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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 그로테스크? 제 소설, 위험하지 않아요. 해치지도 않아요.” - 『재와 빨강』 편혜영

‘헌책방에서 느꼈던 클래식한 책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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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소설의 배경은 일상이다. 하지만 그 일상의 어느 공간이, 낯선 외국어 알파벳(이를테면 ‘C’나 ‘W’)으로 치환되어 서술되는 순간, 일상은 낯선 표정을 짓는다. 괴기스럽고 공포를 유발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이렇게 나온다

글을 짓는 작가들의 삶은 비단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창작촌이나, 작업실에 머물면서 온종일 작업에 매진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직장 혹은 가정 등 우리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껴안고도 좋은 글들을 길어 올리는 작가들도 있다. 건조한 일상과 소설의 감수성이 어떻게 하루라는 시간 속에 공존하는 걸까? 그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늘 이런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 소설이 일상에서 보기 드문 광경을 그려 내고 있다면 더더욱.

편혜영 소설의 배경은 일상이다. 하지만 그 일상의 어느 공간이, 낯선 외국어 알파벳(이를테면 ‘C’나 ‘W’)으로 치환되어 서술되는 순간, 일상은 낯선 표정을 짓는다. 괴기스럽고 공포를 유발한다. “일상은 목을 가눌 수 없는 갓난아기와도 같았다. 평온히 엎드려 자는 듯 보이지만 언제나 돌연사의 위험을 안고 있는 갓난아기였다. 제멋대로 두었다가는 목이 꺾이거나 침대에서 굴러 부상을 입거나 얼굴을 침구에 박고 숨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니 계속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p.179) 편혜영의 이야기는 으레 그런 곳에서 벌어진다.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품고 있는 두 권의 소설집이 나왔을 때, 평단과 독자들은 엽기, 잔혹 코드로 그녀를 주목했다.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는 거냐?”는 질문은 그녀의 인터뷰, 혹은 독자 만남의 장에서 단골 질문이었을 테다. ‘실제로 그런 공포스러운 이미지에 많이 노출되어 있는지?’ ‘어렸을 때 잔혹한 체험을 한 적이 있는지?’ 혹은 ‘악취미가 있는지?’ 등등 사람들은 이미지를 통해 소설보다 그것을 주조해 낸 작가를 궁금해 했다.

이지적인 도시형 외모의 진한 마스카라. 사진 속에서는 어쩐지 조금 삐죽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녀가 눈앞에서 곧잘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도 산산이 터져 나갔다. 편혜영 작가는 종종 “재미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재미있는 일’들은 특별한 체험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스쳐 지나갈 법한 일들, 그러니까 흔히 우리가 체념하듯 ‘인생이란 이런 거야’라고 말할 법한 일 혹은 ‘뭐 이런 일이 다 있느냐’ 하고 넘길법한 상황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건져 올리는 작가가 편혜영이다.

굳이 소재를 찾으려고 감각을 킁킁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가 노출되어 있는 일상이 그녀를 상상하게 만든다. 다만 알 수 없는 사건이 품고 있는 비밀스러움, 어떤 공간이 지니고 있는 양면성,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다주는 삶의 모순, 이런 것에 그녀의 상상력은 좀 더 민감하게 발동할 뿐이다. 그러면 일상도 재미있겠다, 싶다. 그래서 이야기가 재미있구나, 싶다.


간절한 욕망이 치욕이 되는 삶의 아이러니

위험에 대한 경고는 언제나 실제로 닥쳐오는 위험보다 많지만 막상 위험이 닥칠 때는 어떤 경고도 없는 법이었다.(p.8)


첫 장편소설을 탈고했습니다. 소회가 어떠신지요. 단편소설과 호흡도 집중력도 달랐을 것 같은데요.

“초고를 빨리 쓰고 오래 고치는 스타일이에요. 이 작품도 4, 5개월 초고를 쓰고 김치 묵히듯 묵혔다가 되씹으면서 고쳤어요. 사내의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저도 힘들기도 했는데, 처음 완성한 장편이라 쓰고 나서 기분이 좋았어요. 제가 단편을 85매 이상을 못썼거든요. 그 이상의 길이를 써냈다는 만족감도 있고요. 단편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장면의 전후 연쇄까지 고민하면서 쓰다 보니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는 느낌도 들어서 재미있었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구나 싶었어요. 다른 느낌, 다른 이미지로도 재미라는 것을 전할 수 있구나 하고요.

“재미라는 게 사실은 웃음이나 유머뿐만이 아니라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긴장 자체도 일종의 재미잖아요. 저도 그런 긴장감을 가지면서 썼어요. 독자들이 사내의 운명을 함께하는 기분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작가님에게 아파트가 매혹적인 공간인가 봐요. 『아오이가든』 때도 그랬고, 여기에도 아파트 공간 특유의 이미지가 있잖아요. 닫힌 문이 늘어서 있는 긴 복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 같은 공동 주거 형태에 살았어요. 제가 기억하는 유일한 주거 형태가 그렇게 복도에 문이 다닥다닥 있던 형태인데, 굉장히 편리하면도 독립적인 공간이에요. 긴 복도에 서 있으면 무섭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남들도 나를 모르니까 안도감을 주기도 하고요.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런 복합적인 이미지 때문에 아파트를 소재로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현실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지점이 흥미롭거든요.”

소설 속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등장해요. 신종플루를 모티브로 쓰셨다고 하셨는데요,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요?

“어떤 잡지에서 본 대지진의 얘기가 시작이었어요. 땅은 가장 견고해야 하는 지반이고 세계인데, 그게 흔들리는 게 지진이에요. 지진 기사가 나오면 과학 잡지를 찾아보는 편인데, 한번은 ‘대지진이 예고된 도시에서는 약한 진동의 지진이 와도 사망자가 발생한다’는 기사를 봤어요. 대지진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진동을 느끼면 ‘이게 대지진이구나!’라며 위험을 느끼고 건물 밖으로 탈출하려고 뛰어내리다가 죽는다는 거예요. 그 점이 무척 흥미롭더라고요.

위험의 경고에 너무 노출된 사람들은 자기가 약간만 위험한 상황에 닥쳐도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다는 거예요. 그런 아이러니가 재미있었어요. 자신이 가장 바랐던 욕망이 치욕이나 굴욕이 되는 상황. 단편을 쓸 때부터 그런 아이러니에 끌렸어요. 한 사람이 살려는 욕망 때문에 결국 더 고독해지는 얘기를 써야겠다는 테두리를 잡아 놓고, 그 사람이 가야 할 세계를 구상했어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면모를 갖춘 도시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전염병이 돌았어요. 전염병이라는 것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전혀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렇게 소설이 시작되었죠.”


『재와 빨강』, 원래 이런 말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이미지의 제목이었어요. 제목은 어떻게 나왔는지요?

“제목은 편집부에서 지어 줬어요. 제가 가제로 삼았던 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웃음) 판매에도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그래서 지어 줬을 때 냉큼,(웃음) 주인공이 처한 세계 자체가 잿빛의 이미지고, 그런 세계 속에서 끝내 타오르는 잔 불처럼 살아남잖아요. 그래서 붉은 잔 불의 이미지가 빨강이란 색채와 대비도 되죠. 두 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 담겨 있는 것도 같아서 저도 마음에 들었어요.”

표지에 장 뒤뷔페 그림도 직접 고르셨나요? 처음 책을 봤을 땐 굉장히 클래식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다 읽고 나니까 색감이나 이미지가 다시 보이더라고요.

“성석제 선배가 표사에 ‘헌책방에서 느꼈던 클래식한 책냄새’라고 쓰셨죠.(웃음) 곤경에 처한 사내가 중심이고, 그 사람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일종의 페르소나가 되는 인물을 표지에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떠올린 게 자화상이었죠. 원래 자화상같이 사람이 정면을 빤히 응시하는 그림을 좋아해요. 자화상을 그리려고 작가가 자기 자신을 얼마나 들여다봤을까 생각을 하면 재미있어요. 보통 자기에 대해서 그렇게 집중력 있게 보지 않잖아요.

장 뒤뷔페 그림은 예전에 본 『아웃사이더 아트』라는, 지금은 절판된 책에서 알게 됐는데, 그림들이 장난스럽기도 하면서 으스스하기도 한 이중적인 느낌이 있었어요. 악의를 가진 아이가 그린 그림 같은 느낌. 몇 가지 안 중에 고른 건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의 피로해 보이는 표정, 그러면서도 약간 익살스런 느낌이 있는 얼굴이 소설의 주인공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광대가 도드라진 얼굴이. 저희 집 식구들이 사실 다 얼굴이……(웃음) 낯설지 않고 친숙한 게 그래서.”


쥐가 무섭지 않은가 봐요. 쥐에 대한 묘사를 하려면 쥐를 자세히 관찰해야 하지 않나요? 그런데 뒤에 참고 문헌을 밝혀 놓으셨잖아요. 마치 이런 고백을 하신 것 같았어요. ‘쥐는 책에서 본 거야!’(웃음)

“참고한 책은 논픽션이에요. 뉴욕의 쥐잡이꾼이 실제 쥐를 잡는 이야기예요. 무척 재미있는 책이에요. 쥐에 대한 특별한 경험은 없었어요. 오래전 비 오는 날 밤에 아파트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파트 현관에 쥐가 비를 피하고 있었어요.(웃음) 그게 실물의 쥐를 본 마지막 경험인데, 아파트 현관 처마, 감지등 아래 서 있는 쥐가 징그럽다기보다는, 마치 텅 빈 연극 무대에 서있는 초라한 배우 같더라고요.(웃음)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쥐 때문에 곤경을 겪었던 경험은 없어요.”

쥐를 제거하면 할수록 실제로는 살아남은 쥐들이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살아남은 쥐들은 한층 강해진다. 본래 멸종에의 위협은 종(種)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바이러스도 지구상의 인간을 다 죽일 수는 없다. 99.99퍼센트가 죽는다고 해도 자연면역을 갖춘 생존자는 반드시 살아남는다. 독성 강한 쥐약이 오히려 생존력 강한 쥐를 양산하듯이, 전염병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쥐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쉽게 소탕되는 종이 아니다.(p.117)

인간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쥐와 인간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어요. 주인공의 삶이 절묘하게 쥐를 닮아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묘했고요. 쥐같이 살아남는 인간. 어떻게 이렇게 연결 고리를 지으셨나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쥐나 바퀴벌레잖아요. 바퀴벌레는 너무 인간하고 동떨어진 것 같아서 쥐를 떠올렸고요. 자기가 굉장히 혐오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죠. 그런 처지에 놓이고 나서도, 주인공은 자신이 쥐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안도감을 갖기 위해 쥐를 또 죽여요. “쥐가 나타날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언젠가 분명히 쥐가 지나갔을 어둡고 좁은 길을 바라보노라면 자신이 거대한 한마리의 쓸모없는 쥐가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쥐를 잡으려고 쭈그려앉아 있는 것은 쥐를 잡을 때만 자신이 전혀 무용한 인간, 쓰레기와 같은 인간, 쥐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p.175) 그런 식으로 역설과 아이러니로 반복되는 게 재미있었고요. 본문에 나오듯이 절대 인간을 멸종시킬 수 있는 바이러스는 없기 때문에, 한때의 풍문처럼 지나가는 전염병 속에서 끝내 살아남는 동물로서 떠오른 게 쥐였어요.”


스스로 확대되는 이미지의 힘

작가님은 짐승의 숨은 속성을 간파하고 있잖아요. ‘사람의 살점을 먹는 개’부터 해서…… ‘원숭이 꼬리를 씹는’ 것도 상상할 텐데(웃음)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무섭다고, 두려움이 더 생기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건 기자님이 더 무서우신 거예요.(웃음) 저는 단지 ‘물어뜯었다’고 썼지, ‘먹었다’고는 하지 않았거든요.(웃음) 제 작품 읽으시는 분들이 이런 선입견이 있어요. 「소풍」이라는 단편에서, 주인공들이 밤에 운전을 하다가 뭔가 치는데, 뭔지는 안 나와요. 그런데 낭독회 할 때, 독자들이 그러시더라고요. ‘사람 죽인 거죠? 사람 죽인 거죠?’(웃음) 그렇게 독자들이 먼저 잔혹한 상황을 상상해요. 그게 이미지가 가진 힘인 것 같아요. 이미지가 사소하게 구축이 돼도, 거기서 독자들이 환기시키는 영역이 넓어요. 간명한 언어로 표현된 이미지가 사람들 머릿속에 계속 확대되더라고요.”

흥미로운 얘기네요. 평소에 오싹한 이미지나 그림들을 즐겨 보실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이미지를 가져오는 건 저였군요.(웃음)

“제가 보고 경험한 이미지도 다른 분들이 경험한 것과 다르지 않을 거예요. 다만 언어로서 표현이 되면 독자들은 자신의 경험에서 이미지를 환기시켜요. 예를 들면 냄새 같은 게 특히 그렇더라고요. ‘어디서도 맡아본 적 없는 불쾌한 냄새가 났다’고 한 줄만 쓰면, 그 문장으로 내가 맡았던 불쾌한 냄새, 예전에 맡았던 가장 불쾌한 냄새를 환기시켜서 이미지가 증폭되는 거예요. 저는 단지 환기하기 쉽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결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쓰기 전부터 결정된 것이었나요? 고민은 없으셨어요?

“초고 당시에는 결말이 달랐어요. 처음에는, 낯선 도시에서 살려고 하는 욕망 때문에 고통을 겪던 사람이 도시를 빠져나오는 얘기를 쓰려고 했어요. 일종의 탈출기. 중간에 노인이 컨테이너 상자에 화물처럼 실어 너를 보내 주겠다고 하고, 주인공이 그 얘기에 매혹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주인공이 화물처럼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떠나서 어딘가에 도착을 해요. 그 박스를 힘들게 열고 나갔는데, 거대한 쓰레기 소각장에 버려져 있는 이미지를 떠올렸었거든요. 그런데 그 결말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세계가 조금 가공되어 있기 때문에, 결말에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독자 분들이 거리를 두실 것 같아서 바꿨어요. 읽는 분들에 따라서는 한 사내가 결국 과거에 자신을 살게 했던 추억들을 다 잃어버린 상태기 때문에, 몰락에 이른 상태로 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또 다른 생존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그 대목에서 또 앞질러 상상했어요. 내가 컨테이너에 들어갔다고 상상하면서, 며칠 동안 그 속에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웃음)

“처음에 초고 쓸 때는, 남자가 상자에서 나오지 못하는데, 상자를 갉아서 문을 열어 주는 건 쥐로 할까?(웃음) 너무 쥐를 써 먹는 것 같아서 그냥 상상만 하고 말았어요.”

그런 상상을 할 때, 감정 이입은 하지 않으세요?

“어느 독자가 그런 질문을 했어요. 주인공 불쌍하지 않으냐고. 농담으로, ‘주인공보다 그렇게 쓰는 제가 더 불쌍해요’라고 했는데.(웃음) 저는 인물과 거리를 두고, 저 사람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는 입장에서 등장인물을 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 힘들다고 저까지 힘들진 않아요. 저는 살 만해요.(웃음)

이 세계에서는 스스로 정체성을 증명할 수가 없어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확인해 주어야 하고, 심지어 결말에 쥐잡이로서 살 때에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야 해요. 그 사람이 쓸모가 있을 때야 정체성을 갖게 되잖아요. 인정을 받지 못한 하수구 사람들은 그렇게 쥐같이 살아가니까요.

등장인물 이름 중 하나도, ‘몰’이라고 지었는데요. 사소한 기억, 과거의 추억, 그런 것들을 다 잃을 경우에, 결국 자기 존재 자체가 희미해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결국에 사라지는 존재의 이름이기 때문에 ‘몰’이라고 지었어요. 사라질 ‘몰’(沒)자로.”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도고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p.169)

해설에서 차미령 평론가가 ‘서사의 미궁’이라고 표현했듯, 아내를 죽인 진범도, 트렁크를 가져간 범인도, 메일을 잘못 보낸 사람도, 몰이라는 자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남자의 처지와 상황을 따라가다 보면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죠.

“이 사람이 아내를 죽였는지 아닌지 많이 궁금해 하시죠. 저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이라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요. 저도 소설에 대해서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게 무엇이다’라고 쓰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게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사건 자체에 좀 매혹을 느껴요.(웃음) 이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범인을 밝혀 주거나 뭔가 명확한 현장을 밝혀 주는 게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았어요. 차라리 숨기는 게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에서 간절히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아내와 원하는 것도 아주 사소한 이야기고, 정작 몰을 찾아가서 나누는 이야기도 별 상황을 진전시키지 못합니다. 이런 무용한 말하기 욕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등장인물은 외국어를 쓰면서 항상 제대로 소통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어요. 그게 말의 속성인 것 같아요. 언제든지 왜곡될 수 있고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고, 아무리 모국어를 하지만, 일정 부분에 있어서는 외국어의 속성이 있는 것 같거든요. 등장인물들이 외국어를 쓰면서 계속 ‘제 말 알아들어요?’ 확인을 하고, ‘저 사람 내 말 알아들었을까?’ 의심을 하는 상황이 비단 외국어를 써서가 아니라 모국어를 쓰는 상황에서도 있는 것 같아요.”


가장 큰 공포는, 나에게만 닥치는 위기

정오였고 사무원들의 점심시간이었다. 그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했으며 동료들과 어울려 오전근무를 했고 뭘 먹으면 좋을지 떠들어대며 식사를 하러 나온 것이었다. 그들의 태평한 태도로 미루어보면 오늘뿐만 아니라 어제도 그제도, 그가 머물던 숙소가 격리되고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다수 발생하고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날에도, 그가 쓰레깃더미로 투신한 날이나 부랑자들에 의해 시궁창으로 던져진 날에도, 하수도에서 다리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쥐나 잡으며 보낸 날에도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p.178)

‘치밀하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는 게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공포’란 무엇입니까?

“재미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서 의아해하는 분이 많아요. 어린 아이들이 악의 없이 무표정하게 개미 죽이는 걸 보면, 섬뜩 놀라는 그런 느낌이 있잖아요. 제가 재미있다고 하면 그런 기분을 느끼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재미는, 그런 이미지를 만들거나, 파괴적인 이미지가 최고조에 이를 때까지 끌고 가는 긴장감을 말하는 거예요. 소설 쓸 때 그런 긴장감이 제 안에 생기기 때문에 그 과정이 재미있다는 의미였고요. 제가 흔히 ‘재미있어요’ 이러면, 어떤 분들은 ‘동물 해부해 보셨어요? 동물 학대하시죠?’ 이런 얘기도 하시는데, 저 그런 악취미는 없고요.(웃음)

저 자신에게만 어떤 위기가 올 때 두려움을 느껴요.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공포가 아니라, 뜻밖에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저에게만 위기로 닥칠 때. 모두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저에게만 위기가 찾아올 때요.
(이를테면?) 전쟁이나 지진 같은 것은 저에게 공포감을 주지 않지만, 저에게만 불행으로 오는 사소한 위기, 그런 것들이 저에게 공포예요. 작년에 두 달 정도 외국에서 혼자 있었는데, 그때 이틀 동안 집 안에만 꼼짝 않고 있었던 적이 있었어요. 이틀 후에 나가려고 보니까 문이 열려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안전한 줄 알았는데, 아주 허술한 상태였다는 걸 알았고, 그때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리뷰 같은 거 많이 보세요?

“책 나오면 찾아봐요. 독자들 의견을 볼 수 있는 곳이 리뷰니까요.”

물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닌데도, ‘무섭다, 끔찍하다’에 치중된 반응을 보면 어떠세요?

“음, 그냥 ‘무서우시구나’ 하고요. 무서우면 어쩔 수 없지.(웃음) 그런데 이런 건 있어요. 첫 번째 책에 특히 그런 반응이 많았어요. ‘무섭고 잔인해요’ ‘임산부는 보지 마세요’ ‘식후에 보지 마세요’ 이런 얘기도 있었어요.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면, 그 안에 있는 얘기가 묻힌다는 것을 그런 리뷰를 통해 알았죠. 사람들이 결국 기억하는 것은, ‘인물들이 무엇을 했을까?’가 아니라, 강렬하게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었던, 자기가 생각하기에 불쾌하고 안 좋은 이미지였어요. 그 이미지만 잔영으로 남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이 이번 소설에 반영되기도 했나요?

“계속 단편 발표하면서 조금 조금씩 바뀌었어요. 첫 번째 책에서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서사와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이미지 자체의 폭발성을 위해서 구축해 나갔어요. 그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서사를 위한 문장들이 더 많이 사용됐어요. 그러다 보니 읽는 분들은 현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어왔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어두운 상상력의 원천이 있다면요?(웃음)

“아까 개미 잡는 아이를 보는 불편한 심정을 얘기했잖아요. 제 작품을 볼 때 드는 그런 불편함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저 사람이 분명 어렸을 때 원체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작품보다 작가의 심리와 성장 배경에 더 관심을 가지세요, 사실 별로 그런 것 없고요. 비평 방법 중에 ‘심리주의 비평’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문학 비평 초기에 작가의 심리에 관심을 둔 비평이 승한 이유를 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 아주 곱게 자랐어요.(웃음)”


엽기라는 말에 현혹되지 마시길

쭉 서울에서 사셨어요. 학창 시절 때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서울에서 태어났고, 살았고, 자랐어요. 학창시절에…… 저는 뭔가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긴장 상태에 놓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100미터 달리기 같은 경우가 그래요. 출발선에서 이기고 싶진 않지만 뭔가 달려야 할 것 같고, 단둘이 뛰기 때문에 저 친구보다 최소한 너무 많이 지고 싶진 않고 그런 기분이 들어서 초조해지잖아요. 그런 상태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도 안 될 텐데……’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어서(웃음) 그래서 학교 다닐 때 뭔가 열심히 나서서 하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글 쓸 때 혹시 습관 같은 게 있으신지요?

“제가 오랫동안 직장을 다니며 쓸 때는, 가장 중요한 게 시간 확보였어요. 시간이 있으면 자동으로 글을 쓸 수 있게끔 했어요. 마감 때는 장소도 안 가리고, 날씨도 안 가리고, 내 방이어도 되고 도서관이어도 되고, 징크스를 만들면 만들수록 글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많아지는 거니까요. 지금도 사실 그런 건 별로 없어요. 다만 한 가지는 책상을 배치할 때, 책상이 벽을 보고 있으면 안 돼요. 대개 책상을 배치할 때 벽면으로 놓잖아요. 벽을 보고 멍하니 있지 못해요. 벽이 눈앞에 있다는 상황 자체가 싫어서.(웃음)”

주인공들은 벽으로 밀어 놓으시잖아요.(웃음)

“개인으로서의 저보다 소설을 쓰는 제가 더 부정적이고 비관적이죠.(웃음)”

직장 생활을 병행하셨을 때는, 어떻게 글 쓰는 시간을 마련하셨나요? 일을 그만두고 나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2008년 10월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직장을 다닐 때는 단편만 썼어요. 마감 때만 썼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면서도 쓸 수 있었고요. 그만두고 나서는 ‘아, 이제 소설 쓸 시간이 많겠구나’ 했는데 노는 시간이 많아졌고요.(웃음) 여전히 소설은 마감 때 써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장편을 쓸 때는 물리적으로 매일매일의 일정한 토막 시간보다는 연속된 긴 시간이 확보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직장을 그만둔 덕에 그래도 그 시간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때 집중적으로 초고를 썼던 것 같아요. 요즘은 보통 일이 없으면, 오전에는 책 읽고, 오후에 원고를 쓰는 편이고요. 마감 때는, 책 읽을 시간 없이 계속 써요.”

소재는 어떻게 얻는 편인가요?

“단편을 쓰면 항상 ‘다음에 뭐 쓰지?’ 고민이 들어요. 쓸게 생기는 순간은 순간이기 때문에 늘 소재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몸을 열어 두면 찰나적으로 떠오르는 인상이나 봤던 이미지, 신문에서 봤던 아주 사소한 사건들이 소설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뭔가 소재를 찾으려고 막 불을 켜고 하지는 않아요.”

이전에 ‘소설 쓰는 데에 위로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작가님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잘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뭔가에 집중하거나 탐닉하거나 깊게 빠져 드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대체로 시큰둥한 스타일인 것 같아요. 뭔가 하나 시작하면 빠져 들어서 몰두하는 친구들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몰두나 집중이 잘 안됐어요.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 말고, 조금 하다 관두고. 제가 유일하게 재미있게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을 읽는 일이었고,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쓰고 싶었고. 지금도 쓰는 일도 읽는 일도 좋아해서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유일하게 집중하고 즐겁게 오랫동안 하고 싶고 잘하고 싶은 일이기도 해서요.”

소설가로 사는 데에 있어서 장단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장점은 제가 독자로 좋아하는 소설가 친구나 선배들과 만나서 늘 놀 수 있다는 것. 단점은 늘 다음은 ‘뭘 써야 하지?’라는 고민을 떠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

혹자는 작가님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흐르고, 작가가 글을 계속 쓰는 한 변화라는 것은 필연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님이 스스로 느끼는 변화의 징조가 혹시 있나요? 어떻게 달라지고 있나요?

“직장을 그만둔 것이 글 쓰는 패턴을 바꾸진 않았지만, 예전에 비해 훨씬 심리적?물리적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 사무실에 출근하던 그 시기에 비해서 요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좀 편해진 것 같아요. 작가가 좀 편해져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웃음) 만약 변화를 찾으라고 한다면 그런 점을 들 수 있겠죠.”

작가님을 설명할 때 붙는 무시무시한 수식어 때문에, 이 책을 두고 망설이는 독자에게 한마디 하신다면요?(웃음)

“이 소설은 위험하지 않아요. 여러분을 해치지도 않고요.(웃음) 제 소설에 붙는 그로테스크나 잔혹, 기괴함, 이런 말들이 계속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보다도 욕망이 좌절된 고독한 인간을 만날 수 있으실 거예요. 엽기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웃음)”

그는 C국에서 계절이 몇차례나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고 그러는 동안 전염병이 들불처럼 번졌다가 이곳저곳에 그을음을 남기고 가라앉는 것을 보았고, 그을린 자리에 멀쩡한 새 풀이 돋아나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럼에도 이내 곧 또다른 전염병의 위협이 예고되는 것을 지켜보았고 예고가 일시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은 오래가지 않았다.(p.235)

신기하거나 기이하게 넘길 법한 뉴스가 들려올 때면, 그 이면을 상상하며 눈을 반짝이는 소설가가 있을 거다. ‘이야기에 취한 듯이 초고를 재빨리 써내고’ 마감 때가 다다라 꾸역꾸역 글을 고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된다. ‘힘들다’는 말을 ‘작가의 말’에 쏟아 내고 싶지만, 이내 시큰둥하게, “나만 힘든가, 뭐” 하고 쓱쓱 지워 버리는 작가. 그래서 이번 소설에는 ‘작가의 말’이 없다. “그래도 안부 인사 정도는 물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안 썼나 싶긴 해요.”

문득 소설 속에도 인용되고 있는 쉼보르카의 시가 떠올랐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대가로 / 스스로를 고스란히 내놓아야 하며 / 인생에 대한 대가로 인생을 바쳐야 한다.’ 인터뷰 중 저자는 이 시가 “시라기보다는 명백한 진실이구나”라고 느꼈단다. 그녀가 소설에 대해 말할 때도 이 시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과장하지 않고 정당하게. 과잉하지 않고 덤덤하게. 밝고 웃긴 것만이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시종 낯설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머금고 있지만, 그녀의 소설은 재미가 있다. 한껏 팽팽해진 긴장이 가져다주는 이야기의 맛이 새롭다. 그리고 책을 덮은 후에도 이내 당긴다. 매운맛이 달콤한 맛보다 식욕을 더하는 것처럼. 그녀의 다음 소설을 기다리는 이유라면,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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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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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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