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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과 정치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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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개인적 감성이 아니라 사회적 감성의 문제, 즉 ‘예술’이라는 영역을 사회 전체 속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분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감성적인 것의 배분’이라 옮기는 게 나을 뻔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개인적 감성이 아니라 사회적 감성의 문제, 즉 ‘예술’이라는 영역을 사회 전체 속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륵반가사유상을 감상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것이 만들어지던 삼국 시대에 조각이라는 활동은 사회 속에서 오늘날과 같은 위치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에 그것은 국가 공동체의 종교적, 정치적 활동에 포섭되어 있었다. 예술을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떼어 내어 이른바 ‘자율성’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관습은 실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의 관계는 오늘날 별로 인기가 없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일제 강점기와 1970~1980년대에 벌어진 ‘참여 예술 대 순수 예술’의 논쟁은 결국 감성적인 것의 배분, 즉 미적인 영역을 사회 속에 어떻게 배치하느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붕괴로 마르크스주의가 힘을 잃으면서, 예술과 정치를 연결하려는 시도도 설 땅을 잃게 된다. 둘째는 모더니즘 운동의 종언. 모더니즘 운동이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정치성은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탈정치화 흐름 속에서 급속히 실종되어 버렸다.

『감성의 분할』은 이 실종된 문제의식을 되살리려는 시도다. 따라서 이 책을 이해하려면 우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저자의 관념을 알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랑시에르는 알튀세르의 저서 『자본론을 읽는다』의 집필에 참여했다. 하지만 68혁명에 대한 알튀세르의 무시와 냉소에 실망한 나머지 그는 스승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68혁명에서 대중이 보여준 정치적 자발성을 제대로 설명해 주는 이론이었다. 68혁명이 지향했던 ‘평등성’과 ‘익명성’은 그 이후 랑시에르의 정치사상을 강력하게 규정하게 된다.

알튀세르에게 등을 돌린 그가 의지할 곳을 마련해 준 이는 미셸 푸코였다. 푸코는 사회적으로 확립된 구별(가령 정상/비정상) 일체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그 구별이 결코 절대적인 게 아님을 상기시키려 한다. 『감성의 분할』에서도 푸코의 계보학과 비슷한 전략을 볼 수 있다. 랑시에르는 ‘감성적인 것의 배분’이라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 현재의 예술 체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펼쳐 보여 준다. 이는 감성적인 것의 영역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 속에 배분할 가능성을 상상하기 위한 이론적 준비라 할 수 있다.

세 가지 이미지 체제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정치, 경제, 문화처럼 영역은 달라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사유의 틀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에피스테메’라 불렀다.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을 연상시키는 방법으로 랑시에르는 우리에게 예술사에는 유파나 양식보다 더 근본적인 지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를 이미지의 ‘체제’(regime)라 부른다. 감성적인 것을 사회 속에 배분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는 예술사 속에 이제까지 세 가지 지층, 즉 세 가지 이미지 체제가 존재해 왔다고 말한다. 고대의 윤리적 이미지 체제, 근대의 재현적 예술 체제, 현대의 미학적 예술 체제가 그것이다.

고대의 ‘윤리적 이미지 체제’(regime etique des images)에서 예술은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과 공동체의 에토스와 관계된 활동으로 여겨졌다. 가령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을 생각해 보자. 플라톤에게 시적(연극적) “허구의 문제는 장소들의 배분 문제”였다. 즉 연극 무대는 공적 활동 공간이면서 환영들(fantasms)의 전시 장소였다. 이 동일성은 활동과 공간의 분할을 혼란에 빠뜨린다.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은 검열의 형태로 연극(극시)에 대한 윤리적 통제를 제안하며, 이에 응하지 않는 시인들은 국경선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근대의 ‘재현적 예술 체제’(regime representatif des arts)는 르네상스 이후에 전면화되었는데, 그 출발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예술(극시)에 다른 활동 영역과 구별되는 고유한 장소를 할당한다. 한마디로 이미지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예술’이 된 것이다. 이 고유한 장소 안에서 예술은 “통상적인 검증에서, 그리고 담론들과 이미지들에 관한 진리의 법제에서 벗어난다.” 이로써 예술가는 모방과 허구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시인은 거짓(허구)을 통해 참을 말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대의 ‘미학적 예술 체제’(regime esthetique des arts)는 재현적 예술 체제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예술을 단독적인 것과 동일시하고, 예술을 모든 일반법칙으로부터, (…) 여러 예술들의 모든 위계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체제다.”(랑시에르가 보기에) 이 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술의 행동 방식을 다른 것과 구별해 주던” “모방의 장벽을 산산조각” 낸다는 데에 있다. 과거의 재현적 예술 체제가 현실이 아닌 모방(재현)의 자격으로 다른 활동들과 구별될 수 있었다면, 미학적 예술 체제하에서는 예술이 오히려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자율성을 확보하려 한다.

장르의 분할 혹은 배분

감성적인 것의 배분은 물론 예술과 사회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의 예술 체제 내에 여러 장르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령 고대의 ‘윤리적 이미지 체제’ 하에서 감성적인 것은 글쓰기, 연극, 춤추는 합창 가무단의 세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는 오늘날의 예술 체계와 전혀 다르다(예를 들어 우리는ㅡ시와 소설을 제외하면ㅡ글쓰기를 예술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세 형태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할당된 것이며, 나아가 작품이나 공연은 “정치를 하는 방식” 또는 “사회 구조나 사회 운동을 반영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근대의 ‘재현적 예술 체제’는 모든 예술 형태를 ‘재현’(=모방)이라는 개념 아래 포섭한 후, 그 아래에서 각각의 장르들 사이에 엄격한 위계질서를 구축하려 한다. 이 고전주의적 위계 속에서 성격 묘사보다는 행동 묘사가, 기술(description)보다는 서술(narration)이, 다른 예술보다는 언어 예술이 우위를 차지한다. 같은 장르 내에서도 제재의 품격에 따라 엄격한 위계가 존재한다. 가령 회화는 그 위계가 역사화-인물화-풍경화-정물화-풍속화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식의 배분은 물론 사회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즉 고전주의적 장르 위계는 “공동체의 위계적 비전 전체와 유비”를 이룬다.

현대의 ‘미학적 예술 체제’는 이 고전주의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예술이 무엇이었는지, 예술이 무엇일지에 관한 이념의 토대 위에서 삶의 새로운 형태를 발명”하는 데에 열중한다. 가령 “의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책에 대한 프루스트의 생각, 글을 못 읽는 여자 무용수의 스텝들로 쓰는 시에 대한 말라르메의 생각, 앞 세기의 연재물이나 카탈로그 속의 유행 지난 삽화들과 예술가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실천…….” (미학적 예술 체제에서는 콜라주, 몽타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 발견된 오브제 등 예술이 아니었던 것들이 예술의 체계 안으로 편입된다.)

모더니즘

흥미로운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랑시에르의 견해다. 모더니즘에 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관념은 ‘재현을 파괴하고 매체 자체로 돌아가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 경우 문학적 모더니티는 언어 능력에 대한 탐구, 회화적 모더니티는 형과 색에 대한 탐구, 음악적 모더니티는 표현적 언어로부터 해방된 12음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이를 흔히 예술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라 부른다. 이 관념에 따르면 자신을 탐구하기 이전에 다른 것을 탐구하는 태도는 모던 이전(premodern)의 현상이다. 이 견해를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사람은 클레멘트 그린버그일 것이다.

모더니즘에는 또 다른 패러다임이 있다. 랑시에르가 ‘모던지상주의’(modernitarisme)라 부른 이 관념에 따르면, 예술은 “삶의 자기 형성과 형태”로 규정된다. 이 생각은 멀리 쉴러의 ‘미적 교육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쉴러는 올바른 정치와 입법은 오직 미적 상태, 즉 오성과 상상력이 (현실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유희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진정한 혁명을 위해서는 감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독일 낭만주의의 강령은 훗날 모더니즘 운동의 원천이 되고,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만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정치 혁명의 쇠퇴와 더불어 미적 혁명 역시 실패로 끝났다. 좌초한 것은 존재 미학적 모더니즘만이 아니었다. 재현에서 해방된 순수한 형과 색에 대한 탐구로 이해된 첫 번째 버전 역시 1960년대 이후에 힘을 잃는다. 사람들이 ‘정치의 죽음’과 ‘예술의 종언’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다. 이때 모더니즘의 이론 체계를 붕괴시키며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레싱의 장르 원칙의 붕괴(예술들 사이의 횡단과 융합), 기능주의 건축의 종언(장식과 상징의 부활), 추상화 모델의 붕괴(구상의 복귀), 시간 예술과 공간 예술의 교차(비디오아트) 등.

평등성과 익명성

하지만 랑시에르가 보기에 ‘모더니티’라는 명칭은 모더니즘의 본질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추구하던 감성적인 것의 근본적 배분을 은폐한다. 그가 ‘미학적 예술 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미학적 예술 체제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평등성’과 ‘익명성’의 확장이다. 이는 물론 그의 68혁명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평등성’과 ‘익명성’은 바로 대중과 관련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이 평등의 이념이 나아가 “예술적 ‘모더니티’라 불리는 것의 혼란스러운 범주들을 다시 사유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는다.

가장 널리 퍼진 모더니즘의 도그마는 현대 예술을 추상 운동과 동일시한다. 하지만 ‘재현의 파괴’란 현대 예술이 근대의 예술적 규약을 하나씩 해체해 나가는 과정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재현적 예술 체제의 붕괴는 추상화와 더불어 시작된 게 아니다. 일찍이 사실주의자들은 고전주의가 설정해 놓은 ‘제재의 위계’를 무너뜨리고, ‘기록에 대한 서사의 우위’라는 고전주의 원칙을 전복시켰다. 결국 모더니즘은 이미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한 셈이 된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추상이 아니라 구상에 속한다. 따라서 구상/추상의 구별은 모더니티의 본질과는 별 관계가 없는 셈이다.

아도르노의 『미적이론』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아도르노는 예술의 급진성을 무엇보다도 사회적 분리의 급진성으로 이해했다. 즉 예술의 진정성은 이를 악물고 사회와 소통하기를 거부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대중에게 이해되기 힘든 형식 실험에 몰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환멸만 남긴 정치 혁명 앞에서 모더니즘 예술은 자신의 혁명적 진정성을 보존하기 위해 추악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철저히 거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미학을 모더니즘의 또 다른 도그마로 간주한다.

모더니즘의 두 도그마는 1960, 70년대 추상 운동이 물러가고 팝아트가 전면에 나서면서 위기를 맞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름으로 ‘예술의 종언’을 말하나, 랑시에르가 보기에 죽은 것은 미학적 예술 체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특정한 발현 형태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대립물이 아니다. 장르들 사이의 경계, 범상한 것과 미적인 것의 경계를 급진적으로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미학적 예술 체제 내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두 도그마의 종언을 “실제적인 시간의 단절, 어떤 역사적 시기의 실재적 종언으로 만들 필요는 정말 없었다.”

감성적인 것의 새로운 분배

이제 랑시에르의 기획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논의는 모더니즘의 도그마는 물론이고, 그것의 대항마인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물리친다. 현대 예술은 모더니즘의 종언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극성을 겪은 후 갈 길을 잃어 버렸다. 『감성의 분할』은 이런 상황 속에서 감성적인 것의 새로운 배분을 꿈꾸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꿈꾸는 예술 체제는 어떤 것일까? 유감스럽지만 이 책의 어디에도 그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그의 말대로 이 책은 “어떤 논쟁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들을 재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감성의 분할』은 “예술의 아방가르드적 사명을 다시 주장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정치와 예술의 관계는 여전히 랑시에르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남는다. ‘정치적인 것의 죽음’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달리, 그는 정치란 결코 죽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정치’란 일상적 의미의 그것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것을 가리킨다. 예술이 정치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바로 그 깊은 차원에서 감성적인 것의 배분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다. 『감성의 분할』은 그 새로운 배분의 구상을 위한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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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소련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 구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독일 유학을 떠나기 전 국내에 있을 때에는 진보적 문화운동 단체였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의 간부로 활동했다.

1998년 4월부터 『인물과 사상』 시리즈에 '극우 멘탈리티 연구'를 연재했다. 귀국한 뒤 그는 지식인의 세계에서나마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과 논쟁의 문화가 싹트기를 기대하며, 그에 대한 비판작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으며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파의 새로운 실천적 지향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9년 중앙대학교 문과대학 독어독문학과 겸임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겸직 교수로 재직 하였다.

그를 대중적 논객으로 만든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박정희를 미화한 책을 패러디한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은 ‘박정희 숭배’를 열성적으로 유포하고 있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과 작가 이인화씨, 근거 없는 ‘주사파’ 발언으로 숱한 송사와 말썽을 빚어온 박홍 전 서강대 총장,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옹호한 작품 〈선택〉으로 논란을 낳은 작가 이문열씨 등에 대한 직격탄이다. 탄탄한 논리, 정확한 근거, 조롱과 비아냥, 풍자를 뒤섞은 경쾌하면서도 신랄한 그의 문장은 '진중권식 글쓰기'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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