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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조금은 다른 신화큐레이터 황경신이 들려주는 신화 이야기

『그림 같은 신화』 황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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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그가 이번에는 그림 속의 신화를 보면서 떠올린 약간은 다른 신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림 같은 신화』. 더불어 지난 7일, 홍대 부근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신화 혹은 신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후, 일종의 부작용(?). 세상이 아주 조금은 달라 보인다. 가령, 최근의 본분을 잊고 앞서 나간 계절을 만날라치면, 기후변화에 일조한 인간의 부덕 따위, 슥삭슥삭 지운다. 그리고선 뻔뻔하게 말한다. “신이 그렇게 했다.” 일종의 결정론(?).



 

나는 이 철 모르는 땡볕 더위를 그렇게 생각했다. 신들이 격한 사랑을 나누나보다. 예열도 않고 바로 격정에 빠졌나보다. 에로스가 대체 누구의 가슴에 화살을 꽂은 거야. 이렇게. 그래서 뜨겁다는 말씀.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연의 산물이며, 어떤 의미나 목적도 없이 진행된다는 비결정론 혹은 우연론은, 벼락 맞을 짓이다. 감히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다니.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그렇다. 신화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은 신화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화를 다룬 그림이나 이미지, 혹은 신화를 인용한 텍스트와도 접한다. 아니, 어쩌면 우리 자체가 신화다. 살아있음으로 인해. 수억 분의 일이라는 확률을 뚫고 당신과 나는 만나게 된 것이 아니던가. 이보다 격한 우연이, 이보다 아름다운 신화가 어디 있던가.

그는 어쩌면 신(神)이다. 황경신. 물론, 이름 끝에 있는 신이, 그 신(神)인지는 모르겠다. 너무나도 잡스럽고 사소해서 거대한 잡지, 『페이퍼(PAPER)』를 아는 이들에겐 익숙한 이름. ‘페덕후’(혹시 그들이 스스로를 다른 용어로 칭하지는 모르겠다. 말하자면, 페이퍼 마니아 혹은 페이퍼 오덕후)에게 황경신은 神일 것이다. 또는 알싸한 감성의 결로 만든 황경宸(집, 대궐, 하늘). 아니, 반대로 보자. 독자들이나 팬들을 위한다는 입장이라면, 황경娠(하인) 또는 황경臣(신하). 아, 괜히 다른 사람 이름 갖고 떠벌리지 말고 본론으로.


그가 이번에는 그림 속의 신화를 보면서 떠올린 약간은 다른 신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림 같은 신화』(황경신 지음/아트북스 펴냄). 더불어 지난 7일, 홍대 부근에서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다. 이름하여, ‘황경신과 함께하는 ‘조금 다른 신화 이야기’.

당신을 위해 그 신화 같은 만남이 이뤄진 현장을 스케치했다. 슬쩍, 어떤 신들이 함께 현장을 노닐었는지 훔쳐봐도 좋겠다. 그래, 황경신이 그랬던 것처럼, 우선 답인사를 하고 시작하자. “네, 안녕하세요? 당신의 편지가 무사히 우리에게 닿았어요.” 참, 이날은 책을 통해 만난 16명 가운데 4명이 특별 간택됐다. 메데이아, 미노타우로스, 판도라, 메두사.

공통점이 뭐냐고? 그렇지 않아도, 황경신이 말한다. “오해를 많이 받았던 주인공들이에요. 그들 얘기를 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생각을 하다 죽었을까.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던 이들이라고 생각하고 4명을 골랐어요.”

자 그럼, 우리는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까. 신화로 가는 열차에 오르라. 오라잇~ 참,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여기엔 에릭, 앤디, 김동완과 같은 신화 멤버는 없다. 혹시 그걸 기대하셨다면, 내리시고~ 자자, 조금은 다른 신화큐레이터 황경신이 안내하는 조금 다른 신화의 세계로~

사랑을 몰랐던 자의 비극, 메데이아

「메데이아」(프레더릭 샌디스, 1866~1868)

“메데이아를 예쁘게 그린 화가들은 없어요. 애도 죽인 나쁜 여자라서. 사악해야 한다고 그림을 그린 남자 화가들은 생각한 것 같아요. 이 그림도 그런 느낌이 좀 들죠? 얼굴선이나 코 라인을 보면 여장 남자 같은 그림 같지 않아요? 마법의 약을 만들고 있는 장면인데,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죠.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느낌.

목에 걸린 빨간 목걸이 같은 것도 불안한 감이 있죠. 운명의 끈? 저게 뭘까요? 신화 그림을 구석구석 보면 (화가들이) 의미를 숨겨놓은 것들이 많아요. 정확하게 알 필요는 없지만, 상상을 해보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왜 저걸 그려 넣었을까, 하고.

메데이아의 아버지는 콜키스의 아이에테스 왕이고, 그녀는 즉 왕녀예요. 고귀한 신분의 부러울 것이 없었죠. 아이에테스는 헬리오스(태양의 신)의 아들이고. 어쨌든 메데이아는 마법의 힘을 갖고 있는데, 그 힘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게 되는 여자예요.”


「이아손과 메데이아」(존 월리엄 워터하우스, 1907)

“편애하는 워터하우스의 그림이에요. 오른쪽이 얼빵해 보이는 이아손이고요. 간절해 보이는 눈빛으로 메데이아가 약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있네요. 이아손도 한 나라의 왕자인데, 이런저런 사연으로 이복형제인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뺏긴 거예요. 나이가 들어서 다시 왕위를 찾으러 가죠.

펠리아스가 신탁을 받으러 갔는데, 한쪽 신발만 신고 있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얘기를 들은 거예요. 이아손이 왕위를 돌려달라고 왔는데, 보니까 표범가죽옷에 창을 들고, 오른발에만 신을 신은 거예요. 펠리아스가 겁이 덜컥 나서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임무를 맡긴 거예요. 메데이아가 있는 나라의 황금양털을 가지고 오라고 한 거죠. 그래서 이아손이 메데이아를 만난 것이죠.

메데이아는 첫눈에 사랑에 빠져요. 메데이아 아버지의 소유였던 황금양털은 쉽게 가져갈 수 없게끔 장치가 돼 있었어요. 메데이아의 아버지도 이아손을 죽일 심산이었죠. 그런데 메데이아는 자기와 결혼해달라는 조건을 내걸고 요령을 알려주죠. 이아손도 목숨이 걸렸는데 뭔들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이 그림은 ‘너를 데리고 우리나라로 가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이죠. 그런데 메데이아의 표정이 전혀 밝지 않아요. 아버지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게 표정에서 묻어나죠.”


「금빛 양털」(허버트 제임스 드레이퍼, 1904)

“이 그림은 마법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기고 떠나는 장면이에요. 뒤에 금빛양털도 있죠. 그런데 여자의 지시로 누군가 바다에 떨어져요. 빠지려는 사람은 메데이아의 남동생, 압시르토스예요. 아버지가 추격해 올 것을 알고 그걸 늦추기 위해서인데, 신화에 보면 토막 내서 바다에 던졌다고 나와 있어요. 토막 냈으면 시신을 수습하는 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그러다보니 추격을 포기한 거죠. 메데이아는 그걸 예상하고 동생을 데리고 간 거고. 한 남자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 없었던 거죠.”

「이아손과 메데이아」(귀스타브 모로, 1865)

“뭘 밟고 있네요. 희생된 무언가를 상징하는지.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별로 안 좋아해요. 두 사람이 함께 살긴 살았죠. 더 무서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지만.”

「자식들을 죽이려는 메데이아」(외젠 들라크루아, 1838)

“같이 살다가, 이아손이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거예요. 10년을 살았는데, 혼인 여부는 모르겠고요. 이아손이 그러다 어떤 나라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된 거예요. 메데이아가 복수를 하는 거죠. 사실은 이아손을 죽이는 게 복수인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이아손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한, 죄 없는 왕녀를 죽이고 그녀의 아버지까지 죽였어요. 두 번째 복수는 아이들을 죽이고 도망갔어요.

어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죠. 책에 ‘메데이아: 변명 또는 독백’이라고 썼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래도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여자가 마법의 힘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마법의 약도 못 만들고. 모든 게 거기서 시작됐잖아요. 마법의 힘으로 사랑을 얻은 거죠. 사랑을 하면, 그런 생각 하잖아요. 사랑의 묘약을 먹여서 마음을 사로잡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어찌 생각하면, 사랑이라는 게 마법인거 같아요.

또 메데이아는 사람에 대한 믿음을 한번도 갖지 못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사랑하는 남자한테 배신당했고, 자기도 아버지를 배신했고. 사람이라는 건 믿을 만한 게 못 되고, 아이들도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배신할 수 있을 테고. 그런 아픔을 더 이상 견디기 싫어서 싹을 없애자는 차가운 마음으로. 사랑을 몰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하잖아요. 또 다른 의견 있으세요?”


“(참석자)연금술사 같아요. 능력 있는 여잔데, 능력 있는 여자는 늘 뒤끝이 안 좋아요. 이 사람은 사랑을 몰랐다기보다 현대적인 사랑을 했다고 봐요. 자식을 죽인 것도 다 이유가 있어요. 이아손이 권력 지향적 행동을 하잖아요. 메데이아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이용하고. 아이들도 그 피를 물려받았을 테고.”


늘 조연이었던 어떤 외로움, 미노타우로스

「미노타우로스」(조지 프레더릭 와츠, 1885)

“<그림 같은 신화> 이야기를 PAPER에 연재했는데, 첫 번째 썼던 글이에요. 이 그림이 인상적이었어요. 어떠세요? 무섭나요? 아니죠? 착해 보이죠? 손을 모으고 입을 벌리고. 뭔가 측은하기도 하고. 순수해보이기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하고. 이 그림을 보면서 미노타우로스의 입장에서 처음 생각하게 됐어요. 이야기를 이런 쪽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름은 멋있지만 ‘미노스의 소’라는 뜻이에요.”

「에우로파의 납치」(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 1632)

“미노타우로스 탄생 직전의 이야기예요. 제우스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하얀 소로 변해서 에우로파를 납치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미노스예요. 물론 아버지는 제우스지만, 그 아버지는 소였던.”

「파시파에와 황소」(귀스타브 모로, 1876~80년경)

“여자가 미노스 왕의 왕비인 파시파에예요. 뒤에 까만 소가 있고. 제 생각에 이 그림은 ‘사건’ 직후를 그린 게 아닌가 싶어요. 파시파에가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요.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나죠. 다음 그림에 그 사건이 적나라하게 나타나요.”

「다이달로스가 만든 가짜 암소 속으로 들어가는 파시파에」(줄리오 로마노)

“앞에 있는 여자가 파시파에고, 뒤에 약간 야비하게 생긴 천재적인 발명가 다이달로스예요. 거의 아티스트죠. 우여곡절 끝에 아테나이 왕국에 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소를 만들었어요. 가짜 소인데, 진짜 같잖아요. 파시파에가 발을 집어넣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건 앞서 본 그림의 까만 소를 유혹하기 위해서죠.

그 까만 소는 포세이돈이 미노스 왕에게 보낸 거예요. 그것도 미노스 왕이 뿌린 씨예요. 미노스가 왕국을 세울 때, 포세이돈에게 이를 도와주면 좋은 황소를 바치겠다고 약속했는데, 세우고 나서 시치미를 뗀 거예요. 포세이돈이 괘씸해서 골탕을 먹이기 위해 되레 자기가 황소를 보냈어요. 무척 멋있는 소를. 파시파에 왕비를 유혹하려고.

이유는 묻지 마세요. 왕비가 어쨌든 이 소에 눈이 멀어버린 거예요. 황소를 유혹하려고 애를 쓰죠. 그런데 황소가 거들떠보지 않는 거예요. 가만 보니, 이 황소가 암소를 밝히는 거예요. 왕비는 한 마리 암소가 되리라 결심하죠. 다이달로스에게 만들어 달라고 명령해요. 그래서 결국 왕비가 아이를 가졌죠. 반은 소, 반은 사람인,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난 거예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는 테세우스」(구스타프 클림트, 1898)

“미노타우로스는 테세우스의 영웅담을 만들어주기 위해 주로 나오죠. 여기에도 한 공주가 이 다른 나라의 왕자에게 반해서, 메데이아처럼, 도와주겠다고 하죠.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마법의 힘은 없었으나 총명했죠. ‘테세우스에게 실타래를 주면서 문에 묶어놓고,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나올 때 따라 나와라. 아버지가 알면 안 되고, 나오면 나하고 결혼해 달라.’ 그림을 보세요. (미노타우로스를) 죽일 때 자세도 멋있죠? 극적으로 연출된 듯한 포즈. 거기에 희생당한 우리의 괴물.

첫 그림 말고 미노타우로스는 전부 조연이거나, 테세우스를 영웅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묘사돼요. 미노타우로스는 난관에 기대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나는 누구일까? 모른다는 건, 그만큼 고통이 따르는 것 같아요. 참 이상한 이야기죠. 파시파에 왕비도 그렇고. 미노스 왕은 괴물이 태어났는데, 죽이는 것 일도 아니었을 텐데,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놨죠. 왜 그랬을까요. 아마 아버지 때문일 거예요. 제우스가 소의 모습을 하고 자기를 잉태시켰기 때문에. 미노스 왕은 소에 약했나 봐요. (웃음)

저는 미노타우로스가 한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해서, 이럴 때라도 한번 주인공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미궁 속에서도 테세우스와 친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말만 통했다면. 어떻게 보면 테세우스한테 고마워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요. 죽기 전에 출생의 비밀 같은 걸 얘기해줬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미로(테세우스는 이 미로를 빠져나왔다. 영웅이니까), 그 속에 깊이 감추어둔 하나의 비밀은 모든 인간들의 약점이다. 나도 모르게 어겼던 사소한 약속, 의도하지 않았지만 누군가에게 주게 된 상처, 무심코 던진 차가운 말 한마디에서도 비밀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태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괴물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무관심, 우리의 욕망, 우리가 절대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치이기 때문이다.”(p.246)


마녀보다는 어쩌면 슬픔, 메두사

「메두사」(아르놀트 뵈클린, 1878)

“메두사는 진짜 무서운 그림 많아요. 이 그림은, 무서운 편도 아니에요. 무섭다기보다 슬퍼 보이죠. 병색이 완연해 보이기도 하고. 메두사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였대요. 아름다웠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죠. 아테나한테. 또 포세이돈이 그녀를 넘봤죠. 아테나 여신의 신전에서 범했다는 설도 있고. 아테나가 화가 났는데, 포세이돈한테는 별말 안하고 메두사한테 죄를 내렸어요. 여자들이 범하곤 하는 오류죠. 남자는 놔두고. (웃음)”

「석양(메두사)」(유진 버먼, 1945)

“이 그림은, (괴물로) 변하기 전이에요. 머리카락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러나 얼굴은 보여주지 않아요. 지금 울고 있는 걸까요. 왜 석양일까요?”

“(참석자)머리카락은 아름다운데 옷이 어두워요. 뒷 배경도 칙칙한 올리브 톤이고. 담쟁이 넝쿨 같은 게 시들어 있어요. 저주가 임박한 순간에.”

“말씀한 것을 들으니, (메두사가) 저주가 받게 된 것을 알게 된 직후인 것 같아요.”

「메두사를 죽이는 페르세우스」(프란체스코 마페이)

“(페르세우스는) 별로 영웅답지 않은 표정이죠? (웃음) 왜냐. 메두사를 보면 죽으니까. 왼쪽은 아테나고. 두 사람이 (메두사를 죽이러 가는데) 도와주러 갔어요. 아테나는 메두사를 처음부터 싫어했잖아요. 헤르메스는 갖가지 시키는 건 다하는 비서고. 아무 죄 없는 메두사의 목을 베러가면서 삼인일조가 됐는데, 메두사가 어찌 당해내겠어요. 날개 달린 신발과 몸을 감출 수 있는 투구도 갖추고, 방패에 반사된 모습을 보면서 메두사 목을 베죠.”

「팔라스 아테나」 (구스타프 클림트, 1898)

“클림트가 그린 아테나인데, 자기 갑옷에 메두사를 박았어요. 사람들이 힘을 못 쓰게 하기 위해서죠. 그림에도 사연이 있어요. 아테나한테 팔라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릴 때 죽었어요.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팔라스 아테나’로 제목을 지었어요.

어쨌든 제일 첫 번째 그림(「메두사」)에서 메두사라는 존재를 모르고 선입견 없이 본다면 여러 감정을 가질 것 같아요. ‘알아야 보인다’는 말, 맞고 좋은 말이지만, 가끔 몰라서 보이는 것도 있어요. 아는 것이 선입견으로 작용할 때도 있잖아요.”


그래서 메두사는 슬픔. 황경신은 책에서 말했다.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고, 누군가의 분노로 희생되고,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던 슬픈 운명의 여인이었을 뿐.”(p.210)

모든 선물을 받았으나 상자 외에 아무 것도 없었던 판도라

「에바 프리마 판도라」(장 쿠쟁, 1550년경)

“건방진 판도라죠. 약간 안하무인의 느낌? 판도라라는 이름은 ‘모든 선물을 다 받은 여자’라는 의미예요. 신들이 판도라를 만들 때, 모두들 와서 각자 선물을 준거죠. 제우스 명령으로.”

「판도라」(쥘 조제프 르페브르, 1882)

“이 그림, 소녀 같죠? 앞선 그림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에요. 인어공주 느낌도 나고. 이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판도라에겐 자기 것이라곤, 상자 하나밖에 없구나. 왜 저렇게 벼랑 위에, 몸을 던질 것처럼 있을까. 화가마다 판도라를 보는 시각이 다른 것도 재미있어요.”

「프로메테우스 신화」(피에로 디 코시모, 1515)

“여기선 시골 아낙네 같은 판도라를 볼 수 있죠.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 사촌쯤 되는데, 프로메테우스는 신이 아닌 인간의 편이었어요. 인간을 제우스보다 좋아한 거예요. 그래서 신을 골탕 먹이려고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가져다주죠. 그것이 들통 나서 쇠사슬로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죠. 그런데 간이 계속 재생돼서 계속 간을 쪼아 먹혀요. 마침 지나던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를 구해주는데, 제우스도 어찌 할 수가 없어요.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예뻐한 아들이잖아요.

그런데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영원히 묶어놓을 거라고 스틱스강에 맹세했어요. 스틱스강에 맹세하면 무슨 일이든 지켜야 하거든요. 그런데 풀려나서, 제우스는 머리를 굴려 프로메테우스에게 반지를 줬어요. 쇠사슬과 바위로 만든. 결론적으로 계속 묶여 있는 셈이죠. 그래서 반지는 구속이에요. 별로 로맨틱하지 못한 이야기죠? (웃음)

신들이 프로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보내기로 했죠. 자신을 미워하는 신들이 복수를 할 거라고 예상했고, 멍청한 자신의 동생(에피메테우스)을 통해 우회할 거라 생각해서 절대 신의 선물을 받지 말라고 몇 번을 경고했어요. 그런데 그 선물이 사람, 즉 판도라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예뻤어요. (웃음)”


「판도라」(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9)

“굉장히 묘한 분위기죠? 그림은 로세티가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인 제인 버든을 모델로 해서 그린 거예요. 세기의 유명한 불륜이죠. 로세티는 화가이자 시인이에요. 그리고 감각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남자이기도 하고. 시도 꿈틀거리는 욕망을 많이 다뤘어요. 여자가 많았는데, 특이하다보니까 친구인 윌리엄 모리스의 아내인 제인과의 관계가 회자됐겠죠. 로세티의 그림은 제인이 주로 모델을 했어요. 페르세포네 편에서도 로세티 얘기가 나와요. 로세티는 윌리엄 모리스와 친한데, 그의 집에 갈 때마다 윔뱃(곰과 비슷하게 생긴 동물)을 데려갔어요. 모리스가 이 동물과 놀면서 스케치를 할 때, 로세티는 대범한 건지, 모리스의 부인과 은밀한 시간을 가져요.”

「판도라」(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1896)

“처음부터 이 책의 표지로 작정이 돼 있던 그림이에요. 여긴 상자가 크네요. 신들이 결혼선물로 주면서 열지 말라고 하죠. 하지만 신화에서 뒤돌아보지 마세요, 열지 마세요, 할 때 하지 않는 사람 없잖아요. 판도라도 열어보죠. (웃음) 판도라에게는 이 세상에 상자 하나밖에 없어요. 의지할 데도 없고, 친구, 부모, 어린 시절이나 추억도 없고.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우린 그런 것들이 있어서 살 수 있는 거잖아요.

연인의 마음을 궁금해 하며 그것을 엿보고 싶은 것처럼, 판도라도 상자를 열었는데 희망만 놔두고 닫아버리죠. 이 그림, 참 애잔해요. 맨발이나 그런 것 때문에.

이것으로 네 명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어요. 신화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버전도 많고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데다 표기도 다 달라요. 로마나 그리스 신화. 그런 것 때문에 겁먹기로 하지만 신화에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 담겨 있어요.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그 이후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신화 같은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한 각자의 숙제를 남긴 채. 그리하여,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신화는 감춰진 희망이 아닐까. 숱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신화에서도, 그 이후의 이야기에서도 사람들이 길어내고 싶었던 것은 희망이 아녔을까. 물론 근거 없는 희망이나 낙관은 금물. 살아 숨 쉬는 우리야말로 살아있는 신화. 우리의 이야기 또한 그렇게 신화가 될 수 있음을. 나는 그렇게, 살아있음으로 인해 만들 수 있는 신화를 언제나 기대한다.


“당신이 마지막 순간에 뚜껑을 닫아 희망을 가두어버린 건, 어쩌면 다행이라고. 희망, 바라고 바라는 마음, 모든 욕망이 흘러나오는 곳, 우리를 눈멀게 하는 마음의 감옥, 그것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불행해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희망이란 건 그렇게 상자 속에 가두어두는 것으로 충분한 것,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정도로만 족한 것이에요. 누가 알겠어요. 상자 속의 희망이 빠져나오고 나면, 깊이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절망이 드디어 자신의 차례라고 기뻐 날뛰며 뛰쳐나올지.”(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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