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는 그의 회상집에서 기억의 가장 첫머리에 유년의 집 앞에 서 있던 유모차를 놓아두었다. 그 유모차가 관같이 보였다고 했다. 마치 빛과 어둠이 한배에서 나온 쌍둥이이듯. 나보코프의 유모차의 자리에 나는 진주 남강에서 불어오던 바람을 놓아둔다. 나의 첫 기억은 햇감자와 산딸기가 장에 나오기 시작하던 이른 여름날, 열어놓은 방문으로 들어와서 코를 간지럽히던 강바람이었다. 그때 나는 아기 포대기에 누워 있었다. 그 바람에는 장냄새가 묻어 있었다. 아마도 집 안에서 장을 달였는가보았다. 아니면 구더기가 끼지 말라고 장독 뚜껑을 어머니는 열어두었는지 모른다. 강바람은 인간이 사는 마을로 들어와서 인간이 풍겨대는 온갖 냄새를 다 껴안고 나에게로 온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섞인 냄새, 나에게 냄새라는 감각을 처음 일깨워준 나의 강, 남강의 바람 냄새. 인간이 이 지상에 세운 많은 도시들은 강을 끼고 들어선다. 고대 근동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만나게 된 강 가운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그 두 강 사이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고대문명 가운데 하나라는 메소포타미아(강과 강 사이라는 그리스 말이다) 문명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이 그곳을 떠나면서 그 강가에 세워졌던 도시들은 사라졌다. 물길을 막고 강의 흐름을 바꾸었던 인간들 때문이었다. 강이 흐르는 한 도시는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나의 고향 진주 역시 강가에 세워진 고도이다. 세상에, 한 도시가 천 년이라는 세월을 지탱해내다니. 그리고 강이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도 그 도시에 아직도 머물고 있다니.
바람이야 가벼운 것이라서 기억의 첫 지층 위에서 팔랑대겠지만 기억의 가장 아래쪽에 놓인 진주에 대한 기억은 남강이다. 아름답다는 말 아래에 놓인 나의 기억은 가을이면 그 강에 띄우던 유등이 있고 참혹하다는 말 아래에 놓인 나의 기억은 남강 어느 모래사장에서 발견되었던 같은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이었던 유괴된 아이의 시체이다. 내 생애의 가장 은밀한 순간도 그 강가에 있었다. 첫 월경을 하던 나는 월경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피가 흐르는 두려움 때문에 집으로 가지 못하고 그 강가에 주저앉아 울었다.
유등.
연꽃등을 띄워 강으로 보내던 시절, 나는 사춘기였다. 10월이면 진주에서는 개천예술제가 열리는데 그 행사 가운데 하나가 유등놀이였다. 역시 행사 가운데 하나인 백일장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유등을 들고 나는 강가로 갔다. 백일장에는 주어진 제목이 있었고 그 제목에 맞게 시를 쓰면 되었다. 주어진 제목은 언제나 싫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시를 그때도 쓰고 싶었다. 언제나 진주성에서 백일장은 열렸다.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논개사당을 어슬렁거리거나 의암까지 내려가보거나 했다. 종종 마감시간이 지나도록 시를 지을 수가 없어서 반쯤 갈긴 종이를 내기도 했다. 그 종이 위에는 ‘맑은 가을 하늘……’ 운운이 들어 있었으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산만한 글줄일 뿐이었다. 백일장을 마치고 중앙시장 근처에서 부침개를 사먹고 집으로 가서 이미 준비해둔 등을 들고 강으로 가면 저녁시간. 날씨가 좋은 날이 유등날로 잡히면 청량한 가을 공기 속에 차가운 물 위를 어른어른, 마치 금방이라도 물에 젖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가라앉을 것같이 등은 흘러갔다. 조심스럽게 등을 보내고 등 안에 켜진 촛불이 꺼지지 않고 멀리멀리 흘러서 가라는 마음으로 강가에 서 있을 때 소원을 빌어보라던 누구의 말은 나에게 아주 뜨악하게 들렸다. 아름다움 앞에 서 있는데 생의 복락을 비는 소원이 나에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 순간, 나는 아름다움 앞에서는 아무런 생애의 소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폭력.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남강에는 넓은 모래사장이 있었다. 그곳은 어린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학교가 끝나고 난 뒤 걸어서 모래사장으로 나가서 한참 모래와 놀다가 어둑어둑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모래사장에서 강 건너편(?건너, 라는 이름이 붙어 있던 곳이었다)을 바라보면 긴 띠를 이루고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대나무숲의 뻑뻑한 녹색은 지는 태양의 아늑한 빛을 받고 황금빛으로 변했다.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녹색으로 돌아오는가 하다가 천천히 다가오는 어둠에게 제빛을 내주고 어둠의 검은 품에 안겨갔다. 그때, 그렇게 어둠이 오고 있던 강변에 서 있을 때 그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그 다음날 어린아이의 시체가 발견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 유괴사건으로 도시 전체가 들끓고 있었는데도 그 아이가 같은 학교 상급생이었는데도 어린 나는 강변 모래사장에서 노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모래사장으로 갔을 때 그곳은 이미 출입 금지였다. 아이의 목 졸린 시체는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한동안 구경꾼 사이에 끼어 있다보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건너편의 대숲, 지는 해. 이번에는 지는 해의 빛을 받고 제빛을 잃어가는 대숲을 바라보자 겁이 덜컹 났다. 그리고 모래밭. 모래밭은 대항할 수 없는 생명에 가해진 폭력의 무서움을 나에게 가르쳐준 곳이었다. 지금도 이 세계 곳곳에서 날뛰고 있는 폭력, 대항할 수 없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보면 그 모래밭이 떠오른다. 아이의 목을 조르는 손, 그 아이의 늘어진 시신을 묻고 있던 한 남자가 있던 모래밭. 고향에서 배우는 것이 어디 아름다움뿐이랴.
전설.
강가에서 나와 분지인 진주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보면 그 산 언저리에서 자라던 올망졸망한 과일나무도 볼 만하다. 그리고 등성이에 꽃이 피기라도 하면 흑백의 산수화에는 천천히 색이 입혀진다. 붉은 산벚꽃이 한꺼번에 피면 천천히 입혀지던 색은 속도를 내고 산벚꽃이 지고 철쭉이 피면 산은 사랑의 풍문이 들기라도 한 양 음전한 모양새를 바꾸기 시작한다. 사랑의 열병에 들뜬 산들. 산들은 사랑의 핵에는 어떤 비극이 들어 있기라도 한 양 그 모습은 금방이라도 흑백산수화를 그리는 화공이 검은 먹을 들고 와서 색을 지울 것 같은 불안으로 뒤척인다. 금방 스러질 것 같은 아름다움, 그 그림 뒤에는 어릴 때부터 들어온 풍문처럼 전해지던, 채 시인이 되기도 전에 철쭉 그늘에서 자살했다는 천재시인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문우들이 습작을, 진주 시내에서 그 당시 유명하던 시화를 전시하곤 하던 어느 다방에 걸어두었다지만 그것도 풍문인지 나는 그 천재시인의 시 한 줄도 읽을 영광을 누리지 못했고 그의 전설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전설 속에서 나는 시를 만났고 그 전설 속에서 명멸해간 많은 시인들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시집을 옆에 끼고 진주의 작은 산등성이를 오르곤 하던 대학 시절, 산철쭉 사이에서 랭보나 이성복을 읽을 때면 그 순간의 나는 적어도 나에게는 전설이었다. 그러고 보니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시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전설들을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존재.
물산이 풍부하다고 일컬어지는 진주의 시장들. 특히 중앙시장. 비단전과 생선전에서 그릇전과 인삼전, 계란전, 채소전. 말린 채소 불린 채소, 싱싱한 김치시장. 그 사이사이에 자리잡고 있던 시장통의 식당들. 돼지뼈가 삶아지고 있던 무쇠솥이며 시래기가 설설 끓고 있던 화덕 사이를 걷다보면 이곳이 천국이지 싶었다. 아침마다 트럭들이 와서 부려놓고 가던 채소들, 그런 채소들을 지게에 지고 가던 짐꾼들, 그들 사이를 밥과 반찬이 담긴 커다란 쟁반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던 아짐들, 고무다라이에서 요동을 치던 미꾸라지들, 못이 박힌 목판에다 가오리를 걸고는 빠른 동작으로 껍질을 벗겨내던 아저씨들, 물에 담긴 도라지, 삶은 나물들, 마른 갈치며 메추리알, 시뻘건 김치와 마른오징어 무침, 그렇게도 많은 먹거리들이 진주 인근에 있는 산에서 바다에서 밭에서 그곳으로 오곤 했다. 오래된 식당에서는 진주 식으로 만들어내던 비빔밥(더운 국에 토렴을 한 흰쌀밥 위에 나물과 육회를 고명으로 얹은 비빔밥, 모양이 하도 고와서 꽃밥이라고도 한다)과 선짓국을 담아내고 한?에서는 대구탕을 끓여대기도 했고 고기와 생선으로 만든 해장국들이 배고픈 시장 사람들에게로 배달되기도 했다. 이렇게 생생한 생명들이 요동을 치는 곳에서 나는 어느 날 월경의 날을 맞이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어머니들은 월경이 무언지 딸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무언가 나에게 일어났는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중앙시장을 빠져나와 시외버스 터미널을 지나서 강둑으로 불안에 사로잡혀 걸어가던 나. 그리고 강둑에 도착했을 때 불안은 두려움으로 변해서 강바람 속에 나를 가두어두고 나는 울고 말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지금도 여자인 나라는 태생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 때 그 강변을 떠올린다. 그때 흘린 눈물을 지금 역시도 흘리고 있다는 느낌, 존재가 변해가는 두려움, 그 강변이 나에게 가르쳐준 근원적인 인간의 두려움. 지금도 시장에서 급하게 뛰어가는 여자아이를 보기라도 하면 혹, 저 아이에게도 어떤 새 시절이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공자연.
이제 그 강을 막아 만든 호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발굴을 하던 때, 발굴 유적지는 유프라테스 강에 댐을 세우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인공호수 바로 옆에 있었다. 인공호수가 생긴 까닭으로 유적지의 거의 반은 물에 잠긴 상태였다. 인공호수가 내려다보이는 BC 2000년경의 폐허도시에서 그 호수를 내려다보며 나는 내 고향에 있는 진양호를 떠올렸다. 인공호수. 인공자연 앞에서 놀이와 휴식을 즐기는 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상 현대인들이 처음일 것이다. 거대한 관개공사, 운하 등등, 자연을 대규모로 조정하는 힘을 키운 인류가 인류에게 선사한 인공자연. 진양호는 현대라는 시간에 어른이 되어가던 나에게 휴식을 준 인공자연이었다. 진양호로 가는 버스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호수는 보였다. 언젠가부터 진양호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에 외팔이 아저씨가 솜사탕을 팔고 있었다.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카세트테이프에서는 조지 해리슨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라는 노래가 언제나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공호수에서 듣는 삶의 섬세한 손가락인 기타에 대한 노래. 그 사이사이, 물결은 흔들리고 천막을 쳐두고 플라스틱 의자를 내놓은 유원지 카페에 앉아 있던 대학을 막 졸업한 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갈 곳은 마땅찮았던 어설픈 청춘은 인공호수를 바라보며 이 불분명의 가슴에 안고 어디론가, 길을 떠나야 했다. 이 인공자연 속에서 나의 삶은 계속되리라, 도시의 빌딩과 빌딩 사이, 엘리베이터와 쇼핑몰 사이, 버스와 기차와 비행기 사이사이, 그리고 한 개인에 불과한 나는 그 거대함 앞에서 다만, 내 기타가 울릴 때까지, 어디론가 걸어갔다가 돌아오곤 할 것이다. 그리고 인공자연이 건설되고 또 건설되어도 아직 진주를 지나가는 강, 시작과 끝을 주관하는 강, 강이 사라지면 내 고향은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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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1964년에 진주에서 태어나 1987년 시인으로 등단하고 그 이듬해에 진주를 떠났다. 지금은 독일 뮌스터라는 도시에서 18km 정도 떨어져 있는 알텐부르크라는 곳에 살고 있으나 당시 진주를 떠날 때 이렇게 먼 나라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진주가 그리울 때면 독일에서도 밥을 한 상 차려놓고 열심히 먹는다. 돌아갈 때가 언제일지는 지금은 모른다. 허긴 우린 모두 고향을 등진 호모 모빌리쿠스들이 아닌가. 우리들이 길에서 행할 만찬에 축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