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주제를 어떤 방향으로 쓸 것인가’를 결정한 다음에는 내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그러모으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구상과 취재 과정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상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자료를 모아야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구상을 하면서 취재를 좀 하기도 하고,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다른 실’을 찾게 되어 다시 구상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구상 과정에서 방향을 정한 후 마음 놓고 취재를 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관련된 책을 읽기도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언가가 생각나면 신들린 듯 메모를 하기도 합니다.
책 한 권을 쓸 때마다 늘 그렇듯이 저는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의 취재를 시작하면서도 수첩을 하나 장만했습니다. 제 집필 수첩은 모든 준비 과정이 끝나고 본격적인 집필 과정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한 시도 제 손을 떠나지 않습니다. 거기에 집필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적어 넣습니다.
이번 수첩에는 원화(原畵)를 직접 보기 위해 떠난 여행의 일정 계획부터 우연히 마주친 그림을 보았을 때의 느낌, 그리고 ‘그 배경을 리서치할 것!’이라는 메모까지 꼼꼼히 적혀 있습니다. 항상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수첩을 고르면서도 저는 늘 내용이 넘칠까 봐 걱정합니다. 수첩 한 권을 다 쓰면 한 권을 더 사면 되지만 저에게는 묘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어서 책 한 권당 수첩은 하나여야 하거든요. 그래서 내용을 적는 초기에는 글씨를 깨알같이 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취재 기간이 끝나가고 수첩의 남은 장수가 제법 되는 듯하면 그 때부터 점점 글씨가 커지고 여백이 많아집니다. 써야 할 분량이 많아지면 따로 출력을 하기 때문에 이제껏 수첩 한 권이 모자랐던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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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쓴 집필 수첩들. 악필이라 다른 사람들이 글씨를 잘 못 알아보는데 본의 아니게 ‘보안’ 효과가 있다. | |
제가 구상한 책은 그림에 대한 지식과 정보보다는 ‘그림에 대한 느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이 내용에 드러날 일은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어떤 분야의 글을 쓰든 책에 쓸 내용에 대해서만 자료를 수집하는 작가는 없습니다. 책에 들어갈 내용이 1이라면 작가는 10 이상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1’을 제대로 쓸 수 있으니까요. 작가가 2나 3만큼 알고 쓴 글과 10만큼 알고 쓴 글은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저 역시 책을 쓰기 위해 필요한 10을 알기 위해 노력을 합니다.
일단 저는 서양미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책을 읽으신 독자 분들은 대체 원고의 어느 부분에서 미술사 관련 내용이 필요했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책의 가장 처음에 소개한 「샬럿의 여인」을 그린 워터하우스는 19세기 중반 영국의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의 그림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지만 같은 시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 비해 창의적인 예술 세계를 보여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외면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론가들의 시각일뿐더러, 우키요에(浮世繪)에 그려진 일본을 맹목적으로 동경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값을 일본 컬렉터들이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올려놓은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저는 평론가들의 이런저런 말들이나, 여러 이해관계로 형성된 그림값이 자유로운 그림 감상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책에는 라파엘 전파처럼 미술사가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소개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이제 책에는 나오지도 않았던 미술사에 대한 대략의 이해가 왜 책 집필에 필요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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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럿의 여인」, 워터하우스. 런던 테이트 브리튼 | |
문화센터에서 관련 강좌를 등록한 다음, 저는 서점에서 필요한 책들을 사들이고 도서관을 드나들었습니다. 인터넷도 도움이 되었지만 거기서 얻는 정보는 단편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책이나 사람을 통해 얻는 정보를 확인하고 보충하는 정도밖에는 안 되더군요. 작가들 중에는 이 과정에서 스크립터를 따로 고용하시는 분들도 있으나 저는 되도록 직접 자료 수집을 하는 편입니다.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 맘처럼 척척 찾아다 주는 똘똘한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집필에 필요한 지식이나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녹취록을 작성해야 할 경우에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길 때도 있습니다.
매번 혼자서 자료를 구하고 공부하는 덕에 저는 한동안은 그 분야의 반 전문가가 됩니다. 벼농사에 대해 빠삭했던 적도 있었고, 한의학에 대해 한의사와 제법 말이 통했던 적도 있었지요. 심지어 첫 소설을 쓸 무렵에는 핵융합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까지 있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얻은 지식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다면 꽤나 박학다식한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불행히도 집필이 끝나고 다음 집필에 들어갈 무렵이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잊힙니다. 머리가 나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뇌의 용량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건가 보다, 하고 저 편한 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취재 과정에서 다른 책을 쓸 때에는 없는 과정이 하나 더 추가 되었습니다. 바로 어떤 그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지 선택하는 일이었지요. 처음 그림을 고를 때에는 시대나 화가의 국적을 구분하지 않고 책의 정서에 부합하는 그림들을 모두 후보에 올렸습니다. 그러나 저작권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해서 화가가 생존해 있거나 유족이 저작권을 틀어쥐고 있는 경우에는 그림을 쓰기가 힘들더군요.
취재가 모두 끝난 뒤에 저는 골라 놓은 그림들을 출판사에 모두 보내서 저작권 문제를 확인해 달라고 한 뒤, 다시 사용이 가능한 그림들만을 선별했습니다. 자칫 힘들게 써 놓은 원고를 책에 싣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몇몇 단락은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던 화가들이 연락이 닿지 않거나 거절해 오는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림에 대해 이야기한 책들이 주로 서양 명화들을 다루었던 게 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자료를 찾고 화집으로 그림을 보는 틈틈이 저는 그림과 직접 만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외국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들여오는 대형 전시회가 많았고 그런 전시회도 빼놓지 않고 가 보았지만, 저는 작은 전시회나 대중적으로 지명도가 낮았던 전시회가 더 좋았습니다. 너무 많은 관람객들에 치이지 않고 그림과 조용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관람객들의 발자국 소리조차 공명이 되는 고즈넉한 전시실에서 어딘지 마음이 가는 그림과 일대일로 마주하고 선 기분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압니다. 그림 안으로 몸과 마음이 쑥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이내 뭐라 말 할 수 없이 개운해집니다. 감동적인 영화 한 편에 눈물을 뽑고 나서 마음껏 코를 풀고 난 느낌과 비슷하달까요. 그런 느낌을 경험할 때마다 내 독자들도 이런 종류의 행복을 새로 알게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덕수궁 미술관과 시립미술관을 좋아합니다. 집에서 가까운 것도 한 이유이지만 좋은 전시회와 그림을 보고 난 여운을 간직한 채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작년 덕수궁 미술관의 근대미술 기획전에서 처음 보았던 김환기의 그림들이 가슴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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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미술관 | |
막 그림을 보기 시작한 초보로서 조금씩 그림의 매력을 알아가는 것은 저에게도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값비싼 건 아니지만 난생 처음으로 그림도 샀습니다. 어쩌면 한동안 제가 준비했던 건 그림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마음을 여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열린 마음을 복대에 숨긴 지갑처럼 단단히 간직한 채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유럽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바로 전 해에 관광지의 일부로서 스치듯 볼 수밖에 없었던 그림들을 다시 만나러, 오직 그림을 보기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