 더 큰 허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보여준 이 셀레닌이란 사람을 과연 톨스토이는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 나는 어떤 초조함 속에서 읽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님’ 역시 내 생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님’의 탈출구는 무엇일까? 나는 책 속에서 네홀로도프가 느꼈던 감정 중에 수치심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죄수가 아닌 그가 죄수들 사이를 걸을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그런데 그를 더욱 괴롭혔던 것은 이 수치심과 함께 혐오감도 함께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같은 상황에서는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그는 쉽사리 혐오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이런 혐오감과 ‘동시에’ 일어난 감정이 수치심이란 데서 어떤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수치심을 느낀 그는 그가 맺고 있던 과거의 모든 관계들을 서서히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님’과 ‘동시에’ 우리가 수치심을 느낀다면? 나는 어떤 순간에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가? 그 수치심은 어떻게 나의 수치심이 되었는가? 혹시 수치심을 느끼게 한 것이 우리 정신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그런 수치심이라면, 그런 수치심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뭔가 바꾸려 한다면?
두 번째 질문은 직무에 대한 것이다. 어느 뜨거운 날 한 죄수가 호송 중에 더워서 죽게 된다. 아직 젊고 건강하고 잘생겼는데 더위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이 사람은 왜 죽은 것인가? 누가 죽인 것인가?
(…)교도소장은? 그런 날에 징역수, 유형수, 남자 죄수, 여자 죄수를 출발시키라는 명령을 그대로 따랐을 뿐. 호송장교도 몇 명의 죄수를 어디서 인계받아 어디로 인도해야 하는 자기 의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그를 탓할 수도 없는 일. 언제나와 다름없이 그들은 죄수들을 인솔했고 아까 죽은 그 두 사람처럼 튼튼한 죄수가 혹서를 감당 못하고 쓰러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무에게도 죄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고로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살해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만약 지사라든가 교도소장, 장교가 아니었더라면 이같이 찌는 듯한 무더위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보낼 수 있는지 심사숙고했을 것이며 호송 중 숨이 찬다든가 더위에 못 견디는 사람들이 생기면 행진을 멈추고 잠시 나무 그늘로 가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같은 불행이 발생했다면 슬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아예 그러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에 슬픔을 표하는 것까지 막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의무를 생각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직무와 의무만을 중요시하여 이를 다른 사람들의 어떤 요구보다도 제1의 조건으로 다뤘기 때문이다.아이를 두고 임신한 몸으로 끌려간 한 여죄수는 간수에게 담배를 받고 분노한다. 왜냐하면 간수는 인간이 담배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간수는 왜 인간이 부당하게 자유를 구속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모르는 척할까? 왜 엄마는 아이와 강제로 떨어지면 괴롭다는 것을 모르는 척할까? 그 뒤로 그 여인은 인간이든 신이든 다시는 믿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직책이란 무엇일까? 그 직책만 아니었다면 선량하고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왜 어떤 직책 때문에 인간애를 잃게 될까? 그리고 직책과 인간애의 문제는 왜 중요한가?” 히틀러 시대에 1,500명 유대인을 사살한 함부르크의 평범한 중년 가장들로 이뤄진 101예비 경찰대대를 인터뷰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어디서나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권위를 존중하고 권위에 따르도록 가르치며 사실 그렇지 않다면 사회는 거의 기능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디서나 사람들은 각자의 직업 분야에서 출세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모든 근대사회에서 드러나는 삶의 복잡성과 그로 인해 초래되는 관료화?전문화는 공식적인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개인적 책임감을 점점 희석시키고 있다. 실질적으로 모든 사회 공동체에서 개인이 속해있는 집단은 개인들의 행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도덕적인 가치기준을 설정한다. 만약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대인을 사살하는 것 같은 극도로 폭력적인 경험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직무 수행 중에 자신의 양심이나 선택과는 관련 없는 어떤 일을 주로 ‘윗선의 명령으로’ 혹은 ‘윗선의 명령을 짐작하여’ 혹은 ‘동료들을 위하여’하곤 한다.(방송사의 경우 섭외?편집 등에서 그런 상황을 자주 맞닥뜨린다)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인간화에 대해 깊은 근심을 하는 시선들이 생겨난다.
충성심?의무감?규율 정신은 희생자의 입장에 서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확고한 도덕규범이 된다. 그 결과 평범한 개인들은 단지 타인의 의지를 실현하는 도구인 집행관 지위로 전락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행위 자체가 올바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지시된 행위를 얼마나 잘 이행했는지에 대해서만 개인적으로 책임을 느낀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내가 직무 수행 중에 하는 ‘행위 자체가 올바른가?’ 하는 질문은 타협과는 완전히 무관한 영역일 것 같다. 그것이 ‘올바른 거야, 용감한 거야, 현명한거야’라는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그 올바르다는 것의 기준이 뭐야? 누구에게 올바르다는 거야?’라고 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점점 더 관료화 전문화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에 도덕적 책임을 느껴야 하는지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들 때문에 부활에서 캬츄사의 변신, 그리고 카츄사에 대한 네홀로도프의 감정의 변화만큼이나 잊을 수 없는 것은 네홀로도프가 감옥에서 나올 때 본 어떤 소년의 모습이다.
오물이 새어나오는 현관 옆에 놓인 변기통 바로 옆에 세 사람이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노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열 살가량의 소년이었다. 두 죄수 사이에 끼인 소년은 한쪽 손을 뺨 밑에 대고 한 죄수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자고 있었다.죄수의 다리를 베고 한쪽 손을 뺨 밑에 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이 소년이 잘 자랄 수 있을까 근심하다가 이 소년이 잘 자라길 기원하다가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 사회가 그래도 따뜻하게 유지되는 것은 법과 단죄 때문이 아니고 네홀로도프 식으로 말하자면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연민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소년이 왜 바로 이 모습으로 잠들었는가, 이 모습이 왜 이토록 사랑스럽고 아슬아슬하고 눈물겨운가 궁금하다. 이 소년은 더 이상 우리가 믿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네홀로도프도 그 밤에 닭이 두 번 울 때까지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