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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 -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르헨티나 할머니』
그런 장소가 있다. 시간이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 나는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빈의 시내에 위치한 중앙묘지.
젊은이와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하이델베르크 도심에서 버스를 타고 10분만 남쪽으로 내려오면 거짓말처럼 죽음의 세계가 버티고 있었다. 깊은숨을 들이쉬어 보면 묘지의 공기에는 점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깥의 공기보다 훨씬 천천히 흐른다는 느낌을 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
그런 장소가 있다. 시간이 고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 나는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빈의 시내에 위치한 중앙묘지.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의 묘가 있어 ‘음악가들의 묘지’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그들의 묘는 정문 근처에 위치한 32A 구역에 모여 있다. 그러나 사실 중앙묘지의 규모는 240헥타르나 된다.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그 작은 구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간이 온통 침묵에 싸여 있는 것이다.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 오후. 묘지 사이로 난 길을 천천히 걷다가 문득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담장 너머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차량들, 활기 넘치는 시내 풍경이 보이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은 오롯이 적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고작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말이다. 마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에 발을 디딘 것만 같았다. 약간은 두려우면서도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나른한 기분. 시간에 밀도가 있다면 이런 것이리라.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으면서 나는 어느새 빈의 중앙묘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이란 정말 죽는 거네, 아주 평범했던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거네. 그 지지부진하고 따분했던 감정들이 모두 착각이었어. 깊은 슬픔 속에서도 매일, 신선한 발견이 있었다.
이 책은 주인공 ‘미쓰코’가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열여덟 살 때의 기억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엄마의 죽음으로 그녀는 아빠와 단둘이 남겨지게 된다. 그녀의 아빠는 비석 조각가였다. 한때 장인으로 대접받던 석공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미쓰코의 아빠 역시 일감이 없어 작업실의 문을 닫는 날이 많아졌다. 당시 사립학교에 다니던 미쓰코는 학교와 가까운 친척 집으로 옮겨 하숙을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겨울,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다. 그녀의 아빠가 ‘아르헨티나 빌딩’에 드나든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미쓰코는 그곳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미쓰코가 살던 동네 어귀에는 다 쓰러져 가는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 건물을 ‘아르헨티나 빌딩’이라고 불렀다. 그 곳엔 아주 오래전부터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젊은 시절,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학생들에게 아르헨티나 탱고와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그러다 점점 배우는 학생들이 없어지면서 그녀는 그 건물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고, 한동안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돌았다가 사라졌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건물과 함께 그녀도 나이를 먹었다. 동네 아이들은 이제 그녀를 ‘아르헨티나 할머니’라고 불렀다.
왠지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차분했다.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들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 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피리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진다. 저 너머의 먼 세계에,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집들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나날의 잡다함이 있고, 시끌시끌함이 있는 세계가.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매부리코에 세모꼴 콧구멍, 짙게 그린 아이라인, 정열적인 빨강 입술. 낡아 빠진 검정 모직 원피스에 가짜 진주 목걸이를 한 그녀,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이름은 ‘유리’(*일본어로 나리꽃이라는 뜻)였다. 문을 열고 나온 유리는 미쓰코를 보더니 꼭 끌어 안아준다. 그리고 자신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노라며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유리의 말을 들으며 미쓰코는 왈칵, 눈물을 쏟는다. 현관 앞에서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눈물과 함께 솟아나는 행복했던 추억들. 그것은 색다른 입문이었다.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지는 따뜻한 경험. 그랬다. 아르헨티나 할머니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녀를 따라 폐옥처럼 무너져가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 3층의 방 깊숙한 안쪽에 미쓰코의 아빠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천을 둘둘 말고 고다쓰 앞에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어, 미쓰코.”
“연락을 해 줘야지!”
나는 화가 나서 말했다.
“미안하다. 하려고 했는데, 만사가 다 귀찮아서.”
(중략)
“거북하기도 하고, 아내를 잃은 사내가 이 나이에 여자네 집에 들어앉았으니 딸에게 뭐라고 말하겠어.”
“그러게, 하필이면.”
나는 목소리를 죽였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냐고. 아빠가 온 동네 웃음거리 된 거 알아?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떠들게 내버려 둬라.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아빠는 슬쩍 위쪽을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얼룩투성이 어두침침한 천장밖에 없었지만, 아빠가 느끼는 행복은 조금 위에 있는가 보네, 하고 나는 별 이상한 일에 가슴이 찡해졌다.
이렇게 해서 세 사람의 이상하고도 자연스런 동거가 시작된다. 평생 묘지의 비석을 조각했던 미쓰코의 아빠는 아르헨티나 빌딩에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보낸 지금, 그에게는 이미 예전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을 견뎌 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 건물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뒤로 멀어져 간 화려한 시절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들과 함께, 소박하고 조용하게 존재하는 기쁨’이었다. 오랜 세월 그 집에서 지내온 ‘아르헨티나 할머니’(실제 그녀의 나이는 겨우 50세였다)에게도 똑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말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어떤 것. 세파에 지치고 마음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어떤 것. 이성과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냥 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어떤 것.
유리 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늘 그렇듯이 압도적이리만큼 순수해서, 나는 “어머니와는 언제까지 살았는데요?”, “국적은요?” 하고 묻지 못한다. 게다가 유리 씨는 옛날 일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무척 슬픈 표정이다. 그 슬픔은 어찌 보면 다가가기 어려운 무언가를 발산하는 황홀한 것이어서, 현실로 돌아오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느 추운 겨울날, 셋이서 고다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차를 마시다가 미쓰코는 문득 행복하다고 느낀다. 깜박 졸다가 눈을 떠보면 스토브에서 비쳐 나오는 오렌지색 불빛과 웅크린 채 자고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조용히 책을 읽는 아빠, 그리고 머리를 끄덕이며 졸고 있는 유리와 함께하는 평화로운 풍경들. 미쓰코는 깨닫는다. 구원받은 것은 유리가 아니라 자신과 아빠였음을.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된 유리가 심장 발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리 씨를 만났을 때도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왼팔이 저리다고 해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비듬 낀 머리칼도 이제는 불쾌하지 않았다.
“아유 시원하다. 미쓰코는 정말 천사야. 언제나 귀엽고 상냥한 나의 천사.”
유리 씨는 방실방실 웃으며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부끄러워서 유리 씨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따스한 등으로 나지막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하게 뛰는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내게 마지막 말을 선사하듯, 분명하고 부드러운 소리. 그 소리는 아직도 내 귓가에 자장가처럼 남아 있다.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왠지 세상 어딘가에 이런 장소가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에서처럼 그냥 모든 것들이 이해되고 저절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곳 말이다. 『필름 속을 걷다』라는 책을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어떤 이들은 그저 슬픔을 타고난다.’ 장국영의 삶을 추억하는 글이었다. 꼭 슬픈 일이 있어서 슬퍼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생에 슬픔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사람. 그의 슬픔에는 이유가 없다. 저자는 생전에 그가 살았던 카두리 애버뉴의 저택을 방문하고 오는 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카두리 애버뉴에서 5분만 내려오면 소란스러운 홍콩에서도 시끄럽기로 유명한 몽콕의 재래시장이었다. 번잡하게 출렁대는 삶과 적막하게 고인 죽음이 그렇게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깨를 겯고 있었다.
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그냥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우울해지는 순간들. 혹은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냥 무심코 하게 되는 행동들. 그건 아마도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논리나 근거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그런 것들은 살아가는데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읽으면서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온전히, 그저 그렇게. 그런데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이유나 근거를 대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혹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답은 이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시간의 경계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쩌면 그것은 일상의 한 귀퉁이에 늘 그렇게 매달려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시모토 바나나 글/요시토모 나라 그림/김난주 역 | 민음사 | 2007년 04월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긴 소녀가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특유의 동화적인 색채와 섬세한 문체로 그려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요시토모 나라가 이 작품을 위해 표지화를 포함한 15점의 회화를 그려 특별함을 더했다.
<요시모토 바나나> 글/<요시토모 나라> 그림/<김난주> 역7,200원(10% + 5%)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잠긴 소녀가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수수께끼의 여인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특유의 동화적인 색채와 섬세한 문체로 그려냈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일러스트레이터 요시토모 나라가 이 작품을 위해 표지화를 포함한 15점의 회화를 그려 특별함을 더했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키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