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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주 귀한 애야, 알고 있니?” - 『우아한 거짓말』 김려령

자살한 아이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이야기되잖아요. 결국 우리 이야기를 하고자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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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로 지난 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은 활기와 에너지가 넘치던 『완득이』를 읽을 때 상상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하게 했다. 곳곳에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문장들 때문에 중간 중간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p.7)

첫 문장이 마음을 쿵 내려놓는다. 천지는 고작 열네 살짜리 아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작년, 혹은 재작년에 읽었다면 덜했을 텐데, 올해는 유독 이런 문장을 담담히 읽어내기가 어렵다. 아홉 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올 한 해 잃은 것도, 가 버린 것도 많은 한 해였다. 2009년의 끄트머리에서 이 글을 읽는데 몇몇의 얼굴과 그때의 슬픔이 스쳐지나갔다. 아마도 언론을 통해 알려진 비극보다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비극도, 참 많았을 거다. 그 통계에 자신의 몫을 더한, 어린 친구들을 생각해보자면 마음이 시려온다. 개중에 여기, 천지도 있었다.

이 소설은 천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천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가 보냈던 삶의 풍경 속에서 이미 그때를 한참 지나 버린,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천지의 마지막 선택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것은 이 때문이리라. 때문에 천지의 마지막 선택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천지는 떠나기 전에 다섯 개의 봉인 실을 남기는데, 그 안에 작은 메모를 통해 다섯 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독자는 천지의 언니 만지와 함께, 이 실을 찾아가며 어린 소녀의 진심과 비밀에 접근해간다『완득이』로 지난 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은 활기와 에너지가 넘치던 『완득이』를 읽을 때 상상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하게 했다. 곳곳에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문장들 때문에 중간 중간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소재는 가볍지 않지만, 슬픔과 유쾌함 사이를 넘나드는 저자의 문체와 추리소설적 구성이 흡입력을 발휘하고, 독자를 슬픔 속에 함몰시키지 않는다.

『완득이』로 지난 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은 활기와 에너지가 넘치던 『완득이』를 읽을 때 상상했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다른 면모를 상상하게 했다. 곳곳에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문장들 때문에 중간 중간 숨을 고르며 읽어야 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무릎 위에 올려진 책의 표지를 본다. 무지갯빛의 나비가 희미한 손 위로 착지하거나 혹은 날아오르는, 찰나의 순간. 나도 모르게 살짝 호흡을 멈추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표지가 이야기의 느낌을 잘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김려령은 차근차근 말을 이어갔는데, 그녀의 말은 쉼표가 잦은 문장이었다. 의미가 온전히 전해질 때까지 충분히 설명을 한 후에 입안에 머금고 있던 서술어를 뱉어냈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고, 중요한 말은 조금 천천히 말했으며, 어느 때는 아이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내뱉는 말의 풍경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 말의 어구들은 각각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완득이』를 읽으며 느꼈던 천진한 활기와 에너지가 대화하는 내내 그녀에게서 발산되었다. 한편 그 내면에는 천지 같은 어린아이가 웅크렸던 자리도 분명히 있었다. “혹시 내 어렸을 적과 같은 아픔을 지금 품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뜨겁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p.227) 이날, 그녀는 ‘아픔’에 대해서 말했고, 그 아픔을 알기에 타인의 아픔들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아픔들을 공감해 주면서 김려령은 자신의 아픔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 기록이 바로 『우아한 거짓말』이다. 쌀쌀한 바깥 날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36.5도를 감돌던 대화의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말도 없이 떠나간 아이들을 위한 씻김굿

“천지 아빠, 천지 가. 만나면 왜 그랬느냐고 묻지 말고, 그냥 꼭 안아줘.”(p.76)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가끔 어떤 이야기가 제 안에서 저를 눌러요. 당장 빼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오래전부터 뭉쳐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요. 사회현상을 보고 어떤 사명감이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내가 지금 당장 이걸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서 쓰게 된 거예요.

올해는 여느 때보다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았는데요. 이 소설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사건도 천지의 자살이잖아요. 더군다나 천지가 중학생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적이었습니다. 특별히 자살이라는 소재를 선택한 까닭이 있나요?

충격적인 도입부이긴 하지만, 단순히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쓴 소재는 아니에요. 아이들이 마지막 선택으로 자살을 했을 때, 그때 오는 아픔은요, 성인이 자살하는 것과는 또 달라요. 결과적으로는 자살이지만, 한 아이가 결국 거기까지 이르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자살한 아이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도 함께 이야기되잖아요. 결국 우리 이야기를 하고자 한 거죠.

아무래도 청소년 소설이다 보니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독자 서평을 보면, 대부분 그 아픔에 공감하지만 몇몇 독자들은,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염려하기도 하더라고요.

어린 친구들이 생명을 놓는 것이 저는 정말 아파요. 그 슬픔이 제 몸에 체화돼 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그런 고민을 하는 아이들도 아프겠지만, 이미 떠나 버린 아이들을 위로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 친구들, ‘내가 이렇게 아파서 갑니다.’라고 충분히 얘기나 남기고 갔을까 싶었어요. 아무 말도 없이 가 버렸다는 건, 그 아픔들까지 가져가 버린 거예요.

이 소설은 위로하고, 반성하는 씻김굿이에요. 떠난 영혼이 편하게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굿이에요. 그걸 보는 우리들도 울면서 마음을 풀죠. 굿판은 무당 혼자서 벌이는 게 아니에요. 저는 글을 통해 무당의 역할을 한 거고, 죽은 자도, 산 자도 같이 돌아보고자 한 거죠. 아무래도 제 어릴 때 모습이 천지한테 투영이 됐겠죠. 나중에 보니까, 내가 내 아픔을 스스로 씻김굿 해 버렸다는 걸 알았어요. 쓸 때는 많이 아팠지만, 책이 나오고 나니까 어깨가 가볍더라고요. 천지라는 가상의 아이를 만들어서, 그 아이를 통해 내 상처까지 보낸 게 아닌가 싶어요.


천지의 ‘마지막 꿈’이 여운이 많이 남았습니다. 정말 이제껏 일들이 상상이었으면 싶었어요. 천지의 심정, 그 바람은 천지가 되어 보지 않고서야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독자 분들 리뷰를 보니 이 부분에서 많이 울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일 아픈 장면이에요. 그 벨소리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천지에게는 구원의 소리였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 소리가 있을 거예요. 포기하고 싶을 때, 그래도 일어서게 하는 말들. 내가 죽으려고 했어도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에 핑계가 필요한 거거든요. ‘이것 때문에 내가 살았어.’라고 말할 수 있는 핑계.

저한테도 그런 이명이 있는데, ‘잘 지내니. 어때, 괜찮아?’ 이런 거예요. 이모가 그 말을 할 때 고유의 톤이 있어요. 저를 잘 알고 있는 이모가 던지는, 아픈 끝을 지니고 있는 물음이에요. 가장 잘 지내지 않고 있는 순간에 그 말이 떠오르고, 그때 그 말을 잡고 나오는 거죠. 천지한테는 그게 벨소리였고요. 그 부분을 쓸 때 ‘아휴, 그냥 살릴까? 사실 그 덕분에 살았다고 할까.’ 정말 그러고 싶은 거예요. 정말 그렇게도 써봤다니까.(웃음) 너무 아프니까. 그랬다면, 보시는 분들이 ‘이게 뭐냐’고 했겠죠. 그 순간이 작가로서 거리 두기에 실패하는 순간일 거예요.



너 힘든 것 잘 알지만, 그래도 살아라

“저 애들 좀 보세요.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애들로 가득하지요? 근데, 겉은 똑같아 보여도 속은 다 달라요. 다 다른 소가 든 붕어빵들입니다.”
엄마도 일어나 선생님과 함께 섰다.
“애들이 배 툭 갈라서 잠깐 달콤한 맛을 보고, 자신을 낭비할까 봐 겁나요.”(p.161)


소설 속의 아이들은 편부 혹은 편모 가정이에요. 그래서 아이들이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거들거나 어린 나이에 관계하고 있는데 이런 가정을 설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우리는 이런 가정을 편부, 편모가정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오히려 보편적인 가족 구성원의 형태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이런 가정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어.’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상적 가정’이라는 표현이 이상한 거예요. 편모가정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이다, 이것도 이상한 거고요. 구성원의 문제가 정신적 문제로 직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어떻게 아이에게 관심을 두느냐의 문제지요. 할머니랑 3대랑 산다고 외톨이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잖아요. 두 부모가 있는 화연이네 가정은 가장 무난한 가정이죠. 하지만 가장 좋은 가정은 아니잖아요.

문제적 가정이 하나 있죠. 미라네. 정말 문제적 가정인데(웃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건강하죠. 언니와 동생이 똘똘 뭉쳤잖아요. 화연이가 외동딸이면 관심을 쏟아 부을 것 같지만, 오히려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아이들이 더 외로워하고 상처받을 수 있어요. 다른 집 외동들은 어떻다는데, 그런 사회적 기대치가 자기 안에서 무너져 버리니까 더 외롭고 쓸쓸해져요.


완득이는 담임 똥주, 어머니, 아버지, 여자 친구까지, 자신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의 천지는 의지할 데가 없어요. 요즘 친구들은 완득이보다 천지의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아무래도 이 작품이 현실에 더 맞닿아 있어요. 과거 우리 때도 따돌림이 있었죠. ‘왕따’라는 표현만 아니었지. 그런데 그때는 이유가 있었거든요. 몸에서 심하게 냄새가 난다거나, 동네 바보 형이라든가. 우리랑 다른 게 있어서 놀리고 그랬죠. 그렇다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그 애를 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왕따는 원인과 결과가 없어요. 너무 사소한 이유로 따돌림을 당해요. 예를 들어, 뜀틀을 뛴다고 하면, 고꾸라지거나 혹은 매우 잘 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타이밍에 맞춰서 한마디 던졌을 때, 그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합일되면 순식간에 한 친구가 ‘왕따’가 되는 거예요. 이 소설 속에서 미소는 그저 교복 리본을 안 가져온 것뿐이잖아요. 지금 왕따는 과거의 따돌림 현상과 달라요. 매우 차가워요.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 같으면서도 매우 개인적이에요. 스스로도 알거든요. 저 애가 왕따를 당할 만큼 잘못한 건 없다는 걸 알지만, 그 친구가 아니면 내가 왕따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천지 좀 빈티 나지 않냐? 아빠가 없어서 그런가?”
“쟤네 아빠 없어?”
“천지가 어렸을 때 죽었대. 자살했다더라.”
죽었다는 사실에 거짓을 섞어 진짜처럼 꾸며낸 이야기. 나에 관한 황당한 이야기의 시작에는 늘 화연이가 있었습니다.
“너하고, 절교야.”
“미안, 미안, 난 정말 그런 줄 알았어. 천지야, 미안해.”
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거짓 소문은 살을 보태가면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정된 진실은 더디게 퍼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직도 아빠가 자살했다고 믿는 아이가 있을 정도입니다.
“옛날에 나는 그렇게 들었는데.”
그리고 다시 옛날에 그렇게 들었다던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그래도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그런 말이 나왔겠지.”(p.22)


천지를 괴롭게 하는 것도, 직접적인 폭력이 아니라, 제목처럼 ‘우아한 거짓말’들이죠.

교묘한 언어죠. 표현되고 있는 언어, 이면에 숨겨진 언어, 이것이 읽혔을 때, 아픈 거예요. “어머 예쁘네, 좋아 보이네.”라고 말했는데, 내가 그 친구 표정에서 읽히는 건 ‘어디서 이런 걸 샀어.’ 혹은 ‘옷만 좋네.’ 이런 것 같은, 숨겨진 언어가 압박을 주는 거예요. 언어는 말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근육 하나하나가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이면의 진실은 언제나 추측형이에요. “쟤가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는데 (그 말뜻이) 이런 것 같아.”라고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입으로는 분명히 우아하게 말했으니까. 그럼 이거 미치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아이의 영혼까지 꾹꾹 눌러 버린 거죠. 그걸 뽑아내 줄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은 벽이 너무 많아요. 그런 역할을 해줄 멘토가 없죠. 요즘 친구들을 보면 그런 점이 안타까워요. 아주 흔하고 평범한 말 한마디면 돼요. “너 오늘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웃기네, 아냐, 너 안 좋아.” 이런 대화가 없었죠. 미라마저도 문을 잠근 걸 봤을 때, 천지는 마음이 쿡 꺼진 듯한 느낌이었을 거예요.


역시 미라는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게 겁이 났습니다. 잘못을 뒤엎을 만한 능력이 없는 아이가, 설사 능력이 있다 해도 나서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가, ‘너 당하고 있어.’라는 반쪽짜리 진실만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는 게 싫었습니다.(p.97)

미라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어요. 화연과 천지 사이에서 제3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데, 언뜻 보면 천지에게 아는 척, 위로를 해 주는 것 같지만, 천지는 미라 때문에 더 힘들어하잖아요.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요?

이런 관계는 학교가 아니래도 어떤 단체에나 있어요. 하다못해 셋만 모여도 거기 미라가 있어요.(웃음) 제가 살면서 나이 먹으면서 느끼는 게 ‘가까운 사람을 믿지 마라’예요. 매우 안타까운 말이지만, 진짜 나를 힘들게 하고, 나의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곳은 가까운 사람으로부터거든요.

곳곳에서 어른 사회에서 느낄 법한 풍경들을 접했습니다.

어떤 단체에도 적을 둘 수밖에 없는 사회거든요. 그런데 어른들과 달리, 아이들은 아직 사회성이 덜 획득됐잖아요.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어요. 어른들은 더 교활해요. 만면에 웃음을 띄우면서 칭찬해요. 그런데 뒤돌아서면 나는 어쩐지 칭찬을 들은 것 같지 않은 기분이…….(웃음) 어른들의 말은 글러브 낀 화살이라고 할 수 있어요. 권투 글러브로 치면 얼굴은 찢어지진 않지만, 내장 파열이 오죠.

반면 아이들은 직설적이라 화살촉 그대로예요. 그냥 팍팍 꽂히는 거예요. 그나마 그래도 순진한 거죠. 이 친구들은 그래서 감싸기도 좋아요. 자기가 날카로운 만큼, 흡입력이 좋아서 충분히 대화가 가능해요. 아이들은요, 안으면 돼요. 네가 지금 얼마만큼 상대를 아프게 했는지 구구절절 설명 안 해도 알아요. 그런데 어른은 감싸 안으면, ‘얘 또 나한테 당했어.’ 하고 씨익 웃는 경우도 있거든요. 아이들은 그렇게 교묘하지 않아요. 안아주면 펑펑 울어요. 진심의 눈물이 나와요. 그래서 화연이를 끝내 내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안 되죠. 화연이에게 만지 같은 언니가 있다는 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작가의 말에 따르면 ‘내 어렸을 적과 같은 아픔’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천지와 비슷한 아픔이 있었는지요.

같은 경험은 아니고, 비슷한 아픔이죠. 나를 포기하는 데까지 다다르는 아픔과 두려움을 알아요. 그 끝에, ‘누가 날 좀 말려줬으면, 날 좀 불러줬으면’ 그런 살고 싶은 욕망이 있어요. 그게 얼마나 두렵게 오는지 몰라요. 공포는 쉽게 외로움이라는 한 단어로 말할 수 없어요. 지금도 거기까지 간 친구들이 많을 거란 말이죠. 마지막 줄을 당기는 일만 남은 아이들, 그 친구들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살아라. 그게 너무 간절한 거예요.

그걸 표면적으로 드러내면, 흔히 듣게 되는 힘없는 말이 될 것 같아서, 제가 소설에 암암리에 심어놨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언니의 입에서도, 엄마의 입을 빌려서도, 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 덮어두면, ‘결국 봐, 천지도 힘들어서 이렇게 가잖아. 나도 갈 거야.’ 이렇게 되면 안 되니까요. ‘너 그렇게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살아라.’ 하는 거예요.


가족들이 소설을 읽었나요? 반응이 어떤가요?

부모한테도 하지 못했던 말. 나랑 가장 가까운 이모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말이 소설 속에 있어요. 어떤 부분을 보면, 가족들이 아플 거예요. 마흔이 다 된 애가 아직도 이런 걸 담고 있구나, 싶어서. 말로 ‘에이, 미운 것.’ 하는 것과 글로 하는 것은 무게가 달라요. 내가 평소에 화가 날 때 하는 말들이 가족들에겐 보일 거예요. 그걸 알아서 고민도 했죠. 쓸까, 말까. 그런데 글이라는 게, 저를 완전히 빼 버리고는 안 써져요. 제 삶의 바탕에서 모든 이야기가 나오는 거니까. 딸내미가 작가가 돼 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죠.

아직 안 읽으셨나 봐요. 반응은 없어요. 그리고 갓 나온 소설이라, 지금은 못 하시겠죠. 나중에 어떤 자리에서 툭 집어서 얘기하겠죠. 아직도 그게 마음에 있냐고. 저, 따져 보려고요. 그게 잊힐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내 모습이 있어요. 내 이야기를 천지한테 몰아 준 거예요. 아이들을 위로한다고 하니까 좀 거창해진 것 같지만.(웃음) 진정으로 그런 마음이 있었고, 제 아이들에게도 절대로 생명을 놓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스스로를 위로하는 글인 거죠.



독자들의 아픔도 천지에게 같이 보냈으면

‘김려령 작가님 소설’ 하면 재미있고 유쾌한 문장을 빼 놓을 수가 없죠. 계몽적이지 않은 유쾌함, 이런 특징은 특별히 염두에 두시는 건가요, 아니면 성격의 반영인가요?(웃음)

성격도 좀 그런 편이에요. 엉뚱하고, 재미있는 추억이 많아요. 그런 것들도 반영이 되는데, 이번 소설은 좀 달랐죠. 잘못하면 이야기로 독자들 마음을 눌러 버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대사(문체)를 띄운 거예요. 물론 그것도 그냥 농담이 아니라, 분명히 아픔이 있는 말이지만요.

자식을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저도 부모니까 생각해봤어요. 얼마나 찢어지게 아플까. 그런데 내 자식을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써 가면 신파보다 무겁게, 독자들을 압사시킬 수 있겠더라고요. 그건 내가 원래 쓰고자 했던 씻김굿이나 위로, 해소, 이것에 다 반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나치게 오래 간다 싶으면 탁탁 끊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일부러 문체를 띄운 것도 있어요.


『우아한 거짓말』을 쓰면서 가장 신경 쓴 장면은 어디인가요?

마지막 장면이죠. 성인 독자들도 있지만 주로 독자층이 청소년들이니까. 마지막 장면을 작가주의 입장에서 넣을 것인지, 청소년 소설 쓰는 사람의 책임 의식을 가져갈 것인지 고민했는데요. 저는 그 합일점을 진정성에서 찾았어요. 물론 아직 나온 지가 얼마 안 돼서 좀 지켜봐야 하는데…… 굳이 그 장면을 넣은 이유는, 이게 씻김굿의 과정이라고 했잖아요. 그랬다면 보내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단, 그 아픔을 다 가져가게끔. 천지만 한 아픔의 강도를 가지고 있는 독자들도 그 아픔, 천지한테 같이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청소년들은 감정이입이나 전달이 무척 빨라요. 독서 능력도 생각보다 높고요. 전 믿어보기로 했어요.

집필 중 가장 어려운 게 있었다면요?

천지 목소리를 내는 일이었어요. 건조하지만, 아픔과 원망이 담겨있고, 한편 용서하는 마음도 담겨 있어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사자(死者)의 음성이잖아요. 더군다나 1인칭이고. 인물과 작가가 온전히 합이 되어야 해요, 단순히 ‘나라고 치고’ 쓸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사자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비슷한 아픔이 있던 때, 딱 고민한 시기의, 그 목소리를 가져오려고 애를 썼어요. 그게 가장 솔직한 것이지만 힘들었죠.

상처를 헤집는 과정이라 더 힘드셨겠습니다.

헤집어 놨더니, 조금 가벼워졌어요. 트라우마로 남은 것, 조각조각 아픔으로만 남은 것을 ‘그때의 나’ ‘그때의 당신’ 이런 식으로 정리를 처음 해봤어요. 그렇지만 이건 제 자전적 소설은 아니에요. 제 얘기가 그대로 들어가 버리면 ‘거리 두기’에 완벽하게 실패해요. 완전 제 얘기를 썼다면 천지는 완벽하게 피해자고, 그 외의 나머지 인물들은 극악무도하다고 썼을 거예요.(웃음) 그러다 보니 일부러라도 제 이야기는 뺄 수밖에 없었어요.

아이들 생각은 직접 아이를 키우시면서 알게 되신 건가요? 따로 취재를 하신 건가요? 무척 잘 알고 계셔서.(웃음)

키우니까 보이더라고요. 관심을 갖게 되면 보이는 게 있잖아요. 신기하게 제가 뭘 쓰고 있으면 그것과 관련된 정보, 관련된 대목만 눈에 들어와요. 뉴스 헤드라인을 봐도, 소설과 관련 없는 책을 펼쳐도 그 문장이 딱 눈에 들어와요. 그럴 때 희열이 느껴지죠. 내가 필요했던 문장이 이거였구나!(웃음) 아이들은 보이니까 관찰하게 되고, 그렇게 아는 것 같아요.

집필할 때 염두에 두는 독자층이 있으세요? 구체적으로 어느 나이 때 독자들에게 읽히길 바라는지요?

늘 염두에 두는 건 청소년이죠. 저는 독자를 제한하지는 않아요. 어린아이가 성인 소설을 읽는다고 해요. 그걸 막을 수 있나요? 어떤 구실을 두고 못 읽게 해요. ‘야한 거 읽지 마.’라고 해도 이상하고, ‘넌 아직 이해하지 못할 걸, 좀 더 크면 읽어라.’ 해도 이상한 거죠. 만약 충격을 받았거나, 읽고 나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면 얘기를 해줬겠죠. 그런데 아이들은 다른 책 읽듯이 읽어낼 뿐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아이에게도 책 제한을 두지 않고, 둘 수도 없지만, 쓸 때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동화가 있고 청소년 소설이 있는 거니까요. 주 독자층은 청소년을 중앙에 놓고 쓰지만, 독자층이 확대되는 건 제 힘이 아니에요. 독자 분들이 원을 더 키워 주는 거지.

어머니 독자가 많으세요. 아이의 마음을 엿보고 싶어서 읽었다는 서평도 많이 읽었습니다.

엿봤는데 너무 아픈 걸 엿본 거죠. 그리고 이미 알죠. 모를 수가 없죠. 우리가 거쳐 왔기 때문에. 어른이 됐다고 안 아픈 거 아니잖아요. 그래도 한번쯤 꺼내야죠. 그래. 그때 그랬어. 자기 상처일 수도 있어요. 내가 화연이일 수도 있고 천지일 수도 있잖아요. 옛날 그 친구를 만나서 ‘그때 미안했어.’ 이러지는 못 하더라도요. 내 안에서라도 한번 용서를 구하면 치유가 되는 게 있어요. 화연이였다면, ‘내가 그때 진심으로 미안했어.’ 하는 마음. 저는 텔레파시 이런 거 믿어요. 내 안에서 그런 마음이 전파처럼 둥둥 떠서 상대에게 가지 않을까?(웃음) 동화적 상상이긴 하지만요.


작가, 보이는 현실 그 너머를 보는 사람

작년, 『완득이』가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요, 『완득이』 이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무시할 수 없는 게 있죠. 돈이나 명예……. 분명히 그런 게 생겼죠, 그런데 그런 것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는 건 없어요. 똑같아요. ‘무엇을, 왜 변화해야 되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웃음)

뒤늦게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고 들었는데, 늦게라도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한 계기가 있나요?

살림을 하면서 애들을 키울 때, ‘이 애가 커서 뭐가 될까?’ 미래가 무척 궁금한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국문과 수업을 살짝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냥 글이 쓰고 싶었어요. 그게 점점 간절해지더라고요. 전 뭐든 사소해요.(웃음)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황선미 선생님의 추천으로 동화를 썼다고 했는데, 그때 동화의 어떤 점이 작가님의 마음을 끌었나요?

동화는요, 내가 멀리 떠나온 동심, 그런 언어가 아직 나에게 있다는 걸 확인시켜줘요. 그걸 떠올리게 해요. 살다 보면 무더기 속의 성인인 나에게 지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동화를 쓰면서 의인화해 보면 뭔지도 모르면서 신이 나는 거예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험 같은 거. 전 정말 좋아했거든요.

동화는 내 본연의 첫 인간, 첫 마음으로 완벽하게 돌아가게는 못하지만,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요. 그것만으로도 내가 위로받아요. 어른들도 동화를 보면 입가에 미소를 짓잖아요. 뭐가 좋다고 딱 말할 수 없는, 아주 맑은 본능인 거죠. 그렇다고 ‘천사주의’는 아니지만, 그런 동화적 본능은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글쓰기 습관은 어떠신가요? 시간을 정해두고 규칙적으로 쓰는 편이신가요?

성실한 건 아니고, 계약 날짜에 맞춘 것뿐이랄까요.(웃음) 동화 스터디나 모임을 계속 갖고 있는데, 그런 곳을 통해 계속 써야겠다는 마음을 갖죠. 적어도 한 해에 씨 뿌리고, 거둬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런 면에서 작가는 농부와 같죠. 글 쓰는 노동자.

씨앗을 뿌려놓으면 기후나 땅에 따라서 대풍이 될 수도 있지만 흉년이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매년 씨는 뿌려야 되는 거죠. 부족한 씨일 수도 있고, 단단한 씨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자세를 평생 가지고 가고 싶어요. 대신 풍작, 흉작 걱정은 안 해요. 아마 제가 산골에서 커서 이런 비유를 하는 걸 거예요. 그거 보면서 자랐잖아요. 같은 땅에서 이쪽은 풍작이고, 저쪽은 흉작이고, 이거는 인간의 힘으로 될 수가 없어요.(웃음) 그러다 보니 하루에 몇 시간 글쓰기, 이런 건 없어요. 안 써지면 한 달도 그냥 보내는데, 써지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내내 쓰기도 하죠.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요?

일단 경험이 많아야겠죠. 거창한 경험을 말하는 건 아니에요. 타인에게 감동을 주는 건 쿵 하는 폭탄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거거든요. 그리고 작게 생각하는 버릇이 필요해요. 작가는 컵을 그려도 전부 그리는 게 아니라, 표현하고 싶은 그 부분만 그리는 사람이에요. 작은 부분을 잘 보여줌으로써 전체를 볼 수 있게끔 하는 거죠. 일단 넓게 보고,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정수만 뽑아내는 거예요. 그럼 누군가는 유쾌한 부분을 드러내고, 누군가는 찰나를 쓸 수도 있겠죠.

묘사 훈련을 많이 해야 돼요. 사물이나 삶이 묘사될 수 있겠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아픔, 이런 것이 아니라, 소쿠리 하나 놓고 누워 있는 걸 보고 ‘불쌍한 사람이다.’ 딱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더 깊게 들여다보면 다른 게 보일 거예요. 작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기반으로 그 너머의 풍경을 볼 줄 아는 사람인 거죠.


작가님의 그간 소설은 다 풍작이신데요.(웃음) 게다가 첫 수상작은 습작 때 쓰신 거잖아요. 그런 걸 보면 훈련을 참 성실히 한 작가구나 싶어요.

운이 좋은 거죠. 잘하시는 분도 더 많은데. 그렇다고 제 작품을 폄하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그런 분들이 있다는 건 인정해야죠. 그분들보다 제가 운이 좀 좋다 뿐이지 성실함의 차이나 그런 건 아닐 것 같아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지금은 동화를 쓰고 있어요. 약속된 원고를 마치면 정말 오랜 시간 쉬고 싶어요. 여행을 가거나.

어떤 블로거는, 작가님께 ‘한국의 조앤 롤링’이라는 별명을 붙이셨더라구요.

‘한국의 조앤 롤링…….’이라는 소리는 한번 들어봤어요. 북 콘서트 사회자가 그렇게 소개해줬어요. 그런데 관객 분들 표정이, 박수는 치는데 ‘저 사람이 왜?’ 이런 표정이더라고요.(웃음) 앞에 서면 다 보이거든요.

한국의 조앤 롤링이 되고 싶으신가요?(웃음)

조앤 롤링이요? 어휴,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지만, 제 이상향은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살기 힘들 것 같아. 너무 유명하잖아요. 저는요. ‘그냥 그런 작가가 있었어. 그 사람이 글을 쓰면 찾아보진 않더라도 궁금하기는 해.’라고 할 만한. 그런 작가가 되고 싶어요. ‘짠’ 하고 나오면 ‘우와~’ 하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인기는 좀……. 작가는 또 그럴 일도 없지만.(웃음)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김려령 하면 ‘그런 작가가 있지.’ 하는……. ‘누구라고?’ 이러면 너무 슬프잖아요.(웃음)

천지의 엄마는 그야말로 사연이 구구절절한 사람이다. 남편을 잃고, 어린 딸까지 잃었으니 그 마음이 오죽할까. 하지만 소설 속에서 천지의 엄마는 끊임없이 독자들을 위로한다. 자장면 때문에 죽고 싶다는 딸에게 “이런 살인 짜장을 봤나, 내가 그놈의 짜장에 된장을 확 발라 버릴라니까, 걱정말”라고 씩씩하게 얘기하지만, 그럴 때도 저 엄마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인터뷰 중 ‘이제껏 소설 캐릭터 가운데 작가님과 가장 닮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똥주’라고 대답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천지 엄마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 나는 그녀가 떠올랐다. 물론 실제로 자녀를 둔 엄마이기도 하지만, 분명 그녀의 아이들을 다독일 때만큼 간절함으로, 좀 아픈 곳은 웃음으로 감추고 씩씩하게, 그렇게 꾹꾹 눌러 이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 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 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p.111)

‘힘내, 파이팅!’ 가끔은 이 말이 와 닿지 않을 때가 있다. 나도 힘을 내고 싶은데 주저앉아 있는 까닭은 지금 낼 만한 힘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이팅은, fight의 어감 때문인지 단순한 응원구처럼 들릴 뿐이다, 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 삐뚤어진 걸까. 그 말을 건네는 진심이 느껴지는 위로도 (분명) 있지만, 때로 우리는 너무도 쉽게 문장부호를 찍듯이 위로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본다. ‘우아한 거짓말’, 이 말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자연스럽게 읽어냈다는 것은, 내 시간 속에서도 듣거나 혹은 내뱉은 우아한 거짓말이 많았기 때문일까?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말은 달뜬 위로도, 강력한 응원구도 아니다. ‘왜. 무슨 일 있니?’ 힘들다고 토로하는 옆 사람에게 관심을 보여 주는 말, ‘나도 그래.’ 그저 공감해 주는 그 수수한 말들이 훨씬 뜨겁게 다가온다. 그런 말을 건네면 옆 사람은 입도 떼지 못하고 펑펑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땐, 김려령 작가님 말대로 그냥 안아주자. 이럴 땐 교묘한 어른 말고, 제 얼굴 그대로인 아이의 표정으로 품어주자. 결코 우리는 타인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바로 옆 사람의 힘없는 손 정도는 말없이 잡아줄 수 있을, 아주 귀한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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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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