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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를 만들 구슬과 구슬을 꿸 실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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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지요. 제가 지금 기획하고 있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관점이나 태도를 찾아내는 건 서 말의 구슬이 보배가 되도록 꿸 수 있는 실을 찾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여는 글

누군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책이 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을 보입니다. 항상 인사치레로 처음 물어 오는 말이 “어떤 책을 쓰셨습니까?”인데, 이 질문은 평소 책을 좀 읽는다 싶은 분들만 해 주시면 좋겠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책 제목을 말했는데도 상대방이 알지 못하면 서로 민망한 데다가, 한 술 더 떠 어떤 책인지 설명해 달라고 하면 즉석 브리핑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하거든요. 가수가 모르는 사람 앞에서 내가 이런 곡을 불렀노라고 무반주로 노래를 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하다면 이해하실까요. 여하튼 영 기분이 별로입니다. 나중에라도 작가라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멋있는 직업을 가지셨네요” 정도로 말을 트시기를 권합니다. 그걸로도 인사는 족할 듯합니다.

두 번째로 많은 질문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하다가 제작비 문제로 영화화에 실패한 시나리오를 소설로 각색해 출판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신춘문예 당선이나 문학상 수상, 문예지 추천과 같은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작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에는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방법이 참 다양해졌습니다. 출판사들도 좋은 원고라면 작가의 경력에 관계없이 책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고요.

세 번째로 많은 질문이 바로 어떻게 작업을 하느냐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가 연재할 칼럼이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책이란 좋든 싫든 어려서부터 접하던 것인데 정작 그 내용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오는지 아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때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작가의 생활에 대한 환상과 전형성을 접하고 재미있어질 때도 있습니다. 일반의 통념대로라면 작가들은 모두 두문불출하고 봉두난발인 채로 글을 쓰거나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해야 하며, 밤마다 말술을 들이켜야 합니다. 글을 쓰다 안 풀리면 계획도 없이 홀로 산간오지로 여행을 떠나야 하고,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해서 스스로의 인생을 꼬이게 만들기도 해야 하지요. 물론 작가 분들 중에는 이런 이미지에 들어맞게 작업을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메이킹필름처럼 책의 집필 과정을 담은 북 메이킹 스토리를 연재하자는 채널예스의 제안을 받았을 때 ‘이것 참 재미있겠다’ 싶으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작가마다 창작 과정이 다 다를진대 저 개인의 창작 과정이 또 하나의 선입견을 만들어내게 되지는 않을지, 혹은 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다른 작가 분들에게 누가 되지는 않을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고 미래에 작가 되길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는 장점이 더 크겠다 싶어 연재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모쪼록 제 작업실 공개가 작가의 작업 과정을 상상하며 책 읽는 재미를 더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구상 - 목걸이를 만들 구슬과 구슬을 꿸 실을 찾다

‘어떤 내용의 책을 쓸까?’에 대한 아이디어는 제가 책을 읽거나 생활을 하면서 불쑥 떠오를 때도 있고, 출판사 기획자의 제안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처음 출판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는 제 직관으로 고른 주제가 기획자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지금은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집필하고 출판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거의 언제나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은 이전 작품을 쓰다가 진이 빠졌을 무렵에 떠오릅니다. 책 한 권을 쓴다는 것은 보기보다 뚝심이 필요한 일이어서 절반 이상을 써 나갈 무렵이면 몸과 마음이 지쳐 ‘당장 때려치우고 싶다’는 말이 저절로 새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이런 거 말고 다른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시험 기간에 쓸데없이 책상 정리를 하거나 학습 계획을 세우는 수험생처럼, 마감해야 할 원고에는 마음이 가지 않고 엉뚱한 아이디어만 자꾸 떠오릅니다. 그때 생각해 둔 주제가 집필을 끝내고 다음 작품을 기획할 때까지 남아 있으면 그게 다음 책의 주제가 되는 거지요.

그림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스치듯 처음 하게 된 것도 원고 막바지 작업을 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들여다보았을 때였습니다. 『여행의 기술』 중 호퍼의 그림을 소개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삭막하고 외로운 그림에서 ‘너 혼자만 외로운 게 아니야’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발견한 그의 독창적인 시각에 마음이 움직였지요.

에드워드 호퍼, 「자동판매식당」, 1927

그 후 취재 때문에 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관광하듯 ‘그림 구경’을 하던 저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만나게 됩니다. 제가 본 건 오래 전부터 교과서에서 보던, ‘남들이 다 명화라니까 명화인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해바라기는 그림 속에서 태양처럼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고흐는…… 정말 미쳤었구나. 미쳤으니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구나…….”

멍하니 중얼거리던 저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한 인간의 생애가 벼락처럼 덮쳐 왔고 그 낯선 감동이 지나간 후에는 삶에 대한 피로가 씻겨져 내려가 있더군요.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1888, 런던 내셔널갤러리

그 다음부터는 마치 온 우주가 ‘그림에 대한 에세이를 써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읽는 책마다 그에 대해 영감을 주는 구절을 발견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림에 대해 흥미 있는 감상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때마침 도움이 될 만 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차차 ‘나처럼 그림에 무지한 사람도 그림과 소통할 수 있구나, 내 독자들도 그렇게 할 수 있게 책을 써 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책을 구상할 때마다 작가는 한 개의 자석이 됩니다. 살면서 접하는 수천, 수만 개의 정보들 중 자신이 쓰려고 하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들이 온통 들러붙어 잠시 동안은 그와 관련된 것밖에 보지 못합니다.

 

저의 경우, 이 구상 기간이 무척 긴 편입니다. 이후의 모든 작업의 최소 세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책 속에 구축할 하나의 세계를 머리 속에 만들어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 놓아야 그 세계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을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본격적인 집필에 들어갔을 때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가 그림에 대해 전문 지식을 주는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하지만, 구상 단계에서 정말 어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어쩌면 집필 과정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모아 놓은 이야깃거리들을 관통하는 저만의 관점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지요. 제가 지금 기획하고 있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관점이나 태도를 찾아내는 건 서 말의 구슬이 보배가 되도록 꿸 수 있는 실을 찾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이 실을 찾아내지 못하면 본격적인 집필 과정은 한없이 미뤄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글재주가 좀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막상 책을 집필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대개는 이 실의 존재와 필요성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실은 뭔가 일을 한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민하게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보면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가 혹은 설거지를 하다가 불쑥 마음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꼭 복권 당첨되듯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책에 대한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가 때가 되면 찾아지는 것이지요. 전에는 이것이 찾아지지 않을 때 발을 구르며 초조해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느긋하게 제 할 일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래서 남 보기에 구상 단계의 저는 일을 하지 않고 노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노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한 일이며 꿈에서조차 일을 합니다.

이번 책의 경우에는, 제가 막연한 의미의 파편들 속에서 건져 올린 ‘실’이 ‘그림을 통한 치유와 소통’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이 책을 기획했던 당시에는 아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관점이었지요.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관점이 없이 제가 좋아하는 그림과 그에 대한 감상을 두서없이 적어 모았다면 아마 한 권의 책으로서의 가치는 많이 떨어졌을 것이며, 안목 있는 기획자라면 대번에 출판을 거절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관점이 찾아졌으므로 저는 마음 놓고 자료 수집과 취재에 들어갑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남인숙의 Book Making Story>는 격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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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남인숙

소설가, 에세이스트. 1974년 서울 출생. 숙명여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부터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다. 출간 이후 80만 부 이상이 판매되며 여성 에세이 분야의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한 베스트셀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2004)를 비롯하여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 실천편』(2006), 『여자, 거침없이 떠나라』(2008), 『여자의 인생은 결혼으로 완성된다』(2009), 『여자, 그림으로 행복해지다』(2010) 등 2030 여성을 위한 에세이를 펴내어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 또한 그녀의 여성 에세이는 중국과 대만, 베트남, 몽골에 번역 출간되었고 특히 중국에서는 15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보이며 자국 위주의 중국 출판계에서는 드물게 비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1위 기록을 세우는 등 여자에게 솔직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전해주는 멘토의 지침서로서 언어와 문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동시대 아시아 여성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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