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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여수, 그곳에서는 - 한창훈

여수. 麗水. 우아한 물의 고장. 그러나, 섬에서 이사하여 마주친 여수는 크고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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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몇 뼘의 밭이랑과 수십 채의 집이 영토의 전부였으나 여수항은 끝을 알 수 없는 골목이 연이어 있었고 골목 하나당 수백 채의 집이 달라붙어 있었다.

여수. 麗水. 우아한 물의 고장.

그러나, 섬에서 이사하여 마주친 여수는 크고 넓었다. 섬은 몇 뼘의 밭이랑과 수십 채의 집이 영토의 전부였으나 여수항은 끝을 알 수 없는 골목이 연이어 있었고 골목 하나당 수백 채의 집이 달라붙어 있었다.

여수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한 첫날, 나는 집과 반대되는 곳으로 하교를 하고 말았다. 어선들 옆구리 부비고 있는 종포바닷가와 냉동공장을 지나며 길을 잃었고 시장 골목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삿갓 쓰고 있는 전봇대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사람의 마을이 이렇게 크고 넓을 수도 있다는 것에 나는 절망했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 정신이 혼미해질 때쯤, 마침내 집으로 가는 길목의 동일여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열 살 때였다.

나는 그 항구와 더불어 성장했다.

심연의 바다를 딛고 선 천공의 섬, 마음을 닫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고도, 여수.

노래미를 낚다가 물에 빠져 죽은 소녀를 본 것도, 짜장면을 먹어본 것도, 지구 반대편을 향하여 배가 출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 것도, 거웃이 돋아난 것도, 맨바닥 뒹굴며 싸움을 한 것도, 폴 모리아를 듣고 넋이 나간 것도, 꽁지머리 여학생을 따라가본 것도, 역전 시장 튀김집 골방에서 소주병 기울여본 것도 모두 항구 여수에서였다.

꽁지머리 여학생은 탁구장에서 처음 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건 게 그때였다. 여학생은 웃었다.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관문동 우리 집에서 조금 걸어들어가면 이본 동시상영하는 극장이 있었고 극장 옆으로는 이화, 연지, 정 따위의 이름이 붙은 술집이 있었다. 술집은 늘 붉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나와 헤어진 여학생은 그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내가 다니던 여수중학교는 별칭이 ‘돼지막’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군용마를 키우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러댔다. 그곳에서는 여수역과 오동도와 멀리 경남 남해도가, 그리고 그 사이 닻 내려놓고 있는 화물선이 잘 보였다. 역 근처에는 사창가가 있었고 그 가장자리에 있던 교회는 오후에 늘 찬송가를 틀어놓았다.

가수 지망생이었다가 창녀가 되었고 그러다 성가대가 되었다는 여자는 약간 허스키하면서 호소력 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단팥빵 얻어먹으러 딱 한 번 제일교회 가본 게 전부이지만, 그 여자 덕분에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곡은 지금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알고 있다.

그 노래가 들리면 가막만(灣) 쪽 노을이 도시를 뒤덮었다. 붉은 저녁 해와 아득한 수평선과 그곳에서 돌아오는 어선과 무리지어 따라오는 갈매기와 시험공부의 지겨움과 시장의 소음이 뒤섞이며 공연히 쓸쓸해지곤 했다. 항구란 쓸쓸할 틈이 없다는 것을 아직 잘 모를 때였다.


중학교 삼 년간 부은 저금을 타던 날 밤, 친구 하나는 서울행 밤기차를 탔다. 우리는 천 원씩 걷어 여비에 보탰고 그 아이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기차에 올랐다. 그가 가는 곳은 영등포 어느 알루미늄 공장이라고 했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인 항구는, 하긴, 떠나는 일이 일상이 되는 곳이기는 했다.

기차를 보내고 나서 나는 꽁지머리 여학생을 찾아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빈 리어카에 기대앉아 그 아이 집을 바라보았다. 신경질과 피로가 적당히 뒤섞인 사내들이 그곳으로 들어갔고 간혹 입술 붉은 여자가 함지박을 들고 나와 확, 개숫물을 버리기도 했다. 어장, 샛바람, 데리끼(선박용 윈치), 간조, 기관장 따위의 용어가 붉은 커튼 너머에서 튀어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사내들 배경으로는 늘 기름때 묻은 목장갑과 수리중인 소구기관과 풍화되어가는 갑판 뚜껑, 충격 방지용 폐타이어, 그물과 밧줄 무더기가 있었다. 망치 소리와 용접 불꽃, 욕설과 웃음도 그곳에 같이 있었다.

취한 사내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심부름 나온 여학생은 나를 발견했다. 그 애는 기다리라는 눈짓을 하고는 커튼을 젖히며, 금방 들어온당게,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는 가로등 없는 곳을 골라 걸었다. 긴 골목의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키스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애는 다음에 하자고 했다.

다음이 되었을 때도 그 애는 키스는 다음에 하자고 했다. 키스란 늘 다음에 하는 거였다. 나는 끝내 그 여학생과 키스를 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여자중학교 아이들에게 ‘아주 뭣 같은 새끼’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한창훈을 조심하자, 가 그녀들이 주고받은 정보였다. 심지어 어떤 반에서는 칠판에 내 이름을 크게 써놓고 빨리 죽어라, 합동으로 저주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 중 짓궂은 몇몇이 밤길에 여학생들을 만나면 달려들어 브래지어끈을 당기곤 했단다. 그리고 “나는 여수중학교 3학년 9반 한창훈이다”라고 꼬박꼬박 내뱉어온 탓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꽁지머리 여학생은 나중에 내 친구와 키스를 했다.

그러는 동안에 키가 컸다. 크는 동안 몇몇 실패를 경험했다. 실패와 함께 술 담배를 배웠고 그리고 음악실을 찾아다녔다. 당시 여수에는 음악실이라는 게 있었다. 음악 듣는 곳이 다른 곳이라고 없었겠는가, 마는 이쪽 동네 것은 좀 유별났다.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듣는 거였다. 주로 클래식을 틀어주는, 다른 지역의 음악감상실에 비하면 술집에 가까웠지만 큰 도시의 학사주점처럼, 신청곡과 라이브가 있되 떠들썩한 곳에 비하면 찻집에 가까웠다. 여수에 여럿 있었다. 사람들은 신청한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다. 바다는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보니 이십대 초반, 나는 바닷가 어느 음악실에서 DJ를 하게 되었다. 한울타리, 마이클 잭슨, 버티 히긴스, 블랙 새버스, 최백호를 주로 틀었다. 영장을 기다리고 있던 때라 몹시 외로웠다. 연애를 하고 싶었다. 검정 티셔츠 단추 한두 개 정도 풀고 박스에 앉아 있곤 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약간의 우수와 약간의 퇴폐와 약간의 시심(詩心)을 지니고 있는 그런 아가씨라도 하나 얻어 걸렸으면 싶었던 것이다.

어느 날, 오렌지주스를 들고 온 종업원이 5번 테이블 손님들이 직접 뵙기를 원한다고 전해왔다. 나는 내심 웃으며, 겉으로는 약간 피곤하다는 얼굴로, 러닝타임 칠 분짜리 바클레이 제임스 하비스트(Barclay James Harvest)의 「Poor man’s moody blues」를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나갔다. 그러나 5번 테이블에는 떠꺼머리 세 놈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느닷없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받아주십시오.”

하나같이, 빠치망(멸치배)에 갖다놓으면 딱 들어맞을 몰골들이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음악을 깊이 사랑한다는 고백이 있었다. 그래, 뱃놈이라고 음악 좋아하지 말란 법 있던가. 약간의 우수와 약간의 퇴폐와 약간의 시심이 있어 보이는 여자 앞에는 늘 약간의 여유와 약간의 액션과 약간의 학벌을 가지고 있어 보이는 사내가 앉아 있곤 했다.

팔자에도 없는 사내 동생들과 음악실 빠져나와 막걸리를 마시다보면 밤바다에는 해류가 한정 없이 흘렀고, 달빛과 맞은편 돌산도 조선소 불빛도 함께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저 예전의, 알루미늄 공장으로 올라간 친구처럼 사람들도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도 그랬다. 여수는 전라선의 종착역. 기차칸에 사람이 자꾸 들어차면 상행선이었고 조금씩 빠지다가 텅 빈 칸이 되면 하행선이었다. 올라간 사람은 훗날 내려왔다. 친구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서 내려왔다. 나도 육지 이곳저곳을 떠돌다 돌아오곤 했다.

내륙에서의 내 이력에는 늘 항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내륙 사람들은 산과 벌판을 말하고 나는 항구를 이야기했다. 그들에게 나는 먼 바닷가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곳은 해가 뜨거웠고 건조하고 먼지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항구가 떠올랐다. 습습함을 기억하는 것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였다. 그리고 먼 길을 흘러 마침내 돌아오면 항구는 늘 그만큼의 떠들썩함과 그만큼의 습습함을 지닌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돌이켜보면 숱하게 떠났고 떠난 횟수만큼 돌아왔다.


여수항은 성장통 다음 코스로 삶의 지난함과 노동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부터 몇 년간 나는 여수에서 일을 했다. 수산물 가공공장과 현장, 작업선 위가 내 거처였다. 대략 줄잡아보면, 신월동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소호항도에서 고진 거쳐 장수면까지, 서쪽으로는 돌산도의 굴전 지나 향일암이 있는 임포까지 숱한 수산물 가공현장을 거쳤다. 뱃놈이 되어서 가막만과 여자만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인정물태가 넘쳐났다.

화려한 과거와 강인한 근력과 술을 장기로 삼은 사내들이 있었고 가난과 정신력과 자식에 대한 애정을 재산으로 갖고 있는 여인네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나와 꽁지머리 여학생처럼, 시작부터 뭔가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쥐고기, 홍합, 굴, 장어, 서대, 독새우, 피조개, 새조개, 키조개, 하여간 바다에서 나는 모든 갯것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벌어지고 벗겨지고 해체되었다. 사내들은 힘으로, 여인네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그 일을 해냈다. 쥐고기 공장 다니는 여인네는 어깨 힘이 좋았고 새우 까는 할매는 손등이 맨들맨들했다.

여인네들은 모두 손가락만 한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있었다. 일이 끝나 버스를 기다릴 때 누군가 오만덕이(개미더덕)를 주워와 칼로 벗기면 나는 가게로 뛰어가 소주를 사와야 했다. 한잔 마신 여인네가 문득 선창을 하고 뒤이어 다들 따라 불렀다.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면 내 이름을 불러주세요
달과 별이 없는 어두운 밤도 당신이 부르시면 찾아가리다
생각이 나면 생각이 나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우우후 불러주세요)
언제나 이 마음 달맞이꽃 되어 오로지 그대만 기다려요
(우우후 불러주세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기에, 그래서 찾아갈 곳이 따로 없기에, 그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지치고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거꾸로 들어 털어보면, 철학자 한두 명 가지고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무게의 고통이 쏟아질 것 같았다. 니체 말대로, 세계사 한 편씩 기록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우는 여인네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 웃었다. 깔깔깔. 대화의 반 이상이 웃음으로 채워졌다. 웃음이 없었다면 여인네들은 말라 죽어버렸을 것이다. 눈물은, 나중에 환갑상 받아놓고서야 한 방울 흘릴 일이었다.

태풍이 상륙하기 직전의 저녁노을은 미치도록 찬연하다. 돌산대교를 오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들리지 않는 탄성이 터져나올 듯한 색의 향연 앞에서 뒤를 이을지도 모를 고통이나 슬픔마저 잠시 숨을 죽인다.

나는 지금도 연등천 포장마차촌을 찾아다닌다. 우선, 안주가 맛있다. 나도 육지에서 포장마차를 했었지만, 그리고 전국 웬만한 곳을 다 다녀봤지만 으뜸이 이곳이다. 포장마차에서 회를 먹는다는 것에 놀라는 방문객들이 많다. 이곳에서는 선어회를 판다. 활어회는 우리나라에만 있단다. 서로 믿지를 못해 살아 있는 놈에 칼 대는 것을 봐야 한다나. 하지만 회는 적당한 시간 동안 냉장된 게 가장 맛있다. 죽음의 시간이 주는 맛이다.

사실 여수의 음식은 소문나 있다. 한정식집에서 밑반찬 나오는 것 보기만 하다가 체해버린 손님이 있었다(그 손님이 그날 유일하게 먹은 것은 까스활명수 한 병이었다). 그동안 박해받고 소외받은 곳이라, 언제 죽을지 모르니 우선 먹어 조지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고도 하고, 예술적 감수성과 풍부한 해산물 때문에 미각이 발달해서 그렇다고도 한다.

아무튼, 그곳에 앉아 병어회 한 접시 놓고 잎새주 한 병 비틀면, 고된 이동 끝에 비로소 집에 도착한 듯싶다. 포장 너머로 항구의 불빛 아른거리고 사람 떠난 시장 골목도 아스라이 잦아든다. 좀더 늙어버린 현장의 여인네들은 지금도 ‘들고양이들’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작은방에서는 손자가,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이순신 장군을 본받겠다고 또박또박 글쓰기 숙제를 하고 있을 것이다. 변화가 늦는 것, 그래, 그게 항구의 미덕이다. 사람들이 지나간다. 아따, 여기서 한 잔만 더 하잔께? 내일 어장은 어치게 할라고? 말(言語)도 같이 지나간다. 연등천 검은 수면에 떠 있는 달이 지고 나면 포구에 묶인 저 어선들은 바다로 나갈 것이다. 여객선 터미널에서는 숱한 사람과 곱하기 십 정도의 사연을 싣고 이런저런 섬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싣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항구? 바다로 나간 자가 되돌아오기 위해 만들어놓은 거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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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소설가. 1963년 전남 여수시 삼산면에서 태어나 열 살 때 여수로 이사 왔다. 그곳에서 세상살이의 이것저것에 눈을 떴고 한동안 벌어먹고 살기도 했다. 그 경험들을 소설로 왕왕 쓰고 있다. 도시와 자연, 육지와 바다의 접점이 주는 매력 때문에 여수가 진짜 살기 좋다, 는 주민들의 말에 이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가던 새 본다』『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청춘가를 불러요』, 장편 『홍합』『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열여섯의 섬』, 동화 『검은섬의 전설』, 산문집 『깊고 푸른 바다를 보았지』(공저) 등이 있고, 한겨레문학상, 제비꽃서민소설상을 수상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나의 도시, 당신의 풍경> 연재를 마칩니다.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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