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베르식 상상력, 마치 현실처럼 생생하고 푸르다
다들 그러하듯이 필자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처음 읽은 건 『개미』에서였다. 1991년에 나왔으니까 벌써 19년이 된 책인데 읽을 당시의 흥분과 새로움을 지금껏 기억한다. 1억 년의 지구 생활, 그 기억을 ‘총체적으로 공유’하는 개미 사회로 깊이 파고들어간 저 책은,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시각을 제시해주었다. ‘개별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공동체적인 시각으로 인간 외부에서 바라보는 새로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어 저자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또 한 번의 새로움이었다. 이 책의 인상은 박학다식함, 상상력의 좋은 예, 교양에 대한 환기였다.
쌍방향 사진 찍기로 소통하다
이후 『여행의 책』 『뇌』 『인간』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나무』 『파피용』 『신』 그리고 이번에 나온 『파라다이스』 등 많은 책을 냈지만, 앞선 두 책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내 그 기억으로 남아 있던 이 작가가 온다고 하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남 신세계 문화센터에는 일요일인데도(혹은 일요일이라서) 많은 청중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뒤쪽에 엉거주춤 앉아, 통역이 필요해 두 배로 길어질 수도 있을 강연의 청취를 준비하고 있었다. 작가는 YES24의 작가소개에도 나와 있는 그 소개를 사회자로부터 받으며 등장했다.
‘프랑스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작가로도 알려져 있기도 하며,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로 선정된 바 있는 소설가.’
작가는 아이폰을 들고 있었고, 등장과 더불어 인기를 반영하듯 일제히 터지는 카메라에 호응해 자신을 찍는 청중을 찍었다. 말하자면 그는 쌍방향 소통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찍고, 서로 관찰하는 것. 일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주고받는’ 쪽을 훨씬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작가가 첫인상보다 훨씬 젊어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 실린 작가 사진들이 대개는 실제보다 젊은 것에 비해 이 작가는 똑같거나 더 젊어 보였다. 그건 꼭 나이 문제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말로 생각이 젊은 사람일 거라는 느낌. 마침내 카메라를 내내 들고서, 작가가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에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고 기분이 좋다.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 때문이다. 강연 후에는 질문을 많이 해 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우리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질문을 통해 여러분이 정말 듣고 싶은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늘 강연의 주제가 ‘미래’라고 들었다. 이번 책 『파라다이스』가 바로 미래와 관련돼 있다. 이 책에는 과거와 미래에 있(었)을 법한 일들을 다룬 1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건, 자신의 비전이 남들로부터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려워해서다. 상상이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지금 솔루션을 찾아야 후세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이들 중 하나가 SF작가들이다.
나는 프랑스에서 ‘가능성의 나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네티즌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곳이다.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현실적이지 않거나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겨 스스로 버리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독창적 아이디어를 내는 일에서 두려움을 버리기 바란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이 가장 큰 적이다. 난관이나 위험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긍정적인 미래를 생각해 보도록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삶의 안락함이 증진될 것이다. 선조들과 지금의 삶을 비교해 보면 알 것이다. 기술과 소통이 과거보다 우리 삶을 훨씬 더 안락하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 후손들에게도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안락함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상한다는 것은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해서 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이다.”
이름이 입에 착착 감기는, 이름처럼 사는 작가
거의 전문을 옮기다시피 한 이 강연 내용은 ‘상상력과 미래’에 관한 매우 짧은 이야기였다.
“자, 이제 질문하세요”라는 말이 강연 시작 후 불과 수 분 만에 나오자 강연장에는 웃음소리가 번져 나갔다. ‘설마, 이렇게 짧은 강연이라니!’ 하는, 재미있고 신선하다는 반응들. 누군가가 사람들 앞에 서면 대개 두 가지 행동양상을 보이기 마련이다. 말 많거나 말이 너무 없거나. 그런데 베르베르는 짧게 이야기했지만 말하기를 싫어하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무튼 독특한 캐릭터임은 분명했다. 이름만큼이나.
사실 청중의 첫 질문도 “이름이 입에 착착 감긴다. 이름의 의미와 본인의 이름에 대한 느낌을 들려 달라”는 것이었다. 옳거니, ‘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이름을 발음하며 필자도 느꼈던 바다. 작가의 이름은 베, 나, 르 세 글자로 이루어져 반복되는 느낌이 독특하다. ‘Bernard Werber’라는 이름은 원문에서는 b와 w로 구별되지만 우리 표기로는 모두 ‘ㅂ’이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작가는 ‘Bernard’가 곰과 심장을 의미하며, 동유럽에서 온 ‘Werber’라는 성은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여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아마 전 프랑스에서 이 성을 가진 이는 자신이 유일할 것이라고도 했다. 와우! 아무튼 작가가 작디작은 ‘개미’에 천착한 것이 필연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이름이 그의 이름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 하는.
‘글을 쓰게 된 계기, 영감의 원천’에 관한 늘 반복되는 질문에도 그는 재치 있게 대답했다.
“독창적인 대답을 하기 위해 매번 노력하고 있다(웃음)”고. 대답 끝에,
“상상력은 근육과 같아서 매일 사용하고 훈련해야 단단해진다”는 의미의 말을 한 것이 필자의 뇌리에 진하게 남았다.
또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면 시나리오를 읽는 느낌이라면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느냐고 ‘불어’로 물었다. 자기가 책을 쓰면 격려사 내지 추천사를 써줄 수 있느냐고도 물었다. 이 독자의 ‘불어’로 된 질문은 작가와의 색다른 소통의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는
“늘 영화를 염두에 두고 책을 쓴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우리 친구 지구인>이라는 영화를 감독했고 7월에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주었다. 상상력이 봇물처럼 흐르는 작가로서는 ‘영화’가 당연한 관심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질문자에게 격려사도 기꺼이 써주겠다고 했다.
“상상력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얻는 것”
독자 누구나 궁금해 할 베르베르의 글쓰기 원칙은, ‘쓰는 이가 즐거워야 읽는 독자도 즐겁다’는 것이라 한다. 처음엔 이런저런 욕심을 버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빠른 속도로 쓰는 게 좋다고 했다. 다듬는 일은 그 다음에 하면 된다는데, 작가 자신도 빠르게 써놓았던 글을 10번 이상 다듬어 다시 쓴 적이 있다고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질문은 ‘작가에게 한국은?’과 유사한 것들이었다. 어떤 이는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인상과 부정적 인상을 물었고, 또 다른 이는 작가가 책 속에서 다루는 한국인에 대해 물었고, 또 다른 이는 그야말로 ‘한국의 의미’였다. 워낙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작가인지라, 역으로 작가에게 한국이 어떤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었다. 작가의 대답을 뭉뚱그리면 이렇다.
“나 역시 한국과 한국 사람들이 좋다. 나는 한국에 관광하러 오는 게 아니다. 한국 독자들과의 만남이 좋아서 한국에 온다.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시차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인데, 프랑스를 한국 옆에 옮겨오고 싶을 때는 있었다.(웃음) 내 책 『카산드라의 거울』의 주인공이 한국인 김예빈인데, 한국에 대한 내 관심의 표현이다. 한국에 김 씨가 많다고 들어서 김 씨로 정했다.(웃음) 한국의 첫인상은 역동성, 기상천외한 에너지의 폭발 같은 것이었다. 가까운 일본과 비교하면 훨씬 더 개방적이다. 전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느낌이랄까. 성공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힘든 역사를 교훈 삼아 성장하는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 중 하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를 좋아하는데, 정작 그는 냉담하구나’ 하는 짝사랑의 우려는 싹 가신다. 작가는 한국인 주인공에 대해 질문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다음 작품에 쓸 의향이 없느냐는 다소 엉뚱한 독자 질문에도
“고려해 보겠다”고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우리 독자들이 이 작가를 많이 좋아하는 것이야 소문난 것이고, 작가 역시 한국을 매우 많이 좋아한다는 대답은 모두에게 기분 좋은 것이었다. 예의상 하는 대답이 아니라 진심으로, 강조해 가며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우리 독자의 궁합이 잘 맞는다고나 할까.
자신의 소설 중에
『타나토노트』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유체이탈이나 죽음 경험을 시도해 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티벳 불교에서는 몸을 다른 이가 훔쳐갈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정신이 몸을 떠나지 않고 잘 붙어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웃음) 굳이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하면, 『파피용』에 나오는 우주선을 타고 다른 인류 사회로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곳으로.”
누군가가 ‘상상력을 키우기 좋은 프랑스의 여행지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작가는
“상상력은 장소나 사물보다는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단다. 그건 미래의 소통에 대한 질문에,
“기술은 도구일 뿐이며 사상, 사고방식, 대화가 중요하다”고 한 작가의 답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린 왕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 것과 비슷하다.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으로 온통 감싸인 사람이구나.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을 잘 지켜나가는구나’ 하는.
새삼
『파라다이스』에서 표현된 ‘꽃 생식’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진정한 상상은 생생하게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을 담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식물화해 가는 인류의 진화는 머지않은 미래의 일일 거라는 생생함을 느끼게 했다. 아무튼 그의 책은 언제나 그렇듯 상상력에 거침이 없고, 자유분방하며, 그러면서도 개연적이다. 그건 그가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해법 찾기를 시도하는 SF 작가인데, 늘 인간을 중심에 두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