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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차, 역동적인 공존

지젝의 『시차적 관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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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목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구축이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그 이름을 다시 들어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지젝은 이 책을 스스로 ‘대작’(magnum opus)이라 불렀다. 여기서 ‘마그눔’은 읽기도 전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책의 두께가 아니라, 그가 시도한 철학적 기획의 규모를 가리킨다. 고전예술에서 할리우드 영화까지, 언어철학에서 뇌 과학까지, 칸트나 헤겔에서 들뢰즈와 라캉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젝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방대한 영역에 걸친 관심은 우리를 당혹케 할 정도다. 그러나 진짜 놀라운 것은 21세기의 모든 지적 성과에 기초하여 새로이 보편적 존재론을 구축하려는 지젝의 야심이다. ‘세계관 철학’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난 것이 아니었던가?

지젝의 목표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구축이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그 이름을 다시 들어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동안 ‘포스트’라는 접두사를 달고 나타난 지적 유행들은 외려 세계관 철학의 ‘해체’에 전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신의 ‘구축’을 시도하는 지젝의 기획은 무모해 보인다. 그가 헤겔과 라캉의 이름으로 되살리려는 것이 다름 아닌 ‘변증법적 유물론’이라지 않은가. 이 기획은 무덤에서 돌아온 자(revenant)를 보는 으스스함, 프로이트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억압된 것의 회귀를 보는 ‘언캐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오랫동안 변증법적 유물론은 실제로 억압되었다. 단적인 예로 이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조차 지성계에서 금기였을 정도다. 물론 지젝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과거의 형태 그대로 복원하려는 것은 아니다. 헤겔과 라캉에 대한 새로운 독해에 기초하여, 한때 보편철학의 역할을 했던 변증법적 유물론을 새롭게 부활시키려 한다. 이 새로운 존재론적 기획에 단초가 된 것이 바로 ‘시차’ 개념이다(지젝은 자신이 이 개념을 가라타니 고진에게서 빌려왔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따라서 이 책을 이해하려면 먼저 ‘시차’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별과 달과 해의 시차

‘시차’(parallax)란 천문학 용어로,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천체의 위치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굳이 천문학까지 들먹이지 않고 일상에서도 시차를 경험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비행을 하다가 종종 시차를 경험한다. 조종석 위에 달린 방향계의 바늘 위치는 바늘과 눈금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바늘이 정확히 90도를 가리키고 있어도 왼쪽 좌석에서는 마치 89도, 오른쪽 좌석에서는 마치 91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비행기의 방향을 놓고 옆에 앉은 교관과 번번이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

할 일 없는 수학자라면, 그 각도의 차이를 가지고 바늘과 눈금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낼 것이다. 똑같은 원리가 천문학에서는 멀리 떨어진 천체들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사용된다. 천문학에서 시차는 크게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 해의 시차(solar parallax), 달의 시차(lunar paralax) 세 종류가 있다. 이 시차들은 지구의 공전(연주시차) 혹은 자전(일주시차)에 따른 관찰위치의 차이를 이용해 각각 별과 해와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지젝은 이 세 가지 시차를 자신의 대작을 구성하는 3부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그저 은유에 불과하다.

‘별의 시차’란 존재론적 시차(ontological parallax), 즉 우리가 현실에 접근할 때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차이를 가리킨다. 가령 빛은 파동이자 입자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의 상태를 변화시킨다. ‘해의 시차’란 과학적 시차(scientific parallax)로,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현상학적 현실과 과학의 객관적 설명 사이의 차이를 가리킨다. 우리는 뇌 속에 ‘자아’가 있다고 믿으나, 과학의 관점에서 뇌는 그저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달의 시차’는 정치적 시차(political parallax)로, 우리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를 통해 이를 지겹게 경험하고 있다.

안티노미 앞에서


‘시차’란 명칭은 새로울지 몰라도, 지젝이 ‘시차’라 부르는 것들은 예로부터 존재했던 것들이다. 당장 칸트의 ‘안티노미’를 생각해보라. 상반되는 두 명제가 동시에 옳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철학에서 일상적이다. 이 모순을 처리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제안되었다. 하나는 이를 극복하는 것으로, 흔히 ‘변증법적 종합’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는 A와 B가 더 높은 차원에서 C로 합류하면서, 현상의 차원에서 모순으로만 보였던 A와 B의 대립이 본질의 차원에서는 그저 가상(假象)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진다.

다른 하나는 아예 종합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통약불가능성’ 명제에 따르면, 현실은 원래 다원적이어서 그 안의 다양한 입장들 사이에는 공통 지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 역시 무의미하다.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억지로 공통 지반을 마련하고 그 위에서 둘을 통합, 화해시키려 드는 것은 ‘동일성의 폭력’이다. ‘포스트 담론’의 다원주의는 대개 이런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하지만 이 입장은 사실상 ‘진리’의 추구를 포기한 것으로, 상대주의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지젝의 길은 이 둘 사이, 혹은 이 둘의 모순적 결합에 있다. 그는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의 다원성을 인간의 조건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여기서 포스트모던의 상대주의로 비약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시차를 가진, 그리하여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시각들을 가지고 하나의 통일적 세계관을 구성하려 한다. 이는 세잔의 화법을 연상시킨다. 세잔은 화폭에 서로 충돌하는 다양한 시점들을 도입한다. 하지만 세계가 시점들의 다원성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고, 그것들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 세계를 구축하려 했다.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

지젝이 헤겔의 변증법을 다시 읽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통상적인 독해에 따르면, 헤겔의 변증법에서 모든 모순은―‘부정’과 ‘부정의 부정’을 거친 후―결국 가상으로 드러난다. 변증법적 운동의 결과로 모든 모순은 지양되고, 더 높은 차원의 종합 아래 그것을 이루는 계기들로 체계적으로 포섭된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시차를 이루는 대상이나 시각의 고유성, 그것들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이 행사하는 동일성의 폭력이다. ‘계급모순을 극복했다’고 선언했던 공산주의 사회의 기만적 화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도르노는 이 때문에 변증법에서 아예 종합의 계기를 제외시키려 했다. 이른바 ‘부정의 변증법’은 종합을 거부하고 부정만 긍정한다. 물론 오직 ‘부정’만으로는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영원한 운동의 과정에서 관점의 다원성을 생성할 수 있을 뿐이다. 아도르노와 같은 모더니스트에게 다원성은 아직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불과했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에 이르면 그것은 아예 추구해야 할 목표가 된다. 다원주의는 결국 철학적 상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지젝이 변증법에 대한 아도르노식 수정을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다시 헤겔로 돌아가려 한다. 잘못은 헤겔 변증법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통상적 해석에 있었다. 그가 보기에 “스스로를 그 자체로부터 외화시키고 그 타자성 안에서 자신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내용을 재(再)전유한다는, 헤겔의 정신에 대한 전형적인 담론은 심각한 오독”이다. 그는 우리에게 헤겔 변증법에 대한 이 통상적 인식을 버리라고 권한다. “우리가 헤겔의 삼자관계에 대해 논할 때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외화에 대한 이야기와 본래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의 사실과 고차적으로 매개된 통일성으로의 복귀에 대해 잊어버리는 것이다.”

변증법의 재구성

통상적 해석에 따르면, 정신이 자연이 되고 그 자연이 결국 정신으로 드러남으로써 정신/자연, 주체/객체의 모순이 극복된다. 여기서 A-B-A라는 변증법의 여정은 (논리적, 역사적으로) 선형적인 과정으로 설명된다. 이 도식에서 B는 결국 본질이 아닌 현상, 진리가 아닌 가상으로 폭로된다. 지젝은 이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헤겔의 변형은 칸트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 자체로서’ 주장하고 (…) 극복의 필요성 자체를 배제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헤겔은 시차를 극복할 필요를 부정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긍정했다는 얘기다.

지젝에 따르면, A-B-A의 운동은 통시적이 아니라 공시적 과정이다. 즉 A였던 것이 B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A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과정에서 A와 B는 공존한다. 즉 변증법적 운동이란 ‘본질-현상-본질’(혹은 ‘진실-가상-진실’)의 선형적 운동이 아니라, 본질과 현상(혹은 진실과 가상)의 역동적인 공존을 가리킨다는 얘기다. 현상은 그저 현상이 아니며, 가상은 그저 허구가 아니다. 현상과 가상 역시 본질과 진실만큼이나 본질적이고 현실적이다. 현상과 가상은 극복되어야 할 허구가 아니라, 본질이나 진실과 나란히 존재하며 ‘시차’를 이룬다.

지젝은 이를 “사물은 제 자신의 최상의 가면”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200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람들이 전 경제부장관 카발로에게 항의하기 위해 그가 있는 건물 안으로 난입하려 할 때, 카발로는 가게에서 파는 자신의 가면을 쓰고 성난 군중들 틈을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가짜 얼굴을 벗기자 진짜 얼굴이 드러났으나, 그 얼굴은 가짜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현상과 본질, 가상과 진실은 동일한 현실의 두 얼굴일지도 모른다. 즉 그것은 시차의 문제일 수 있다. 지젝은 잊지 않고 여기에 라캉의 말을 덧붙인다. “진실은 허구의 구조를 갖는다.”

유물론적 신학

변증법에 이어서 지젝은 유물론의 재구성에 나선다. “주체성에 대한 적절한 유물론적 이론”의 토대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으로 헤겔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워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성했다면,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를 물구나무세워 ‘유물론적 신학’을 구축하려 한다. 여기서 ‘신학’은 물론 반어적 의미를 갖는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지젝이 키르케고르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현실의 장 전체의 급진적인 개방성과 우연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의 신은 인격화된한 신이 아니다. “신성은 모든 것의 불확실성이 무한히 사유될 때 현존한다.” “신은 존재 질서의 너머에 있으며, 그는 우리가 그에 관계되는 양식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신이란 “우리가 (그것을) 근거로 현실의 전적인 우연성을 측정할 수 있는 절대적 타자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는 이렇게 신을 비(非)실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의 유물론적 전도를 위해 남은 일은 거기서 ‘신’이라는 말을 떼어내는 것뿐이리라.

“우리는 어떻게 정신적인 초월성에 전혀 의지하지 않고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이를 주장할 수 있는가? 답은 정확히 그 외설적 불멸성 속에 지속되는 불사의 (거세되지 않은) 잔여인 대상 a다.” 유물론적 전도를 통해 키르케고르가 ‘신’으로 지칭한 것은 이제 라캉의 ‘실재계’로 해석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라캉에게 ‘실재계’란 상상적 재현과 상징적 표상으로 짜인 체계 속에 온전히 기입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잔여를 말한다. 상상하거나 표상할 수 없는 그곳을, 지젝은 모든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끝없이 정치적 저항을 생성해낼 수 있는 원천으로 간주한다.

희생과 거절

라캉이 인용하는 폴 클로덱의 희곡 「인질」에서 여주인공 시뉴는 자신이 혐오하는 남편 대신에 스스로 총을 맞는다. 죽어가는 그녀에게 남편이 그것이 사랑의 표식이었냐고 묻자, 시뉴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온화한 얼굴을 반복적으로 일그러뜨리는 심한 경련으로 남편과의 화해를 거절한다는 암시를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 희생의 전적인 무의미함이다 “남성이 사물(국가, 자유, 명예)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오직 여성만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 또는 남성은 도덕적인 반면 오직 여성만이 진정 윤리적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마지막 두 영화 <노스탤지어><희생> 역시 키르케고르적 희생을 다룬다. “타르코프스키는 희생이 작동할 수 있으며 효율적이려면, 어떤 측면에서 무의미해야 하며 불합리하고 쓸모없는 지출 또는 의식과 같은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점은 오직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그런 행동만이 어떤 이성적 숙고가 없는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현대의 정신적 피폐함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 무의미한 희생의 논리를 하이데거적 전도로 설명하려고 한다. 희생의 궁극적 의미는 의미의 희생이다.”

주인공들의 희생은 그 무의미함을 통해 그 어떤 상징적 질서의 헤게모니 아래 편입되기를 거부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 희생이 그 어떤 비판보다 더 전복적이고 급진적일 수 있다. 의미를 포기함으로써 그 희생은―‘죽음의 충동’을 마주보는 충격효과를 수반하며―온전히 상징계로 편입될 수 없는 세계, 즉 모든 의미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조건이 되는 실재계의 존재를 불현듯이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무한한 포기라는 근본적 행위에 배어 있는 유물론적 전회”다. 여기서 지젝은 사회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 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저항의 원천을 본다.

※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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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 시리즈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했다. 귀국한 뒤 그는 지식인의 세계에서나마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한 비판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하였다.

그를 대중적 논객으로 만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패러디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박정희 숭배’를 열성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과 작가 이인화씨,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으로 숱한 송사와 말썽을 빚어온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작품 〈선택〉으로 논란을 낳은 작가 이문열씨 등에 대한 직격탄이다.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 풍자를 뒤섞은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그의 문장은 '진중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시차적 관점

<슬라보예 지젝> 저/<김서영> 역33,300원(10% + 5%)

수많은 지젝의 책 중에서도 독보적인 『시차적 관점』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까다로운 주체』의 뒤를 잇는 주저이며 저자 스스로 대작라고 칭한 대표적인 저술이다. 이 책은 기존의 지젝 사유를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위해 분명한 한걸음을 내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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