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몰아닥친 추위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날이었다. 오그라드는 몸을 펴 가며 찾아간 그날의 장소는 약도를 건성으로 봐버린 내 잘못으로 엉뚱한 곳이었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건만 그곳이 아닌 것을 확인한 후 드는 좌절감이란, 이곳이 런던도 아니고 겨우 홍대 바닥임에도 ‘얼어 죽을 것만 같은데’라는 엄살에 가까운 말을 내뱉으며 수습이 안 되고 있었다. 허나 알아보니 그날의 장소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얼어 죽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을 ‘얼어 죽을’ 것만 같은 갑작스러운 추위 탓이라 그 잘못을 그날의 날씨에게로 돌리고선 “확, 안아버릴까 보다.”라는 말로 첫 인사를 하는 정혜윤 PD에게 정말로 안겨보고 싶었다는 사실.
2007년 겨울 첫 책
『침대와 책』을 통해 정혜윤 PD를 처음 만났다. 그날의 만남은 내 평생 잊지 못할 멋진 만남이었으며 (
「꽃 같은 그대 정혜윤 PD를 만나다」 보러 가기), 두 번째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가 나왔을 때 북 콘서트에서 만났던 정혜윤 PD는 여전했다. 책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거침없이 풀어내던 모습이라니. 그리고 세 번째 만남,
『런던을 속삭여 줄게』라는 뜻밖의(!) 여행 산문집으로 만나게 된 정혜윤 PD. 나를 보자마자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 있어요?”라며 살짝 섭섭한 소릴 했지만 정혜윤 PD의 책 수다를 안다면 당연히 “그럼요!”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빼곤 다 알겠지. 그건 그녀가 예로 들었던 보르헤스의
“그의 말을 더 잘 들으려고 그의 귀에 가까이 갔다.”라는 문장에 억지로 맞춰보자면, 그녀가 추천하는 책에 관한 정보를 더 잘 알아듣기 위해 그녀의 얘기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하기 때문인데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지루하지 않은 그녀의 책 수다는 사실 중독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다. 누구라도 한 번쯤 쉴 새 없이 늘어놓는 그녀의 책 수다를 듣고 나면 그 밤에 ‘그동안 나는 뭘 읽었던가?’ 하며 좌절하게 되어 버리고, ‘앞으론 정혜윤 PD가 들려주는 책 수다나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설마, 그게 사실이냐고? 못 믿겠다면 당신은 아직도 정혜윤 PD를 알지 못하는 거다. 하지만 뭐,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책 수다를 잘 떠는지, 그리고 얼마나 종알종알 런던과 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길 하는지 지금부터 들어보면 되니깐 말이다.
정혜윤에게 모든 책은 여행기다
왜 런던이었냐고? ‘대뜸’ 그녀는 런던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부터 늘어놓았다. 인사를 하고 뭔가 대화를 나눌 듯하다가 ‘대뜸’ 이야기가 시작된 거다. 어릴 적 장래희망이
『천일야화』에 나오는 셰에라자드여서 학교에 제출할 장래희망을 적는 용지에 언제나 “진정한 승부사-셰에라자드”라는 희망을 적어 선생님들을 뜨악하게 만들었던 그녀, 이날 밤 정혜윤 PD가 들려준 이야기는 “한밤에 누군가의 침실에 불려 들어가, 얼굴에 섬세한 장미가 수 놓인 베일을 드리우고, 열일곱 개의 발찌를 차고 이런저런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바로 셰에라자드, 정혜윤이었다. 그건 그동안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이젠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를 꿈이 되어,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녀만의 신비한 이야기를 소곤소곤.
사실 꼭 런던일 필요는 없었단다. 도쿄와 뉴욕이든 서울이나 파리든 다만 도시의 이름을 빌려 갈망과 호기심과 또 다른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 뿐. 보르헤스의 “그의 말을 더 잘 들으려고 그의 귀에 가까이 갔다.”라는 문장을 읽고 매료가 된 그녀가 그녀와 누군가와의 사이에서 공감하는 일이 생기면 상대방의 얘길 듣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귀를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듯이 그녀도 꼭 한 번 자신의 글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위해 속삭이는 문장을 써보고 싶었고, 그게 여행의 방식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다들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읽고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했다는데 은밀히 말하자면 이 책은 십여 년 전에 필사를 했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의 한 문장에서 영감을 받은 거라 했다.
“괴테가 마흔 살 생일잔치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새벽녘에 로마로 가요. 로마에 있는 원형경기장을 바라보다가 괴테는 포효하는 듯한 소릴 듣게 되죠. 그걸 묘사하는 문장이 있었어요. 사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로마시대엔 이런 일이 벌어졌겠구나!’ 하고 괴테가 상상해서 쓴 문장인 거죠. 그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약간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그때까지 읽은 책들, 역사에서 배운 것, 동화 속에서 읽은 모든 것들이 내 속에서 그냥 뿔뿔이 흩어지고 있어서 괴테의 그 문장이 흩어진 것들을 하나로 응집시키고 나랑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기 때문이에요. 필사를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는데 그 후로 내겐 많은 책, 아니 모든 책이 여행기로 읽히는 것 같아요.”
괴테의 문장을 시작으로 정혜윤 PD의 책 수다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녀가 말하는 중간에 풀어놓는 책들의 이야기와 예로 드는 문장들을 모두 이곳에 써대자면 엄살 조금 보태어 나도 이 자리에서 책 한 권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듯이 그녀는 쉴 새 없이 책 이야기를 해대니깐 말이다. 어쨌든 시작이니 더 들어보자.
이어 그녀는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 시리즈 중 마지막 이야기인
『평원의 도시들』에 나오는 존이라는 19살 카우보이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코맥 매카시야 워낙 대단한 사람이니 그녀가 푹 빠질 만도 하지만 정혜윤 PD는 코맥 매카시가 창조한 19살 카우보이 존에게 빠져 있었다.
“19살의 카우보이 존은 말을 굉장히 사랑하고, 멕시코 국경을 넘어온 창녀를 사랑하는 소년인데 19살 소년의 마음을 80살인 코맥 매카시가 멋지게 표현해냈어요. 그 소년은 말의 귀 한쪽이 약간 살살 떨리는 걸 보고도 말의 왼쪽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알 정도로 말과 완전히 소통하는, 정말 말을 사랑하는 소년이에요. 멕시코 국경 근처 서부 지역을 다니며 들개도 잡고 사랑하는 창녀를 찾아다니죠. 그 장면을 보면 저는 그 도시가 그려지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어져요. 그래서 여행기 최초의 충동이라면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낯선 도시들의 묘사가 상상력을 자극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이스탄불을 여행하기 전엔 오르한 파묵의 소설들을 거의 읽고 갔었는데 『검은 책』이나 『하얀 성』에 보스포루스 해협의 묘사나 사랑하는 여자가 아기 반지를 빠뜨렸던 남자의 심정 같은 글을 너무나 잘 묘사했기 때문에 그곳에 갔을 때 저는 이전에 이곳에 한 번이라도 와 본 느낌을 받았고, 저만의 사연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어제는 잠이 안 와서 『에피 브리스트』라는 1800년대 초에 쓰인 독일의 에피라는 여자의 비극적인 삶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그네 타는 것을 좋아하는 순진한 아이 에피가 자기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공무원 같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남자를 따라 그가 사는 도시에 가서 남자에게 그 도시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니 ‘우리나라 도시에는 세계 사람들이 다 있다. 아이슬란드인, 덴마크인, 심지어는 중국인까지 있어.’ 하니, 깜짝 놀라면서 ‘정말 전 세계적인 도시군요. 우리 도시에선 전 세계 깃발이 마구 마구 날려!’ 하는 장면이 나와요. 저는 에쟇의 비극과는 상관없이 그런 묘사들이 좋았어요. 1800년대 초기의 책이니까 19세기 초에는 이런 일이 벌어졌고, 실제로 여행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 이런 것에서 마음이 흔들렸겠구나! 느끼게 되죠.
우리도 굉장히 많은 도시를 알고 있다고 느끼지만 가보지 못한 곳이 많잖아요. 저는 오로라도 보고 싶고, 폴란드, 노르웨이의 피요르드도 가고 싶지만 자신은 없어요. 볼 수 있을지. 하지만 보고 싶은 마음과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을 잃지 않으려고 책과 나를 연결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느 날 피요르드에 관한 책을 보면 ‘아, 내가 가고 싶은 곳이었지.’ 하고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웬만해선 잘라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보다시피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길 하고 나면 또 다른 책이 그녀에게 다가와 ‘나도 할 이야기가 있어!’ 하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줄줄이 이어 그것도 너무나 빠른 말로 지금 당장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신이 나서 조잘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최초의 영감을 받고 좋아한 책은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지만 수많은 책들이 그녀에게는 여행 아니면 사랑 이야기라는 것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라 했다. 많은 소설에서 읽은 골목과 거리를 상상하는 것이 약간은 그녀의 일인 것 같은 것도 그래서이다.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 책과 여행을 통해 그녀는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했다면 읽지 않거나 쓰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하고 싶었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쓴 책이 바로
『런던을 속삭여 줄게』이다.
“이 글은 아직 런던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 언젠가는 런던에 갈 계획을 갖고 있는 사람들, 런던에 가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을 하는 사람들, 런던에 가지는 못해도 런던을 좀 알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 런던에 가지 못한, 유달리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밤 창가에 날아든 밤새가 그런 것처럼 귀에 대고 속삭여주는 심정으로 썼다.” (프롤로그 중에서)
2~3년 동안 돈을 모아 간신히 휴가를 온 사람들, 일주일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은데 시간도 돈도 별로 없어 대충 밥을 먹고 대충 자면서도 ‘이런 게 내 인생에 또 없잖아!’ 같은 심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에서 쓴 책이란다. 문득 그녀가 내게 사인을 해주며 런던에 가보았냐고, 간다면 누구와 가보고 싶으냐고 물었던 게 생각난다. 책을 읽기 전이라 무조건 갈 수 있다면 가고 싶다는 말을 한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무 생각 없이 멍청하게 말을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 그녀의 의도를 알았으니 런던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그녀의 책을 들고 가서 정혜윤 식의 여행을 한 번 따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런던이었는지를 장장 십 분에 걸쳐 종알종알 이야길 하고 나서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제겐 책을 읽는 저만의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한다. 정혜윤 PD는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읽으면서도 어느 한 문장이 좋으면 동의하고 감탄하는 능력을 가졌단다. 그건 책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라 했다. 책의 어느 장면을 읽고 깊이 공감하고 감탄하며 ‘너무 이해가 돼!’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을 때 대화하고 수다 떠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데 공감하고 감탄할 수 있을 때 그녀는 기뻤단다. 그런 감탄에 대한 기억과 애정이 ‘런던에 가서는 이걸 떠올리면 좋겠어!’와 같은 생각으로 나타나 이 책에 담겼다고 했다.
이탈로 칼비노라고 이 책에도 소개된 이탈리아의 환상 작가가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그 작품이
『런던을 속삭여 줄게』를 쓰는 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단다. 환상을 부여하는 방식을 그 책에서 배운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자신이 사신으로 방문했던 도시들을 쿠빌라이 칸에게 묘사했을 때 칸이 그의 말을 모두 믿은 것은 아니었다.”(이탈로 칼비노 .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발췌)로 시작하는데 책 속에서 칼비노가 묘사하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묘사되는 법이 없다. 그 방식에 정혜윤 PD는 흥분이 되었단다. 어떤 한 도시를 경험했을 때,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관심을 가지며 느끼기 때문이다. 또 J. K.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A Rebours』의 데제생트 공작은 디킨스의 소설을 읽다가 런던을 여행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이끌려 기차역으로 가지만 런던행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들린 영국식 선술집에서 디킨스의 소설과 다를 바 없는 영국적인 면들을 보고 굳이 영국에 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우리가 어떤 장소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매우 염세적인 분석”(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중에서 발췌)을 하고선 그냥 집으로 되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것처럼 정혜윤 PD의
『런던을 속삭여 줄게』는 런던을 가지 않아도 갔다 온 것처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쓴 것이라 했다.
정혜윤 PD는 만약 자신이 런던에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공원엔 가볼 것이라 했다. 런던의 공원은 하나의 숲이다. 무릎을 덮을 정도로 풀들이 자라 있어 특별한 풍경이 없어도 그런 장면만으로도 아름답게 보인단다. 물새 나는 공원의 벤치에는 권태로운 연인이 앉아 있는데 그런 모습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는 거다. 나무가 있어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말이다.
혼자서 두어 번 질문을 던질 틈도 없이 신이 나서 이야길 하더니 그래도 질문을 하지 않으면 혼자 다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맞아, 정혜윤 PD는 그러고도 남을 거야.’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차라리 아무도 질문하지 않길 바랐으나, 그녀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은 독자, 이때다 싶어 그녀가 말을 이어가기 전에 질문을 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원고 분량을 넘긴 터라 독자들의 모든 질문을 남길 수 없음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몇 개의 질문만 간추려본다.
런던이 궁금하니? 런던 대신 정혜윤을 들려줄게
정혜윤 PD의 독서력은 이미 모든 독자가 알고 있는 바, 어떤 노하우가 있기에 우리로선 절대로 기억할 수 없는 책 속의 문장들을 적재적소에서 활용을 하는지. 또 라디오 PD로 여러 군데의 칼럼을 쓰는 칼럼니스트로 무척 바쁜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책을 읽는지 궁금할 것이다. 이 질문에 정혜윤 PD는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책 세 권을 가지고도 한 시간 이상은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데 그래서 질문에 어떻게 답변을 해야 짧게(!) 할 수 있을지(분명 속으론 책 수다를 할 수 있으니 즐거워했을 테지만) 고민이라 했다.
우선 그녀는 책을 많이 산단다. 읽는 것보다 구매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또 사람들마다 자기 몸 중에서 쓸모 있는 부분이 있는데 그녀에겐 바로 엄지와 검지가 그렇단다. 그 이유는 그 사이에 책을 끼울 수 있어 책과 가장 많이 붙어 있기 때문인데 그녀는 화장실에 가서 줄 서 있는 시간조차 아까워 책을 들고 간다. 그때 요긴하게 쓰는 몸이 엄지와 검지 사이다. 또 시간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 것보다는 조각난 시간 사이에서 간신히 실컷(!) 보는 편이란다. 그래서 가끔은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또한 그녀가 책을 기억하는 방법은 사진처럼 장면을 기억한다. 또 사람을 기억하는 과정처럼 책 속의 캐릭터를 기억하다보니 남들보다 많이 기억하는 것 같다 했다. 듣고 보니 공감이 갔다. 하지만 서평을 써두지 않으면 기억력 제로인 나로서는 그림의 떡처럼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요즘 정혜윤 PD는 채널예스에 고전 칼럼을 연재 중이다.(정혜윤 PD의 어느 날…을 알게 되었다) 고전이란 중?고등학교 때나 읽고, 잊고 살던 책들이었는데 요즘 칼럼 연재를 위해 다시 읽다 보니 고전 속에 사람의 삶이 들어 있어 놀랐다고 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마치 고전 속에 나오는 일들과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로는 베르테르가 되어 슬픔에 빠지기도 했고 어느 날은 제인 에어가 되기도 했다. 그걸 우리가 몰랐던 이유는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인생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아주 서서히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거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기억나는 장면 중 대부분의 것들을 당시의 나는 겪지 않았었는데 지금 손가락으로 꼽아보니 그 일들 많은 것을 어느 틈에 겪어냈다는 것이다. 고전에 대해 여러 세계적인 작가들이 정의를 내렸으니까 감히 한마디 덧붙이는 무모한 일을 꿈에라도 하고 싶지는 않고 그저 이 한마디만은 고전에게 바치고 싶다 “위대한 생각이 위대한 사건이다.” 나에게 있어서 고전은 사건이 위대한 책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마훁친 컀간들의 반응이 위대한 책이다.”
그녀는 고전뿐만 아니라 그 어떤 책도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단다. 아무리 지겹고 나와 맞지 않는 책이라 할지라도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 매료될 만한 문장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 외에도 여행을 가서 실망한 적이 없었는지 묻는 질문도 있었고(그녀는 결코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라디오 PD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뭘 하고 있었겠냐는 질문도 있었다. 그녀는 그 질문에 여름과 바다를 좋아하므로 몰디브의 한 리조트의 카페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 또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엔 그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소설이라는 것은 결국 픽션이냐 논픽션이냐는 건데 세상엔 완전한 픽션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행기를 쓰고 싶다고 한다. 세상엔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아서 이집트에 있는 흑과 백으로 된 사막에도 가봐야 하고, 한밤에 문을 열면 별이 코앞에서 인사를 한다는 티티카카 호수에도 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카잔차키스나 디킨스, 보르헤스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해 괜히 미안하다. 그러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꼭 정혜윤 PD와의 만남에 가보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한 질문의 답변을 끝으로 정혜윤 PD와의 만남 후기를 끝낼까 한다.
정혜윤 PD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은
『아우스터리츠』라고 했다. 헤르타 밀러가 노벨문학상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그동안 독일 문학을 너무 안 읽었구나!’ 생각하고선 열심히 헤르타 밀러에 대해 검색했단다. 알고 보니 예전에 독일어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 작품은 누군가 빨리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있었는데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르타 밀러의 작품이었다. 『약속』은 루마니아의 독재 정권을 실제로 겪은 헌터밀러가 그 경험을 책으로 낸 작품이다.
“국경지대 어느 도시에 사는 여공이 주인공인데 그녀는 남성 기성복을 만드는 공장에 다녀요. 그 여공은 옷을 만들면서 그 기성복 주머니에 쪽지를 넣죠. 그 쪽지에는 “나랑 결혼해주세요.”라는 글이 적혀 있어요. 누군가 그 쪽지를 본다고 하더라도 “나랑 결혼해주세요.”라는 이 말은 당신이 누군지 모르지만 나의 전부를 당신에게 맡긴다는 뜻인데 마치 구조 요청 같은 것으로 병 속에 담긴 편지 같은 거예요. 하지만 더 이상 공포스러울 수 없는 말일 수도 있겠죠. 한데 이 책이 아직 번역이 안 되어 그 비슷한 주제를 가진 독일 문학을 찾았는데 『아우스터리츠』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어요.
이 책은 ‘아우스터리츠’라는 남자 주인공 이야기예요. 이야기는 이 사람이 배낭을 메고 벨기에 중앙역에 서 있는 걸로 시작하는데 이게 첫 페이지예요. 저도 여행기를 썼지만 개인적으로 이 책이야말로 최고의 여행기라고 생각해요. 시작은 아우스터리츠가 중앙역에 서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서 뜻밖에도 말을 하게 되고 건축학자인 아우스터리츠는 평범한 시민사회의 번영을 반영한 중앙역이 왜 로마의 판테온 모양 같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요. 그러고 나서 아웃스트리츠의 과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과거 이야기가 그 사람의 내밀한 기억과 맞물려요. 아우스터리츠는 프라하의 유대인인데 유대인 학대가 시작되자 그의 부모가 네 살 반 된 어린 아이를 기차에 태워 보내고 이 기차는 독일 전역 통과한 후 런던에 도착하여 아이를 한 평범한 가정에 입양시키고 아이는 과거를 잊은 채 자라죠. 그러던 어느 날 공사장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두 여자가 자기들이 어떻게 네 살 반에 기차를 타고 와서 입양아가 되었나, 대담하는 내용을 듣는데 아우스터리츠는 그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프라하로 떠납니다. 프라하에 도착한 그는 오래된 고문서를 보관하는 곳에 가서 간신히 몇 년에서 몇 년도의 태어난 아우스터리츠의 성을 가진 모든 사람의 주소를 찾아 마침내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부모에 관한 얘길 듣고 부모의 흔적을 찾게 되는 장면이 나와요. 저는 이런 게 여행이라 생각했어요. 이런 여정은 개인으로서는 다시는 걸을 수 없는 자기만의 길인 거죠.”
우리야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그 자리에서 다 들어보고 싶었지만 시간도 없고 호기심 당겨 책을 구입할 독자를 위해
『아우스터리츠』의 대략적인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을 냈다. 정혜윤 PD는 이 소설이야말로 올해 나온 내면의 섬세함을 제대로 보여준 책들 중에서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올해 읽은 책의 주인공들 중에 가장 좋아한 남자가 아웃스트리츠이고 19살 카우보이 존은 정말 사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말을 마쳤다. 책을 읽기만 했지 좀처럼 책과 연애(!)할 생각을 못 해봤던 나로서는 옆구리 시린 이 겨울에 소설 속 주인공들과 나도 연애나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아무튼 정말 얼어 죽을 것 같았던 그 밤이 따뜻해진 것은 지칠 줄 모르고 책 수다를 해댄 정혜윤 PD 덕분이었음을 부인하지 않으련다. 그녀는 좀 더 따뜻한 이야길 해줬어야 했다고 아쉬워했지만 우린 충분히 달궈져 있었으므로 그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다지 춥지 않았다는 사실. 정혜윤 PD, 그럼 또 언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