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소설가 신경숙은 녹음기를 샀다. 엄마의 말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하세요. 엄마는 정읍 사투리를 고대로 사용하시는데, 말이 생생하고 참 맛깔 나요. 이것들은 엄마가 돌아가시면 다 사라져버릴 거잖아요. 아깝더군요. 그래서 내가 녹음을 해두면 어떨까 싶었지요.”
그 녹음기는 포장도 뜯지 않고 어딘가에 놓여져 있다. 엄마의 이야기를 녹음하는 대신 딸은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썼다. 서울역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난 후, 딸과 큰아들, 아버지, 어머니가 화자로 등장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엄마를 이야기한다. 언제나 그곳에 ‘엄마’로 있어줄 것 같았던 박소녀라는 이름의 여자를. 없어진 후에야 엄마의 인생은 평생을 걸쳐 받아 마땅한 관심과 위로를 받는다.
『엄마를 부탁해』는 신경숙이 문학과 어머니에게 한 오랜 약속이었다.
“작가가 되면 꼭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썼던 소설들의 여러 엄마들을 거쳐서 이 소설에 도착했어요. 『엄마를 부탁해』는 내 엄마 이야기의 완결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처럼 살지 마라”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소설에서 가족은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엄마를 내팽개쳐 버렸다.
“엄마도 딸에게 자기처럼 살지 말라고 했고, 딸도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너무 쉽게 어머니의 삶을 부정한 것 같았어요. 엄마의 삶을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고 보살펴주지도 않았잖아요.”
| ‘내 엄마 이야기의 완결편’ 『엄마를 부탁해』를 펴낸 소설가 신경숙 |
|
엄마 자신도 자기 삶을 하찮게 여겼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시집을 가 시집 식구와 자식, 남편 뒷바라지에 일생을 바친 후 찾아오는 허탈하고 초라한 황혼. 엄마를 홀대한 것이 어디 가족 뿐일까. 문학 역시 그랬다. 가족에서 엄마의 위치가 그렇듯 문학에서 엄마도 항상 배경으로 존재했다.
“90년대에 문학은 ‘아버지 죽이기’ 작업을 해서 지금 문학에서는 아버지가 거의 죽어버렸지요. 예전처럼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그러면 엄마는 어떨까요? 우리 문학은 계속 엄마를 버려두었지요. 엄마는 생명을 탄생시키는 존재이므로, 엄마를 죽이는 것은 세계를 죽이는 것과 같아요. 쓰시마 유코 선생님은 ‘여성에게 어머니의 부재는 세계의 부재나 다름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작가는 소설 이름을 댔다.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고리키의
『어머니』.
“엄마를 다룬 장편 소설은 이 정도예요. 의외라고 생각할 만큼 드물어요. 엄마가 주인공으로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건. 우리가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과 똑같아요. 있는 것 같은데 찾아보면 없어요.(웃음) 내가 작가니까 문학에서 엄마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엄마의 삶은 하찮게 여겨졌다. 그러나 엄마가 사라지고 난 후 가족들은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일들을 내색 않고 해 왔는지를 깨닫는다. 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게 삶이 주는 시련을 견뎠다.
“지금 어머니의 삶을 돌이켜보면 저는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어요.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혼자 해낸 걸까요? 식구들이 끼니를 챙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어요. 저희 집은 도시락만 여섯 개, 일곱 개를 싸야 했지요. 끝없는 노동이 이어지는 삶, 그게 엄마의 인생이었고, 그 시대의 어머니들은 그것 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어요.”
그동안 그가 썼던 소설에서 그의 여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독신이거나 어머니가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쓴 건 아니었어요. 아마 독신으로 오래 살아서라고 생각하고, 원래 약한 것에 끌리는 편이라 그런 여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쓴 것 같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되었든 그렇지 않든 우리 세대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나는 엄마처럼 그렇게 못해’라고 생각하잖아요. 엄마가 되는 건 버거운 일이니까. 그런 솔직한 심정도 반영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는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
작가는 엄마와 그리 친한 편이 아니라고 했다. 엄마는 강했고, 아버지는 늘 어딘가 편찮으셨다. 딸은 약자처럼 보이는 아버지 편을 들었다. ‘다른 집 딸들은 엄마 편이라는데 너는 왜 그러냐?’라고 섭섭해 하실 만큼 그는 아버지 편을 들었다.
“소설을 쓰면서 엄마는 원래 강한 사람이 아니라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아버지가 약한 분이시니까 엄마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몫까지 짊어지고 힘껏 사신 것이었죠. 그런데 그걸 그땐 몰랐지요. 엄마가 강하지 않았으면 가정은 깨져버렸겠죠. 그런데 나는 그 희생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어요. 엄마니까요.”
이제는 안다. 엄마는 눈물이 많고, 감수성이 예민하고, 아이처럼 천진하고 어떨 때는 개구쟁이처럼 웃는 분이라는 것을.
“엄마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엄마가 아니라 내 아이와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어머니의 지혜, 넉넉하고 순한 마음씨, 생명 붙은 것들을 살려내는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의 세계는 풍요롭고 아름다웠다. 이번 소설을 쓰기 위해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보름가량 머물렀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소설을 쓰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엄마를 참 몰랐더군요. 엄마가 인간이었다는 걸 잊고 살았어요. 다들 그렇잖아요. 엄마는 항상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 같지요. 그런데 엄마에게도 아기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걸었던 때가 있었고, 젊은 시절이 있었지요. 인간이 느끼는 모든 희로애락을 엄마도 느낀다는 걸 몰랐어요. 엄마는 두근거리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엄마의 마음이 연하고 보드라운 아이 피부 같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엄마, 내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소설에 나오는 엄마의 모습 중 가장 작가의 마음에 드는 부분은 작은딸에게 미안해하지 않아 홀가분하다고 말하는 엄마다.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어서 너에게는 미안하지 않다, 나는 그런 내가 참 좋다’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쓸 때 참 좋았어요. 엄마는 자식들에게 참 많이 해줬는데 늘 미안해했고, 그걸 참 당연하게 여겼거든요. 이젠 엄마가 자식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신경숙은 열다섯 살 때 고향을 떠나 큰오빠가 있는 서울로 왔다. 그 이후로 엄마는 그를 야단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꾸지람도 많이 하셨는데, 서울에 나가 산 후로는 야단을 치신 적이 없고, 나를 어려워하시고, 늘 내게 미안해하세요. 가끔 전화를 걸면 그저 걱정만 하시지요. 자식을 낳았으면 스무 살까지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가슴 아프신가 봅니다.”
그는 엄마가 많은 것을 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항상 넘친다고 하세요.” 엄마의 삶은 힘들었지만 그것을 불행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진 않았다.
“그저 그런 엄마의 삶을 안아주고 싶었어요. 많은 것을 줄 수 있어서 엄마는 힘들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남들보다 몇 곱은 힘든 삶이었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견뎌낸 엄마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쓰면서 문득 가슴을 시리게 하는 추억도 떠올랐다.
“서울에 있다가 엄마에게 다니러 가면 늘 조금이라도 더 있으려고 11시 57분 밤 기차를 정읍역에서 탔어요. 엄마는 항상 역까지 함께 와서 기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셨어요. 집에서 역까지 10리 길인데, 그때는 버스도 없었거든요. 그 길을 어떻게 돌아갔는지, 어떤 심정으로 돌아갔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엄마가 서울에 올라오시면, 잘 방이 없으니까 막차를 타고 정읍을 내려가셨어요. 새벽에 정읍역에 도착해서 혼자서 10리 길을 걸어가시면서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리고 왜 나는 그걸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어쩌면 그때의 추억이 이 소설의 출발점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피에타 상이 소설의 에필로그로 인도하다
『엄마를 부탁해』의 에필로그는 책으로 내면서 덧붙여졌다. 작품을 쓰다가 우연히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게 되었다.
“피에타 상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누구나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돼요. 소설이 나를 그곳에 이끌었을지도 모르죠. 그것을 보고 소설을 마무리 지으라고.”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를 안은 마리아를 조각한 상이다. 신경숙은 피에타 상을 통해 영원히 늙지 않는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가질 수 있는 예술적인 자리였고, 그곳에 엄마를 데려가고 싶었다. 소설에서 피에타 상을 본 딸은 광장으로 나가 말한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라고. 자기에게 생명을 주었지만 엄마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딸의 슬픈 독백이다.
소설 속의 딸은 엄마를 잃어버렸지만 현실의 딸은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딸은 엄마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엄마는 글을 모르지만 누구보다 이야기를 재미나게 한다. 딸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그 이야기가 딸의 글로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내게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내가 글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나를 통해 엄마의 이야기가 씌어지길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의 수많은 이야기가 내게 흘러와 소설이 되었지요. 엄마가 만약 글을 배우고, 교육을 받았다면 저보다 훨씬 뛰어난 작가가 되셨을 거예요. 이야기를 너무 재미나게 하시고, 사람이나 일에 대한 판단이 너무 정확하시거든요. 거기다 인생의 연륜까지 더해지셨으니.”
| “인간이 인간을 돌보고 사랑하는 삶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마음도 소설 속에 담았습니다.” |
|
엄마는 늙는다. 엄마가 늙고 병든 후에야 후회하는 것 그것이 자식이다. 늦기 전에 엄마를 돌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엄마와 위치를 바꾸어도 되지 않을까, 이젠 내가 엄마가 되어 엄마를 돌봐도 되지 않을까, 하고요.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성장하고, 또 자기도 누군가를 돌보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게 삶이 순환하는 거겠죠.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가 인간에 마음을 쏟는 것을, 인간을 돌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돌봄의 문화가 사막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런 안타까움과 인간이 인간을 돌보고 사랑하는 삶이 되살아났으면 하는 마음도 소설 속에 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