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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히가시노 게이고에 빠지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매력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그의 ‘광팬’이라고 자신할 만큼은 아니다. 나름 신경 쓴다고 찾아 읽어도 어느새 서점에 새 책이 나와 있는, 그 엄청난 출간 속도에 질려 일찌감치 포기를 선언했다고 할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지만, 그의 ‘광팬’이라고 자신할 만큼은 아니다. 나름 신경 쓴다고 찾아 읽어도 어느새 서점에 새 책이 나와 있는, 그 엄청난 출간 속도에 질려 일찌감치 포기를 선언했다고 할까. 한때 한 달에도 몇 권씩 쏟아지던 그의 작품들. 일본에서는 1985년 데뷔작인 『방과 후』 직후부터 인기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그가 한국에는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 이후에야 제대로 알려진 것이 이유일 테지만. 이제 그의 소설은 거의 다 번역되었으니 다시 한번 ‘히가시노 게이고 전 권 독파’에 도전해도 될 듯하지만. 아무튼.
일본에 온 후, 그에 대한 애정을 다시 모락모락 피어오르게 만든 작품을 만났으니 바로 『신참자(新參者)』(일본어 제목은 신잔모노)다. 소설을 보기 전, 지난 분기(2/4분기) TBS에서 방송된 드라마로 이 작품을 먼저 만났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분신 ‘가가 형사’ 시리즈의 8번째 작품으로 2009년에 일본에서 발간돼 유명 추리소설 차트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뽑혔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를 선택한 데는 원작자의 이름보다 주인공 가가 교이치로를 연기한 배우 아베 히로시의 힘이 컸다. <결혼 못하는 남자> 일본판에서 그의 사랑스러운 매력을 발견한 후, 그가 등장한 작품이라면 ‘무한신뢰’를 보내왔던 터다. 거기에 잘난 척을 쫌 보태자면, 예전부터 가가 형사와 싱크로율이 가장 높은 배우는 역시 아베 히로시라고 생각해왔다. 시리즈 중 하나인 「내가 그를 죽였다」에 등장하는, 가가형사에 대한 묘사를 본 후부터다.
키는 180센티미터 가까이나 될 것 같았다. 분명히 뭔가 스포츠를 했으리라 싶을 만큼 어깨 폭이 넓었다. 가무잡잡하게 그을리고, 윤곽이 짙은 얼굴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쯤일까. 입술에 슬쩍 감도는 웃음에서 정체불명의 자신감이 느껴져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내가 그를 죽였다」 중)
이렇게 보기 시작한 드라마 <신참자>. 1화를 보고 나서 “앗 이건 뭐지?” 싶었다. 사건의 얼개는 지극히 간단하다. 도쿄 니혼바시의 코덴마쵸에 있는 맨션에서 미츠이 미네코라는 중년 여성의 사체가 발견된다. 이 지역 경찰서에 신참으로 부임한 가가 형사가 이 사건의 주변 인물들을 파헤쳐나간다. 독특한 점은 매 회가 옴니버스식으로 꾸며져 각각 새로운 용의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인데, 그 용의자들을 하나하나 수사해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감추려 했던 진실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이 숨겨진 에피소드들이 어찌나 따뜻한지,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거 추리물 맞아?’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붉은 손가락』 등 그의 일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핵심은 ‘가족’인데, 부부 간, 부모-자식 간, 고부 간의 애정이 드러나는 각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은 “울면서 봤다”는 시청자들도 많을 정도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에피소드는 「시계 수리공의 개」 편이었는데, 이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버지가 시계 수리공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일 거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강하고, 무뚝뚝하지만 실은 따뜻한 시계 수리점 주인의 캐릭터를 통해, 아버지의 삶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할까.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일을 끝내고 시원하게 술을 들이키는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어 보여, 자신도 매일 밤 11시를 홀로 혹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시간으로 정해놓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뽑힌 작품이긴 하지만, 사실 마지막 회에 드러나는 범인의 실체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사를 보내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작품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휴머니즘 때문이다. 인물 하나하나의 사연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에게 서로의 진심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가가 형사. 작품 후반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당신의 역할은 사건을 조사하는 것만이 아니었군요”라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는 곧 이 작품의 주제이기도 하다.
물론 이렇게 형사물이 범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제작이 쉬워서’일 것이다. 스토리 얼개만 잘 짜이면,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괜찮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게 형사물이라는 것이다. 또 매회 하나씩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옴니버스식 전개로, 연속극에 비해 시청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진지하게는 일본인들의 고립된 인간관계가 추리 드라마 범람의 한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 5월 아사히신문은 형사 드라마에 대한 특집 기사에서 “범죄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통해서만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고립된 개인들로 이뤄진 일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라는 내용의 분석을 실었다. 조금 오버스러운 듯하지만, 살인사건이라는 소재를 사용했을 뿐 실은 사회와 가족, 인간의 본성을 주제로 하고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 등의 작품을 보자면, 이런 지적에도 일리가 있다는 느낌이다.
일본에 온 후 새롭게 발견한 작가도 있다. 최근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영화 <고백>의 원작자인 미나토 카나에다. 영화를 보기 전 그의 작품을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아직 네 권밖에 발표하지 않은 신예 작가이긴 하지만). 실은 이 작품 역시 재밌게 봤던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만든 나가시마 테츠야 감독이 연출했다고 해서 보러갔다. 영화관에서 나오면서 바로 원작을 구입했다. 한 중학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여러 인물들의 고백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이 소설은, 발랄하면서도 잔인하다. 영화에는 감독의 독특한 개성이 더해져 정신없이 화려하고 한없이 잔혹한, 기묘한 느낌으로 재탄생했다. 같은 작가의 작품 『소녀』 『속죄』를 연달아 읽어 버리고, 올해 6월에 나온 신작 『야행관람차』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이틀째 우편함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구시렁대는 중이다. 아, 왜 일본 인터넷 서점은 당일 배송이 안 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