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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②

19세기 예술의 수도, 파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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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열흘간의 시간 동안 서유럽 세 개 도시의 모든 미술관을 둘러 보아야 했기에, 시차 적응이 안 돼 몽롱한 정신 그대로 루브르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파리의 거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을 일정 기간 동안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박물관 패스를 샀지요.

파리 시내의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었을 때에는 아직 해가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유럽은 한국보다 여덟 시간이 늦기 때문에 아침 비행기를 타면 열 몇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도 그날 일정을 잡을 수 있습니다. 불과 열흘간의 시간 동안 서유럽 세 개 도시의 모든 미술관을 둘러보아야 했기에, 시차 적응이 안 돼 몽롱한 정신 그대로 루브르로 향했습니다. 거기서 파리의 거의 모든 미술관과 박물관을 일정 기간 동안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박물관 패스를 샀지요. 박물관 패스는 입장료를 아낀다는 것보다는 일일이 표를 사는 데 들이는 시간을 아낀다는 데 더 의미가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금전적으로도 ‘본전을 뽑고도 남을 만큼’ 이득을 보긴 했습니다. 루브르만 해도 사흘간 네 번이나 드나들었으니 말입니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인 만큼 루브르에는 비수기인 5월이었는데도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뒤쪽 입구를 통해 줄 서지 않고 입장해 가장 먼저 드농관의 대전시실로 달려갔습니다. 「모나리자」와 「나폴레옹의 대관식」 등의 작품이 있는 이 곳은 항상 관광객들로 붐벼서 불과 입장 시간에서 2,30분만 지나도 그림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게 불가능하게 됩니다. 사람의 그림자가 없는 대전시실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대작들과 마주했던 그 순간은 앞으로 평생 행복했던 기억으로 안고 가겠다 싶을 만큼 완벽했지요.

늘 관람객들로 붐비는 드농관 2층 회화 전시실이 이렇게 한적할 때는 드물다.

곧이어 관광객들이 밀려들면서 잠깐의 평화는 깨졌지만 「모나리자」를 보겠다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을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전해만 해도 직원들이 관광객들을 일일이 따라 다니며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젠 아예 포기했는지 사진을 찍든 말든 아무 상관 안 하더군요.

방탄 유리에 둘러싸인 「모나리자」와 그 앞의 인파.

루브르는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들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명화들을 일대일로 알현(?)할 수 있는 최적의 미술관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관람객은 그림 말고도 볼 것이 많은 관광객이 대부분이기에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만 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그들의 동선을 벗어나기만 하면 렘브란트, 드라크로아 같은 수많은 대가들의 그림을 한가롭게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면 한국에서보다 싼 프랑스 화장품을 사는 것보다 그 시간에 그림을 더 보는 게 이득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많다는 루브르의 그림들을 거의 다 보면서 저는 집필 수첩에 작품에 대한 느낌과 제목들을 적어 넣고, 사진도 찍어 두었습니다. (파리의 미술관은 대부분 촬영을 허용하며, 저는 작품을 손상시키는 플래시는 터뜨리지 않았습니다.)

루브르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소장품을 자랑하지만 루브르의 진짜 주인공은 미술관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지난 번 방문 때만 해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조명’의 존재는 몇 번이고 저를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천장에서 비쳐 드는 자연광이 인공 조명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림을 돋보이게 하더군요. 미술관에서 조명을 잘못 쓰면 반사광 때문에 그림이 잘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액자에 유리라도 덮여져 있다면 아예 그림 구경은 물 건너가는 것이지요. 이후 방문한 벨기에 왕립 박물관의 「빛의 제국」 앞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반사된 제 얼굴밖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조명이 좋으면 관람객은 유리가 끼워져 있어도 그 존재를 느낄 수가 없게 됩니다.

루브르의 빛, 쾌적한 공기, 인테리어에 힘입어 생명력을 얻는 그림들을 보면서 ‘같은 명화라도 너희들은 참 축복받았다’ 하고 절로 중얼거리게 되더군요.

루브르가 인상파 화가 이전의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다면 오르세는 그 이후의 작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차역이었던 것을 고쳐 지은 것으로 더 유명한 오르세에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많기 때문인지 루브르보다 훨씬 번잡했습니다.

오르세 미술관.

이곳에서 느낀 단 한 가지는 ‘명화는 아름다우니까 명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투박해 보이는 마네나 휘슬러 같은 화가의 그림들이 전문가들만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하니까 유명한’ 그림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만난 명화들은 굳이 이것저것 따지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영국 코미디 영화에도 등장한 적 있는 휘슬러의 「화가의 어머니」는 처음 본 순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무채색의 그림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화가의 어머니」, 제임스 맥닐 휘슬러, 파리 오르세.

‘아름다우니까 명화다’라는 생각은 현대 미술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 퐁피두 센터를 둘러보면서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인상파 이전에는 화가와 감상자 사이에서 합의된 일종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푸른색 옷을 입은 여인은 성모 마리아다, 혹은 비둘기나 장미와 함께 있으면 여신 아프로디테다,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그림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근현대 미술이란 그런 약속들을 깨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고, 이제 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소수집단 간의 자의적이고 복잡한 약속을 이해해야 하는 엘리트적인 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군다나 현대 미술가들은 아름다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현대 미술가이면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한 클림트가 당시 미술가의 이단아로서 대중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 거고요. 이런 배경이 있으니 현대 미술, 하면 생각나면 추상화가 아름다운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추상화들조차 대가의 것을 직접 대면해 보니 아름답더군요. 제가 미로의 「블루」 시리즈 같은 그림을 아름답다고 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블루Ⅱ」 호앙 미로, 파리 퐁피두 미술관

퐁피두 센터 마티스의 방. 그만의 붉은 색에 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이 밖에도 루브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미술관 오랑주리와 로뎅 미술관도 둘러 보았습니다. 오랑주리는 개인의 소장품을 모아 전시한 것이라 여느 가정집 거실에 걸려 있을 법 한 작은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큰 미술관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덜 유명한’ 인상파 시대 화가들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도저히 그 시대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마리 로랑생의 서정적인 그림들을 처음 본 것도 그곳이었고요.

오랑주리 미술관을 유명하게 해 준 건 모네의 「수련」 연작입니다. 사방벽에 벽화처럼 들어찬 이 신비한 그림은 이 작고 어수선한 미술관에서 부대끼며 그림을 감상하던 관람객들을 갑자기 숨죽이게 만드는 힘이 있더군요.

「수련」, 클로드 모네, 파리 오랑주리.

파리의 미술관들을 모두 둘러 본 저는 고흐가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고흐가 죽음을 앞두고 수많은 그림을 토해내듯 그렸던 곳이며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파리에서 가깝고요. 동생 테오와 나란히 묻힌 그의 묘가 너무나 초라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어쩐지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의 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저는 찍어 온 사진들을 랩탑에 옮겨 놓고 그날그날 정리했습니다. 그림을 찍은 사진들은 실제로 책에 쓰기보다는 집필할 때 기억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출판사에서는 나중에 책에 삽입하게 될 수도 있으니 유럽의 여러 풍경들을 담아 오라고 했으나 찍어 놓은 사진들을 보니 제 실력으로는 책에 쓸 사진을 건지는 것은 어림없겠다 싶었습니다. 한때 작가들이 직접 사진을 찍어 화보집 수준의 책을 내는 게 유행이었는데 저에게도 사진을 배워 보라는 권유가 많았었지요. 기계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제가 언제쯤 DSLR의 조작법을 배우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그 호텔방에서도 저는 애써 가져간 랩탑 대신 집필 수첩에 그날의 단상을 볼펜으로 (만년필이나 사인펜이 아닌 꼭 볼펜이어야 합니다) 빼곡히 적어 넣고 있었으니까요.

나흘 째 되던 날, 한때 예술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본 수많은 그림들의 여운을 간직한 채 저는 브뤼셀로 향하는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루벤스와 베르메르,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가 기다리고 있는 과거 플랑드르 미술의 중심지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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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인숙

소설가, 에세이스트. 1974년 서울 출생. 숙명여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출간 이후 80만 부 이상이 판매되며 여성 에세이 분야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베스트셀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2004)를 비롯하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 실천편』(2006), 『여자, 거침없이 떠나라』(2008), 『여자의 인생은 결혼으로 완성된다』(2009),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2010) 등 2030 여성을 위한 에세이를 펴내어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또한 그녀의 여성 에세이는 중국과 대만, 베트남, 몽골에 번역 출간되었고 특히 중국에서는 1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보이며 자국 위주의 중국 출판계에서는 드물게 비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1위 기록을 세우는 등 여자에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전해주는 멘토의 지침서로서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시대 아시아 여성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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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소설가의 아름답고 고요한 문체가 돋보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작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소설이다. ‘흰’이라는 한 글자에서 시작한 소설은 모든 애도의 시간을 문장들로 표현해냈다. 한강만이 표현할 수 있는 깊은 사유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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