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같은, 혹은 자연스러운
적잖이 쌀쌀한 날씨,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강남역의 한 오르막길, 그 길 위로 김선우 작가님이 쑥 등장했다. 계단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는, ‘와, 사진이랑 닮았네.’라는, 어처구니없는 탄성을 나지막이 뱉었다. 그새 작가님이 나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손을 내미셨다.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희영이 지오를 처음 만나던 장면이 떠올랐다. 물론 작가님은 지오처럼 빨간 머리도, 화려한 차림새도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 햇빛, 별빛의 반짝임 같은 지오의 모습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인터뷰를 준비하는 동안 신비로운 분위기 물씬 나는 커버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지오의 모습에 작가님 얼굴을 대입해 상상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진과 닮은 작가님이 등장했을 때, 마치 소설 속 지오를 만난 것처럼 묘한 설렘과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일 테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처음의 상상이 순전히 오해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동자 속으로 구름이 지나가는 듯한 시원한 눈빛이었다.”(p.71) 지오처럼 “선한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라기보다, “악다구니 쓸 일 따윈 한번도 없이 자랐”다기보다는, 그런 삶을 지향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자연 같은 삶, 혹은 자연스러운 삶.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에 금세 소녀마냥 웃음을 터트리시며 박수까지 치셨더랬다.
“기쁘다. 진짜로.”
나 역시 ‘기뻤다, 진짜로.’ 내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진짜로’ 닿는 듯한 느낌. 이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웠지만, 작가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문장의 마디마다 쉼표를 찍어 주듯 호응하고, 눈 모양과 입꼬리로 매 순간 반응했다. 말이란, 이렇게 들어주는 것이구나. 그렇게 작가님은 첫 만남에서 가질 수 있을 법한 경계를 순식간에 무장해제시켰다.(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상쾌해. 이분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네.” P.73) 창가에는 은근한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마치고, 또 한참을 이야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바깥이 벌써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캔들 플라워』는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YES24 문화웹진
<나비>에서 연재된 소설이다. 장정일 소설가는 “언젠가 촛불 집회를 소재로 삼은 한국 문학을 정리한다면
『캔들 플라워』는 일착으로 검토되어야 할 소설”이라고 해설을 붙였다. 이 소설은 촛불 정국에 대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다. 촛불이 너울거리던 2008년의 봄, 그날에 우리들을 물들였던 온기, 유대감 그리고 달뜬 마음을 김선우 특유의 감각으로 포착해 낸다. 분명히 느꼈지만 무어라 표현해 낼 수 없는 지점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퓨즈가 나간 채 정전된 방들 몇 개가 할머니의 몸속에서 깜빡깜빡 흔들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P.113) 혹은
“손끝에 그러잡은 마지막 한 줌의 공기마저 풀어놓은 채, 죽는다는 게 이렇게 가벼워도 되나 싶게. 가볍게, 너무도 가볍게.”(P.173)
2008 촛불 집회, 문학적 질문을 던지다
캐나다 깊은 오지 마을에 사는 지오는 자연의 감각을 가진 아이다. ‘여신’들 아래 자유롭게 자란 지오는 열다섯 살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여행을 떠난다. 그녀가 향한 곳은 바로 한국. 이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지오는 서울을 보고 감각하고, 촛불의 밤을 경험한다. 늘 맑은 구름만 떠다니던 소녀의 눈에서 비도 내리고, 바람도 인다. 2008년 촛불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지오와 친구들의 삶을 움직이고 변화시킨다. 비단 이들의 이야기가 아닐 터. 아직 촛불의 감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는 우리들에게 이 소설은 묻는다. 그날의 일이 너에겐 무엇이었니? 너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구체적인 지명과 이름들, 오래지 않은 그날의 풍경들이 연신 겹쳐진다. 그런데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뭘까.
“2009년 1월 용산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도심 한가운데서 그런 일이 함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바로 그전에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건이 있었는데, 거기서 충분히 배울 시간도 갖지 못한 채 갑자기 맞닥뜨린 폭력인 거예요. 빨리 촛불의 기억을 문학 작품으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제대로 기록하고, 기억해 주는 행위가 사회에 누적되어야만 그것이 어느 땐가 우리의 힘으로 전환될 거예요. 너무도 빨리 벌어지고, 잊혀지고, 덮어 버리는 사회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배울 수 있을까? 그 역할은 문화예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촛불이 일렁이던 밤들, 그곳에서 김선우 작가는 나비의 날갯짓을 발견했다. 민들레 꽃씨가 훅, 퍼지는 느낌. 그것은 건강한 가능성이었다.
“민들레 꽃씨가 퍼질 때는, ‘어디에 꽂혀야지.’ 하고 날아가는 게 아니라 휘~ 바람을 타다가, 어딘가 자연스럽게 스미는 거예요. 꽃씨의 목적지라고 하는 것은, 수직적인 방향성이 아니라 수평의 노님이죠. 촛불은 그런 확산의 느낌이었단 말이죠. 그때는 소설보다 시로 노래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어요. 그런데 점점 촛불이 폭력적인 방어막에 갇히게 되었죠. 어이없고 촌스럽기 이를 데 없는 사태들을 보면서, 이것을 낱낱이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 르포가 아닌 문학으로. 어떻게 문학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작가들에게 가까운 과거나 사회 현안을 문학 작품으로 만든다는 것은 부담이 되는 일이에요. 문학적 형상화가 어렵고, 이슈를 작품화한다는 부담도 컸지만 쓰고 싶은 열망도 컸어요.”
촛불과 용산에서 벌어진 불을 보고 발화된 감정이라면, 소설은 좀 더 뜨거웠어야 하는 게 아닐까?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 촛불의 이야기라는 말을 듣고, 높은 온도의 소설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열망이든 분노든 끓어오르게 하는. 헌데 이렇게 화사한 책 표지라니. 민들레 홀씨에게 ‘아모르 파티’(운명에 대한 사랑)를 속삭이는 소녀의 등장이라니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작가는
“정치적인 질문이 아닌 문학적인 질문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적 사안에 대해 비판하는 사회 목소리들이 많아요. 우리는 누구나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런 직설적인 화법들이 문학적 화법을 결코 따라가지 못하는 대목들이 있어요. 직설적 화법은 순간적으로 화풀이는 돼요. 순간 확 끓어오르는 감정은 있지만, 지속되기 어려워요. 말은 강렬해 보이지만, 개인의 내면까지 심도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강도가 떨어져요. 정말 마음을 움직이는 것,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예술의 언어들이거든요.
그래서 문학, 예술이 여전히 인류에게 중요해요. 아무리 많은 것을 먹고 갖고 마셔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적인 힘을 발견하고,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동력이에요. 거리에 있다가 돌아와 혼자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질문되는 언어들이 개인을 변화시킬 수 있어요. 이것이 문학적 언어가 해야 할 몫이고, 저는 가능한 문학적인 상황, 따뜻한 언어로 그날의 사건을 다시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이야기는 단순히 촛불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지오의 친구들의 사연을 타고 교육, 가족, 언론, 강남 등 한국 사회에 갖가지 문제들을 호명해 낸다. 소심한 직장인 희영은 ‘특목고 진학을 위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습지’를 만드느라 매일 야근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연우는 매일의 촛불 현장을 캠코더에 담는다. 싸가지 ‘있는’ 강남녀 수아는 물려받은 건물로, 이미 제 이름을 건 카페를 갖고 있다. 그녀는 매일 저녁, 촛불 시민들을 위한 간식을 싸서 나간다. 철거 지역의 떠돌이 개 사과도 이들과 함께한다. 촛불은 우리 사회에 문제와 이야기들이 꺼내지는 무대가 되었다.
“촛불 집회 자체가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수입 문제 때문에 발화되긴 했지만, 우리들 내부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는지를 발견하게 했던 사건이었어요. 모두가 하나의 의제로 출발했지만, 의료보험, 대운하 등 다양한 의제들이 꺼내졌어요. 사람들은 ‘이건 정말 아니야. 이건 안돼.’ 싶은 것들을 말하기 위해 집회 현장으로 나오는 거죠. 모두가 똑같은 슬로건을 외치지 않는 집회, 촛불은 그런 다양성의 경험이었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사회적 의제에 대해 얘기해야 했고, 그것이 바로 촛불 속에 흐르는 우리들의 욕망, 소망이었던 것 같아요. 다양성의 총체로서의 촛불의 힘!”
비켜줘, 햇볕 좀 쬐게
촛불 집회라는 무대에서 우리가 말하고,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하나됨의 감격, 빛의 아름다움이라는 감상만을 남기지는 않았을 터. 여러 인물들의 입을 통해 소설은 질문한다. 그날 네 안에 생겨난 기쁨의 정체는 뭐였지? 그날 감격의 정체는 뭐였지? 촛불 집회는 우리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를 빨간 색으로 써놓은 그 손팻말을 보는 순간 아, 순간적으로 전율이 일었어. 촛불에 참여하는 건 다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얘기, 그러니까 촛불의 배후는 나라는 거지. (…) 단지 촛불의 배후만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거잖아. 그렇지! 우린 모두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촛불을 든 거라는 말이지.”(p.220)
“결국은 그거예요. 진짜로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 내가 나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길. 문학적 언어로 환기하려는 것이 이것이죠. 우리가 저마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정말로 지배해야 할 것은 타인이 아녜요. 자기 자신이지.”
디오니게네스와 알렉산드라가 만났을 때 대왕 알렉산드라가 디오게네스에게 물었다고 했잖아.
“신이 갖고 싶은 게 뭐냐? 나는 대왕이다. 모두 해주겠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가 대답했다지.
“비켜줘. 햇볕 좀 쬐게.”
하하하. 디오게네스는 두려움이 없었지.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으니까. 자신이 정말로 지배할 만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 거지. 타인이 아닌 것이잖아. 그런데 정치권력은 타인을 지배하려고 해. (…) 타인에 대한 지배욕이 있을 뿐 자기 자신의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면, 자기들이 그렇듯이 남들도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할 것 같아. 정말 한심한 일이지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면 그건 그들의 불행이지 어쩌겠어. “비켜줘. 햇빛 좀 쬐게.”라고 말해 줄 수 밖에.(p.220)
그렇다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김선우 작가는 자기 감각을 깨우고, 삶의 만족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자기 삶에 만족할 수 있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런 삶이 많아져야 해요. 아무리 돈이 많고, 상류층이라고 해도,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행복해질 수 없는 존재죠.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가능성이 많아질 순 있겠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행복감을 느끼는 존재는 유사 이래 없었어요. 우리처럼 물질을 추구하는 방식이 천박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모든 것이 경제적인 가치로 전환되고, 사람이 왜 사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들을 박탈당해요. ‘이게 무지무지 좋아! 이때 가장 행복해!’ 그런 느낌을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이 자꾸만 무뎌지고 나빠지는 것 같아요. 인생의 정말 예쁜 황금기, 온몸과 마음의 감각들이 파릇파릇 살아 있는 시기를 학교 제도 속에서 마모시키고, 자기 가치를 잃어가는 것 같아서 무척 안타까워요.”
지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아이, 지오는 자기 감각을 생생하게 지니고 있는 소녀다.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고, 동물과 자연과 대화를 나눈다. 생명과 자연,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김선우 작가의 문학 세계를 상징화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것은 둘째 치고, 소설 속 지오가 보여주는 삶에의 경탄 (‘아모르 파티’의 생활화!), 상대에게 건네는 위로, 사랑의 표현 방법은 중독될 만큼 사랑스럽다. 대체 이 소녀는 어느 별에서 온 걸까? 지오에 대해 묻자 작가님은 명쾌하게 외쳤다.
“지오는 내 이상형!”
“한국적인 상황에서 저런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잖아요. 어쩌면 현실에서 두 발짝 떨어져 있는 듯한 친군데, 그런 친구를 소설 속에 들여오는 것이 어떨지 고민을 했어요. 너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그래도 지오는 반드시 소설 속에 들여와야겠다고 판단했어요. 이 소녀에게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로망을 자극해 줄 임무를 맡긴 거예요. 생래적인 자연 감각을 지닌 아이가 사회에 여러 면들을 보고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그 충돌 지점만으로도 뭔가 우리를 자극해 주는 질문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현실적인 캐릭터예요. 한국적 교육 상황 속에서 질식하기 이전의 우리들, 꼬마 아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저도 어린 시절에 해님, 별님하고 이야기하고, 바람 아저씨를 부르기도 했어요. 자연을 의인화시켜서 소통하는 능력은 아이들이 무궁무진하게 있어요. 부모님들이 가끔 아이를 보고, ‘천재가 아닐까, 감수성이 남다른 게 아닐까?’ 하잖아요. 우리 속에 살아 있던 감각들, 지오가 가지고 있던 그 감각들을 잃어가는 것뿐이죠. 만약 우리가 지오와 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다면, 지오는 충분히 현실적인 아이가 될 거예요.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하니까 지오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지. 드러나 있지 않을 뿐, 정말 예쁜 우리들의 모습이 제대로 발현된다면, 지오를 닮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2008년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 집회를 외부적인 시선, 아이의 시선으로 보게끔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 속해 있지 않은 인물이 들어왔을 때, 타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가 드러나잖아요. 아주 다채로워지거든요. 우리 사회 내부적인 시각으로 말하기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촛불 집회는 비폭력 평화 시위의 형식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역시 촛불 시위가 2008년이 처음은 아니에요. 하지만, 서울 60만, 전국 추산 100만의 사람들이 함께 한 시기에 촛불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사건인 거죠. 촛불에 대해 써야겠다고 자료와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점점 더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얼마나 기억되어야 하는 말들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더욱, 지오라는 외부자의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일상의 정치 감각이 네 삶을 풍요롭게 할 거야
2008년의 촛불은 꺼졌지만, 지오와 친구들은 그날의 ‘캔들 플라워’를 계속 피워낸다.
“대통령과 정부는 그 뒤로도 변하지 않았지만, 멀리 보아야 하는 길.”(p.364)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치꾼들의 정치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정치는 변화”(p.365)했다. 그들은 계속 움직인다! 지구 사랑 밴드의 ‘초록빛 공명’ 에코 투어 공연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스스로의 당을 만들고, 공터가 있는 건물이면 어디든 자리를 깔고 모여 앉아 촛불을 켜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런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그들은 꿈꾼다.
“당장은 알 수 없어도 깔깔거리며 이렇게 번진 말들이 잔물결 진 수평 어딘가에 닿아서 간질거리는 잔뿌리를 새로 내밀기 시작할 것이었다.”(p.367) 숙자 할머니가 ‘박각시를 부탁해.’라고 꽃을 피워 달라는 부탁을 남긴 것처럼, 소설 역시 독자들에게 부탁하는 것만 같다. 이렇게 자유롭게 이렇게 아름답게 꿈꾸고 꽃피워 달라고. 현실 속 우리는 어떻게 이 ‘캔들 플라워’를 지속시킬 수 있을까?
“마지막의 그 대목들이 참 중요해요. 촛불이 꺼지고 나서, 세상의 이목이 촛불 집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 때문에 우리에게 이상한 피해 의식이 있어어요. 스스로가 갖고 있는 패배 의식. ‘그래서 우리가 결국 뭘 남겼단 말이야.’ 하는 묘한 패배감을 빨리 걷어 내고, 그때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힘을 비축한 것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사실은 변한 게 있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정치라는 것이 여의도에서, 투표장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의 정치라는 게 있다고요. 중요하거나 소소한 어떤 사안에 대해서, ‘이것이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고민하고,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쪽으로 선별하고 취할 수 있어야 해요. 이런 자세가 정치적인 자세라고 생각해요.
일상 속에서 정치 감각을 가질수록 내 삶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알아챘으면 좋겠고, 이미 알아챘다고 생각해요. 촛불의 감각이 그런 걸 배우게 했던 것 같아요. 같은 사안에 호불호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가 좋아하고 끌리는 것들을 저마다 좋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일상의 정치인 거예요. 즐거움에서 강력한 동인이 나오니까, 내가 꽂히는 걸 재미난 방식으로 하면서, 스스로 ‘업’시키며 사는 것. 스스로의 리듬감을 만들며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거예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어른들이 함부로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른들이 가여워지기도 했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막막할까. (…) 세상엔 사람들이 권력이라 부르는 게 있겠지만 권력이 사람의 외로움을 치유한 적이 과연 있을까. 꼬리를 세운 채 소리도 내지 않고 다니는 고양이처럼, 우리도 어른이 되면 소리 없는 괴물이 내면에 생겨나 섬뜩섬뜩 돌아다니게 되는 것은 아닐까.(P.332)
시적인 삶을 네게 권하고 싶어
스스로 리듬감을 갖고, 감각을 깨우며 사는 것. 그것은 시를 닮은 삶이 아닐까? 소설 속에도 끊임없이 시적인 맥락이 흐른다. 시의 언어가 반짝인다. 김선우 작가에게 시인의 삶, 시적인 삶에 대해 물었다.
“저는 소설 쓰기가 참 재미있거든요. 그래도 천성은 시인인 것 같아요. 내가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자각은 늘 하고 살아요. 그래서 시적인 삶이 굉장히 중요하죠. 내가 무뎌지고 있다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를 깨우고, 몸과 마음과 상태가 내가 딛고 있는 이 세계 속에 충분히 열려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며 살아요. 이게 시적인 삶이겠죠.
일상의 속도 속에 묻혀 버리면,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일상인에게 강요되는 많은 의무가 있고, 그 속에 함몰되어 있으면 감각이 무뎌지게 마련이죠. 시인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뎌지는 감각을 깨우며 사는 사람이에요. 새가 울면 ‘우네?’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네, 왜 우네.’ 하고, 울고 있는 상황의 바깥까지도 감각을 열어 두는 존재가 시인이에요. 복잡하게 사는 거지.(웃음)
일기 쓰는 순간을 하루에 몇 번씩 갖는다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시적인 삶이 유지되는 거예요. 시적인 삶이 낭만적인 삶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해야 하는 삶이죠. 이런 것들이 삶의 자세,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학교나 학원에서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지오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 표정, 몸매, 향기가 날마다 달라지는 나무들과는 언제 놀고? 새들과는? 사슴과 너구리, 꽃과 약초들, 곰과 토끼랑은? 수영은 언제 하고 요트는 언제 타고? 산책은? 날마다 밤을 동동 구르게 하는 신기한 모양의 구름들은 언제 바라보지? ‘오늘은 또 어떤 걸 새롭게 알게 될까?’ 하고 아침마다 지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레인보우 마운틴의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이 지오의 가슴 속에 일렁이는 안개처럼 떠오르면서 지오는 눈물이 날 것처럼 레인보우가 그리워졌었다.(P.226)
어쩐지 지오의 삶과 닮아있는 시인의 삶. 궁금했다.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김선우 작가가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김선우 작가는 산책과 독서, 그리고 여행을 꼽았다.
“느리게 걸으며 산책하는 것. 끊임없이 책을 놓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감각을 관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해요. 책 읽기는 스스로에게 무뎌지는 것을 막아주죠. 그런 면에서 작가들은 늘 책과 함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기 관리를 하기가 유리한 것 같아요.(웃음)
느리게 천천히 걸으면서 내 주변의 것을, 관찰하기보다는 대화하는 거지. 이상한 것들과 말하려고 하는 것,(웃음) 주변에 있는 못생긴 돌멩이, 나무, 꽃 이런 것들을 발견하고 대화할 수 있는 감각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재미나게 하는지! 시적인 삶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도 꼭 권하고 싶어. 그것 참 재밌거든!(웃음) 밋밋하고 무딘 생활에 활기를 주고, 재미있는 에너지를 줘요. 그러다 지치면 여행을 가는 거죠.”
이렇게 감각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라면, 혼자 떠나도 혼자가 아닐 터. 어디로 떠나도 대화할 친구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모든 사물과 자연이 새롭게 다가오는 삶, 듣기만 해도 파릇한 생동감이 밀려온다.
“가능하면 여행은 혼자 가는 게 좋아요. 사람은 혼자서 잘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이도 잘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고 못 견디는 사람들은 여럿이 잘 지내거나, 그렇게 보여도 빈 구멍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저마다에게 혼자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럿과도 풍요로울 수 있는 거죠. 문학, 예술이라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고, 질문을 던져주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문학은 스스로 잘 존재할 수 있게, 재미있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연습시켜 주는 거죠.”
소설 속을 부유하고 있는 ‘몸-생명-에너지-자연-여성’의 이미지. 그리고 이야기. 이것들이 그녀의 깨어 있는 감각을 자극하고, 말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시집, 이전의 소설에서도 이야기되었던, 그녀의 커다란 화두. 이러한 언어 세계를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건 정말 기질 같아요. 어려서부터 흙, 바닷물, 강물, 나무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받아들였어요. 나무를 껴안고, ‘심장이 뛰네. 나무가 두근거리네. 따뜻하네. 오늘은 차네.’라고 속삭이고,(“이 말을 듣고 희영이 연우의 감각에 매료되듯, 나도 그녀가 ‘세 배는 더 좋아졌다.’ 사소한 것에 감동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의 마음을 흔든다!” p.69) 흙의 느낌이 매일 달라지고, 바닷물의 느낌이 매일 다른 것을 어렸을 때부터 느끼면서 자랐어요. 바람이 만져지는 바람의 몸, 스킨십하고 있는 느낌들을 배울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겠죠.
가끔 학부모님들이 문학 강연에 와서, ‘시인으로 키우려면 촌에 보내야겠어요.’라고 말씀하시면 맞다고 그래요.(웃음) 어렸을 때 아이들의 감각은 자연 속에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감각의 최대치를 맛보는 것 같아요. 자연 속에 있어야 스스로 자연인 것을 알아요. 인간과 유리된 외부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내가 자연이지, 하는 것을 자연 속에 있으면 알게 되거든요.”
결국 외치고 말았다. “작가님은 지오로군요?!”(웃음) 앙드레 말로가 말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라고. ‘꿈’이라는 단어를 ‘이상형’으로 치환해 본다면, 김선우 작가가 자신의 이상형 지오와 닮아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상형이라면, 오랫동안 꿈꾸고 상상하고 품어낸 인물일 테니까.
“어느 정도는 닮은 구석이 있겠죠. 호기심이 많은 점? 세계가 다양하고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다양한 차이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세계에 수천 개가 넘는 다양한 언어들, 독특한 질감과 울림들이 몽땅 다 궁금한 거예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덜 행복한 까닭은, 다양한 것을 질서로 재편하려는 욕망들 때문이겠죠. 지오의 삶이 아름답고 예쁜 까닭은, 다채로움과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일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즐겁도록!
삶의 다채로움과 다양성. 그것이 김선우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시인이 되기 이전에도 그녀는 시적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지오가 캐나다 오지 마을에서 꿈을 꾸고 살았듯, 작가 역시 강원도 시골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면 아름답게 실현이 가능한 사회”를 상상하며 자랐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 외에는 딱히 문학적인 재능을 보이지 않았단다. 많은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들려 주는 백일장 스토리도 없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광주 사진을 봤어요.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다른 어떤 세계가 있구나, 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엄청난 부조리와 폭력이 이 세계 속에 만연해 있다는 걸 열아홉 살 여름, 갑작스럽게 깨달았어요. 그야말로 얌전하던 아이가 갑자기 난폭해졌죠. 과격한 운동권 생활을 했는데, 그때 오히려 문학적인 기질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면 나아질까.
청년기 특유의 정의에 대한 갈망이 외부적으로 표출되면서, 동시에 어떤 슬로건화된 말들, 직선의 말들에 대한 성찰이 필요했어요. 인간이 절대로 직선의 언어로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런 정치적, 사회 비판적 언어를 구현하는 동시에 아주 내적이고 개인적인 자유를 갈망하게 된 거죠. 그 두 가지가 균형을 맞춰야만 인간이 잘 존재하는 것이겠구나 알게 되었어요.”
그렇게 문예 운동을 시작하고, 동아리를 만들고, 여전히 거리에서 가두시도 쓰면서 스스로 문학 체계들을 만들어 갔다. 1996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을 냈다. 반향이 컸다. 그 시집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칼럼을 권유했다. 한겨레신문에 쓴 독서 칼럼을 보고 소설가 조세희 선생님이 연락을 하기도 했다. (이 대목을 이야기하며, 함께 전율했다.)
“그 칼럼 제목을 아직도 기억해요. <언제나 혁명은 긴급하다!>”(웃음)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소개한 칼럼이었다. 조세희 선생님이 직접 전화까지 하셔서 전한 말씀, 시인 김선우에게 산문을 써 보라는 것.
“처음에는 시인에게 소설을 권하셔서, ‘제 시가 맘에 안 드세요?’라고 물었어요.(웃음) 아마, 시 속에, 제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보셨는지도 모르죠.” 그분의 이야기가 훗날 소설을 쓰는 도중에 두고두고 힘이 되었단다.
두 번째 장편소설, 인터넷 연재라는 첫 경험이 그녀는 참 행복했단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렇게 놀 수도 있구나! 생생하게 느끼게 된 계기였죠. 댓글들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게 이렇구나. 이런 느낌 있죠. 댓글러들의 수준도 굉장했어요. 잘 안 풀릴 때 댓글러들의 글들이 영감을 준적도 있어요. 반짝반짝한 대목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을 수 있었죠!”
결국,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꿈을 자가발전시키라고, 왕성하게 꿈꾸라고 당부하는 이 소설의 저자, 김선우의 꿈은 무얼까?
“잘 깨어 있는 것, 잘 살아가는 것. 최고로 행복한 순간들을 가장 많이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하고 계시죠?”라고 물었더니 곧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최선을 다해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우리 존재들인 거겠죠.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잘 깨어 있으려고, 최고로 재미있으려고 노력하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 없이도 진짜로 재미있는 순간들을 이미 누리고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순간들이 오죠. 문학과 함께라면 훨씬 더 그게 쉬워지고.”
민기가 지오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오야하늘좀봐. 오늘날씨정말좋다! 지금수업중인데, 교실창문으로하트모양닮은구름이지나가고있어. 거기서도보이니? 흩어지기전에얼른한번봐봐. 난학교라못들으니까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구름보면서네가대신들어줘. 볼륨아주크게해놓고!”(p.299) 인터뷰를 마치고 홀로 돌아가는 길, 문득 나 역시 그런 메시지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고, 얼마나 날씨가 좋은지, 구름이 얼마나 예쁜지 문득 알게 해주는 그런 문자.
“『캔들 플라워』를 퇴고하는 동안 제 마음에 피어났던 이런 말들이 이 책을 손에 쥔 당신의 마음속으로 따뜻하게 번져나길 기도합니다.”(‘작가의 말’ 중) 그녀가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온기, 이런 에너지일까? 할 수만 있다면, 이 인터뷰 기록으로도 그날의 온기와 에너지를 아주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