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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먹었던 소핏국의 기억 - 『남한산성』

선짓국 잘하는 집은 전국에 많을 텐데 나는 대구의 어느 집을 잊지 못한다. 대구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앞산 밑의 대덕식당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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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년) 봄에 임금은 강화성에서 나왔다. 임금은 성문 앞에 쌓은 제단에서 적장을 맞아 형제의 나라가 되기를 맹약하고 흰 말과 검은 소를 잡아서 피를 뿌려 하늘에 고했다. 적들은 임금에게 말 피를 마셔서 하늘에 고한 약속을 몸속에 모시라고 요구했다. 놋사발 속에 식은 말 피가 선지로 엉겨 있었다. (…)

- 김훈, 『남한산성』 중에서

신하들은 인조가 상중이라는 핑계로 말 피를 마시지 않기를 간청했고, 다행히 먹지 않고 그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임금이 말 피 한 대접을 먹지 않았던 건 천만다행한 일인 것 같다. 아마도 인조는 수염을 기르고 있었을 터인데, 입가를 흐르던 말 피가 수염을 타고 뚝뚝, 흐르는 장면은 꽤 엽기적이었을 테니까. 또 그 때문에 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엽기적인 동물의 피라면 역시 사슴 피가 으뜸이다. 오래전의 기억이지만, 어떤 선배의 체험담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올 컬러 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는 우연히 지인의 사냥에 따라나섰다고 한다. 원래는 노루라도 한 마리 잡으려는 요량이었는데(그것도 밀렵으로) 실패하고는 숙소로 돌아왔다. 원래 프로그램이었는지, 아니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숙소 인근의 사슴 농장으로 갔다. 농장 주인은 사슴을 잡아 목을 딴 후 콸콸 흐르는 피를 대접에 받아 일행에게 돌렸다. 그때 농장 주인의 대사가 이랬다.

“식으면 굳어요, 쭉 내세요.”

그러니까 핏빛의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영상에 명대사 한마디가 잊히지 않는 것이다. ‘내세요.’란 말은 ‘빨리 마시라.’는 뜻일 텐데 꽤 멋진 이 우리말이 엽기의 수식어가 되니 영 찜찜하기만 하더군.

그렇다. 피는 공기 중에 노출되면 굳는다. 그걸 이용한 대표적인 음식이 사슴 피 칵테일이 아니라 바로 선짓국이다. 저 청진동의 선짓국 한 그릇 안 드신 서울의 중년 아저씨들이 어디 있을까. 밤새 고고장(디스코텍의 원조. 조승우와 신민아가 연기했던 <고고 70>이라는 영화를 떠올려 보시라)이나 디스코텍에서 놀고 난 청춘의 뒤풀이는 바로 청진동에서 이어졌다. 아니면, 늦은 술자리가 새벽까지 이어지면 또 마무리 입가심 소주잔을 기울이는 공식으로 청진동을 찾곤 했다. 얼마나 오래 끓였을까, 골다공증의 흔적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소뼈에 콩나물과 시래기가 들어간 그 선지 해장국은 화학조미료 때문인지, 깔깔한 입맛 때문인지 아리기 짝이 없었고, 그 시린 입에 찬 소주 한잔을 털어 넣으면 새벽이 부옇게 밝아오곤 했다. 그때쯤 박노해 시로 만든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는 노래 구절을 흥얼거리던 386들도 청진동에서 통증 강한 술자리의 최후를 장렬하게 맞기도 했다. 정말로 쓰린 속에 찬 소주를 부으면서 말이다.

선짓국 잘하는 집은 전국에 많을 텐데 나는 대구의 어느 집을 잊지 못한다. 대구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앞산 밑의 대덕식당이 바로 그곳이다. 내 누이는 그 근처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었고, 군에서 휴가 나와 처음으로 누이를 만나러 갔다. 대구역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앞산 대덕식당 쪽으로 가 주세요.”
“소핏국 하는 집예?”
“네? 뭐라고요?”

대구 사람들은 선짓국이라고 하지 않고 ‘소핏국’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대구 사람 특유의 직설 화법이란 게 이런 건가. 하긴 역 앞에 늘어선 택시에 대고 나는 ‘이 차 갑니까?’ 하고 물었고, 그 아저씨는 무뚝뚝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타소.”

그렇지. 타면 되지 뭔 말이 그리 필요한가. 나는 그때 대구 사나이들의 그 말투가 꽤 맘에 들었다. 나는 누이 집에서 머무는 동안 그 식당에 들러 선짓국, 아니 소핏국 한 그릇을 먹었다. 거대한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그 소핏국은 맛이 진했고, 입에 오랫동안 짭짤하고 비린 헤모글로빈의 맛을 남겼다. 비린내는 또 이 집이 잘하는 깍두기로 씻어 내는 풰 맛을 잘 보는 마니아들의 절차이기도 했다.

출처: //www.encyber.com 두산백과사전

군병들은 굶어 죽은 말의 시체를 응달에 펼쳐 놓고 얼렸다. 말의 시체는 얼고 녹으면서 썩어서 먹을 수 없었다. 순청 마당에서 군병들은 갓 죽은 말과 곧 죽을 말을 살폈다. 굶어 죽은 말은 사지가 앙상했으나 대가리와 내장에는 뜯어먹을 것이 있었다. 군병들은 도끼로 말의 사지를 끊어냈다. 대가리를 뽀개고 내장을 발라서 가마솥에 삶았다. 말 누린내에 고양이와 개들이 몰려들었다. 성첩에서 내려온 군병들이 뜨거운 국물에 조밥을 말아 먹고 말뼈를 뜯었다. (…)

훈족과 몽골족의 유럽 침공은 유럽으로서는 그야말로 끔찍한 경험이었다. 유럽에서 이민족이란 원래 저 북쪽의 바이킹이나 노르만을 뜻했다. 보통 수많은 유럽 족속 간의 전쟁은 기본적으로 점령전이었다. 영토를 점령하면, 마구잡이 살육이나 약탈과 방화는 자제해야 했다. 민심을 극단적으로 만들어서는 통치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점령한 땅은 자기 땅이 되므로 그것을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만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훈족과 몽골족은 이런 점령전을 펼치지 않았다. 대신 그 도시나 거점이 되살아나 반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초토화 전술을 썼다. 모든 가옥과 식량은 불태우고, 사람은 도륙했다. 소설『남한산성』에도 청의 병사들이 피난 가는 아이들을 잡아채어 강바닥에 던져 죽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훈족과 몽골족이 지나간 자리는 아스라한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오죽하면 유럽의 어머니들은 우는 아이들에게 훈족의 왕 아틸라가 온다고 말함으로써 울음을 그치는 효과를 얻어 냈다. ‘곶감’이나 ‘망태 할아버지’ 같은 거였다.

훈족과 몽골족은 병참의 필요성을 거의 필요치 않았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자기 먹을 것을 알아서 챙겼다. 그들에게 말린 말고기는 귀중한 전투 식량이었다. 말고기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높은 에너지를 공급했다.

나는 뜻밖에 말고기 세례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이탈리아에 머물던 시기에 광우병 파동이 터졌던 것이다. 그것이 야콥슨 알츠하이머인지, vCJD인지 뭔지 암호 같은 이름으로 언론에 오르내렸지만 시민들은 그냥 ‘미친 소’, 그러니까 이탈리아어로 ‘무카파차mucca pazza’라고 부를 뿐이었다. 우리도 그냥 광우병이라고 부르듯이. 광우병에 걸린 소녀가 나타났고, 시장에서 쇠고기 소비는 뚝 끊겼다. 맥도널드에서조차 돼지고기 햄버거를 팔았다. 돼지고기뿐만 아니라 평소에 그다지 널리 팔리지 않던 육류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말고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탈리아는 원래 말고기를 먹는다. 그러나 대중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슈퍼마켓의 진열대에서 쇠고기를 밀어내기에 이르렀다. 식당도 말고기 스테이크에 말고기 카르파치오(육회)를 만들어 팔았다.

말고기는 뜻밖에도 몹시 부드러웠다. 숙성시키지 않은 고기인데도, 칼을 대면 스르륵 썰렸다. 그 부드럽다는 송아지 안심보다 더 연했다. 폭발적인 질주를 담보하는 울퉁불퉁한 다리 근육이라면 모를까, 안심과 등심은 너무도 부드러워서 ‘말고기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하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말고기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는 이탈리아식 고기 요리법은 이 냄새를 어쩌지 못했다. 만약 말고기가 그 부드러움에 냄새까지 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말젖으로 만든 치즈를 먹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유럽 사람들이 쇠고기를 먹었던 것은 우유를 얻어 치즈를 만들기 위한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은 우리처럼 육용 소와 젖소의 품종을 따로 구분해서 기르지 않았다. 수컷과 젖 짜기가 끝난 암컷을 고기로 먹었으니까. 지금도 유럽은 송아지 고기를 즐겨 먹는다. 그 이유는 딱 하나다. ‘젖을 짤 수 없으니 기를 필요 없이 어렸을 때 잡아먹는다’는 전통적인 쇠고기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일 뿐이다.

이제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최진실 씨가 데뷔 전에 몹시 가난했다는 건 꽤 알려진 사실이다. 연예인 사생활에 둔감한 나 따위의 인간도 그 내용을 일부 알고 있으니까. 그중의 하나가 바로 수제비와 관련된 것인데, 가난했던 시절 물리게 먹었던 경험 때문에 오랫동안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이라는 이야기였다. 연배가 그녀와 비슷한 나도 수제비라면 이골이 날 지경이어서, 굳이 수제비를 먹고 싶다는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사료’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수제비 솜씨는 꽤 그럴듯해서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러나 최악의 수제비 ‘2제’도 떠오른다. 하나는 식은 수제비다. 전분이 진하게 녹아 국물은 매우 진해지고, 수제비는 흐물흐물해진다. 쫄깃한 맛이 없는 수제비는 이미 수제비라고 부르기 뭣하지 않겠는가. 다른 하나는 칼로 썬 수제비다. 어머니는 수제비에 물린 자식들을 위해 묘안을 짜냈는데, 그게 바로 손으로 뜯어내는 대신 칼로 썰어 모양을 달리하는 방법이었다. 밀가루 음식은 물리적 모양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진다. 똑같은 밀가루라고 하더라도 소면과 가락국수의 맛이 다르듯이 말이다. 그 물리적 변화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에 어머니는 다다랐던 셈이다. 그렇지만 칼로 썬 수제비는 그 야들야들한 ‘귀’ㅡ손으로 뜯어 넣을 때 생기는 얇은 부분ㅡ를 잃어버렸다. 도대체 귀 없는 수제비를 어찌 먹으란 말인가. 결국 어머니의 물리적 탐구 생활은 식구들의 항의로 막을 내렸다.

그 시절, 쌀 대신 먹을 수 있는 곡물은 무엇이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젠 건강 때문에 선택하는 모든 잡곡이 바로 그것이었다. 보리를 필두로 수수나 기장, 옥수수, 팥, 콩에 심지어 잡곡군에 속하지도 않는 무, 감자와 고구마가 보리밥과 함께 솥 안에 자리 잡기도 했다. 그중에 나는 조를 아주 좋아했다. 조는 아주 구수하고 독특한 향을 풍겼다. 병아리색의 그 조는 깔깔하게 혀 안에 남아 최후까지 그 맛을 보여주었다. 그 조와 관련해서 나도 최진실 씨의 수제비만큼 가슴 아픈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없이 살아도 자존심 하나는 대단하신 분이셨다. 그녀는 내게 쌀 심부름을 시키면서 꼭 이런 말을 남겼다.

“식구들 먹는 거라고 하지 말고 병아리 모이라고 해라.”

누가 묻기나 한다나. 나는 쌀집 아저씨에게서 봉지쌀을 작은 되로 한 봉지 사면서 묻지도 않은 그 멘트를 날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조를 사오라 주문했는데, 깜빡 그 멘트를 잊어버리셨다. 우둔한 나는 쌀집에서 미처 그 멘트를 날리지 못했는데, 아저씨가 이렇게 물어보았던 것이었다. 딱 한 홉을 시킨 내게 아저씨는 그 용도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좁쌀 요거 갖고 뭐 하게?”

아아, 나는 미련하게도 솔직하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아저씨가 묻기 전에 미리 멘트를 해야 했던 것을……. 나는 땅을 치고 후회했고, 어머니는 쌀집용 다이얼로그를 예행 연습시키지 않은 걸 깨닫고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병아리 모이 줄 거라고 말했제?”

아니요, 나는 그날 어머니의 욕을 엄청 얻어먹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동네 창피하게…….’ 어린 마음에도 나는 속으로 ‘정직한 게 왜 죄가 되나?’ 하고 뇌까리며 억울한 마음에 어머니가 어디 멀리 떠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울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도시락에는 좁쌀이 들어간 하얀 쌀밥이 들어앉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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