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나 지구, 환경, 정치 같은 거대한 것들이 아니라 작고 가볍고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풀잎이나 감나무, 라디오 프로그램, 반찬, 세금 같은 이야기를 정말 ‘깃털처럼 가볍게’ 쓰고 싶었지만, 작년 5월 연재를 시작하자마자 세상은 너무나 시끄러워졌다. 어쩌면 이는 공지영 작가의 징크스일지도.
“어떤 문제에 대해 강연을 하거나 글을 쓰고 있을 때 꼭 그 반대되는 일이 집에서 일어나요. 『즐거운 나의 집』은 맏딸 위녕의 시선으로 쓴 소설인데, 이때 딸아이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해 가장 속을 썩이고 있을 때였거든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출간하고 강연회를 하는데 막내 녀석이 가출을 하지 않나……. 정말 세 아이들이 골고루 속을 썩여요.(웃음)”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에 수록된 글들을 연재하는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계속 터졌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서 촛불집회 과잉 진압, 대운하. 비정치적인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만들 만큼 시끄러웠던 나날들 동안 아이러니하게 공지영은 사소한, 깃털처럼 가벼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공지영은 가벼움, 따뜻함, 사소함, 선함, 일상의 여린 반짝거림을 글로 써내려갔고, 그것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로 묶여 나왔다. 이 책은 언뜻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떠올리게 하지만 아무리 가벼워져도 공지영의 글은 사회 문제라는 단단한 바닥에 닻을 내린다. 가벼운 이야기, 읽히기 쉬운 이야기를 쓰는 듯해도 우리 사회의 모순과 편견, 불균형에 대한 자각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 글은 즐겁다. 작가 공지영이 아닌 생활인 공지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할 때 괴로웠어요. 신문에선 난리가 나는데, 그 지면 한 귀퉁이에 한가하게 휴게실에서 오뎅 먹은 이야기, 지리산에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쓰고 있으려니까 ‘내가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매일 매일 이런 갈등 속에서 글을 썼어요. 가끔 ‘이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하는 댓글이 가끔 올라오곤 했는데, 그 글이 천둥소리처럼 들렸어요.”
그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모든 사람의 고민을 다 들어주고 상담해 줄 수 없지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 그는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고, 매일 아침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를 하겠다,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리고 정말 기도를 해 줘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러면 일이 잘 풀려요. 기도의 힘이라는 게 정말 있어요.”
인간의 선함을 믿고, 그것을 글로 쓴다
그는 기도의 힘을 믿고,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 그래서 쓰게 된 작품이 2004년, 7년 동안 침묵한 후에 출간한
『별들의 들판』이다.
“제가 『별들의 들판』 전에 『봉순이 언니』『착한 여자』를 쓰고 7년 정도 공백기를 가졌어요. 이 두 작품은 착한 여자로 살면 결국 이렇게 비참해진다는, 사회에 대한 짙은 ?소가 깔려 있어요.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착해 봤자 손해만 보는 거라고. 그런데 글을 안 쓰는 7년 동안 선한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어요. 특히, 『별들의 들판』에 실린 작품을 취재하려고 베를린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절실하게 그걸 느꼈어요. ‘인간은 어떠한 절망의 순간에도 선의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요. 그래서 믿게 됐죠. 사람들은 인간의 선함을 우습게 보는데, 그 힘이 정말 장난이 아니에요. 그런 확신을 갖고 계속 글을 쓰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내 소설에서 그런 걸 읽어내고 힘든 분들이 많은 위안을 받으시나 봅니다.”
공지영은
『별들의 들판』을 내고 나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사랑 후에 오는 것들』『즐거운 나의 집』 등 정력적으로 작품을 써왔다. 그렇게 힘껏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런 선의에서 용기를 냈기 때문은 아닐까.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옛날에는 선택의 폭이 좁았어요.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로만 소설을 써야 한다는 암묵적인 압박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사회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면서 쓸 수 있는 소재의 폭이 굉장히 넓어졌어요. 소재주의라고 비판하시는 분도 있지만 다양한 소재로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제 장점인 것 같아요. 선함, 착함, 인간에 대한 신뢰에 대해 소설을 쓰는 건 어찌 보면 굉장히 뻔한 이야기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느끼도록 작품을 빚어내기 위해선 작가적 역량이 필요합니다.”
소설이 나올 때마다 찬사만큼이나 비판도 받는다. 거기에 대해 이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에도 근육이 생기니까요.”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예전에 작가가 한 강연에서ㅡ3년 전의 일이다ㅡ‘나는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굉장히 독특한 대답이었다. 작가라면 자기가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해 책 한 권을 쓸 정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는 명쾌하게 ‘생계’라고 대답했다. 그 후, 낸 책마다 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이제는 생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에게 여전히 글쓰기가 생계의 수단인지를 물었다.
“그때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돈 떨어지면 글을 썼거든요.(웃음) 지금은 좀 달라요. 글을 쓰는 건 여전히 괴롭고 힘들지만, 단지 ‘돈’ 때문에 글을 쓰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책으로 어느 정도 벌만큼 벌었고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지만, 여전히 글을 쓰고 있잖아요. 돈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글쓰기가.”
공지영은 ‘돈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소설에는 돈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나는 돈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소설을 싫어해요. 소설을 읽다가 ‘아니 실업자가 무슨 돈으로 이렇게 먹고 사나?’ 궁금한 거예요. 나는 그런 걸 설명하지 않는 소설을 싫어해요. 소설은 결국 돈 이야기입니다. 제인 오스틴이나 에밀리 브론테, 찰스 디킨즈 소설을 읽어보면 돈 이야기가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해요. 누가 재산이 얼마가 되고, 지참금이 얼마고, 유산을 얼마나 상속받고……. 소설가 중에서도 돈 때문에 글을 쓴 사람도 많잖아요? 발자크, 도스토예프스키, 월트 스콧……. 다 빚에 쫓겨서 소설을 썼어요. 나는 빚이 없어서 위대한 소설을 못 쓰는 건지 몰라요.(웃음)”
즉, 그는 소설이 대중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그들이 아는 언어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소설이나 문체에 대해서 너무 대중적이고 쉽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점이 참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럼, 사람들이 별 관심 없는 주제를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문체로 쓰는 게 좋은 글일까요?”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해서 가능하면 단순한 문장을 구사하려고 한다.
“나이가 들면 감성은 늙어가요. 감성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기간은 한정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낙엽 하나만 떨어져도 열 가지 이야기를 쓸 수 있었는데 지금은 열 개가 떨어져도 하나 건질까 말까예요.(웃음) 나이가 들면서 감성이 무뎌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감성이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면 정말 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감성만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시기가 온다.
“이 시기가 오면 힘들어요. 명성은 잃기 싫은데 감성은 안 따라오고 그러니까 외부에서 감성을 대신할 것을 찾아요. 마약을 하고 표절을 하는 예술가들이 있잖아요?” 그는 소재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작가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데, 다행히도 우리 사회가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거든요. 소설가로서 이야기할 소재가 많이 생기는 셈이죠. 그리고 내 문체가 이른바 '미문'이 아니라서 어떤 소재에도 어울리는 점도 장점이에요. 얼핏 읽기에 아름답고 강렬한 문장들이 기억에 오래 남지만 평범한 문체에서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어요. 또, 그런 평범한 듯한 문체가 오래가고요. 레이스나 반짝이를 뿌린 문장들은 미원을 많이 넣은 음식과 같아요. 처음엔 맛있지만 세 숟갈 이상은 못 먹죠. 처음부터 오래 쓰려고 그런 문체를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겐 득이 됐어요.”
글쓰기는 매번 새로운 산을 올라가는 것
그에게 글쓰기는 매번 새로운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과거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늘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 그의 신조이기도 하다. 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모험을 떠나는 심정으로 소설을 쓴다.
“책 많이 팔린다고 좋겠다, 공 작가는 뭘 써도 팔리니까 고민할 필요가 없겠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사실 예전보다 지금이 더 고민이 많아요.”
작가로서 입지가 높아지니까 주변에서 뭐라고 작품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진다. 그래서 외롭단다.
“실수를 해도 ‘무슨 의도가 있으신 거죠?’ 이럴 때는 무서워지기까지 합니다. 이른바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간 작가들이 다 겪는 일이긴 한데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창작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안 좋아요. 작품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냉정하게 지적할 사람이 항상 옆에 있어야지요.”
그는 자기 복제는 창작자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글을 쓰면서 어제의 자기를 죽인다.
“창작자가 어려운 건, 연륜이 쌓여도 쉬워지지 않는 것 때문입니다. 어제의 경험이 오늘의 밑거름이 되지 않거든요. 오히려 창작자는 어제의 자기를 죽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작가로서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건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진부함과의 싸움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결국 창작자는 평생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운명이에요.”
작가이면서 그는 독자다. 그는 책은 항상 좋은 장난감이었고, 학교였고, 친구였다고 말했다.
“책이 유익해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유희의 기분으로 늘 책 읽기를 즐겼어요. 그런데 오늘날, 문학이 그 놀이의 기능을 잃은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소설이 100% 재미만 있으면 안 되나요? 소설이 항상 뭔가 의미를 가져야 할까요? 독자로서 저는 ‘그저 재미만 있는’ 소설에도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어요. 우리가 게임을 의미가 있어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재미가 있어서 하는 거지. 책이 줄 수 있는 재미들이 좀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고, 작가로도 그런 재미를 드릴 수 있는 소설을 계속 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