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를 거스르는 것, 흐르는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는 것, 세상이 그렇다고 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는 열정과 함께 지성이 필요하다. 용기만 있다면 그 주장은 설득력이 없고, 지성만 있다면 그것은 불이 붙여지지 않는 다이너마이트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유일한 정답처럼 여겨지는 지금, 장하준 교수는 지성과 열정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설득한다.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지는 신자유주의 말고도 모두가 함께 잘살 수 있는-이미 수많은 실험으로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기는-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들을 과거에서 찾는다.
장하준 교수는 뛰어난 학자이면서 자신의 주장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쓸 수 있는 보기 드문 귀한 필자다. 그가 교수로 일하고 있는 영국 역시 학자가 대중들을 위해 글 쓰는 것을 탐탁잖게 여기는 분위기라고 했다. 연구 실적에도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가 바쁜 시간을 쪼개 칼럼을 기고하고, 책을 내는 건, 그것이 학자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연구 논문이나 보고서는 전문성을 지닌 소수의 독자들을 위해 쓴 책이기에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그래서 쓰게 되었다.
새 책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인터뷰하기 며칠 전 작은 사건이 있었다. 국방부에서 23종의 불온도서를 발표했는데, 그중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올라 있었던 것.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국방부가 선정한 불온도서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셨는지요.
처음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에 그런 일이 꽤 많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불온도서라고 발표된 후에 책이 더 많이 팔리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웃음) 아무리 개방된 사회라도 금서는 있어요.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노골적으로 나치를 찬양하는 책은 출간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비롯해, 불온도서로 지목된 책들이 다 베스트셀러고,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은 책들이잖아요. 그래서 도리어 독자들이 책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 같아요. 그런 목록을 발표한 단체에 대해 비판도 하고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적이 되고 자유로워졌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에 반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교수님의 대학시절에 금서로 지정된 책들이 많았지요. 『오적』이나 『자본론』과 같은 책들이요.
그때는 지금과 무척 다른 분위기였어요. 비장한 기분으로 몰래몰래 읽었어요. 금서 때문에 덕을 본 책으로 『자본론』을 꼽을 수 있어요. 『자본론』은 누가 읽으라고 했으면 절대 안 읽을 책입니다. 너무나 길고 어렵고 재미가 없어요. 그런데 금서라고 하니까 겨우겨우 -저는 전공이 경제학이기도 해서 꼭 읽어야 했지만- 다 읽었어요. (웃음) 제 또래들 중에 이런 분들 아마 꽤 있을 겁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사다리 걷어차기』 작가의 말에서 ‘연구하고 글을 쓰느라 바쁜 아빠를 이해해 준’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동안엔 좋은 아빠와 남편 노릇을 못합니다. 하나에 몰두하면 주변을 잊어버리는 성격이라,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써야 할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하죠.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짧은 시간에 글을 써야 해서 힘들?어요. 그리고 계약을 2006년 8월인가 9월에 해서 다음해 7월에 영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원고는 2월에 넘겨야 했어요. 제가 학자로 많은 논문을 썼지만 역시 대중을 위해 글을 쓰는 건 쉽지 않더군요. 가급적 쉽게 읽히도록 글을 쓰자는 생각으로 매달렸습니다. 노력을 많이 했어요. 기본적인 개념도 가급적 설명하도록 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를 많이 들었죠. 예를 들어, ‘여섯 살 먹은 내 아들은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강의에서 유치산업론을 설명하면서 여러 번 들었는데, 다들 쉽게 이해하더군요. 그래서 책에도 썼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제가 대중을 위해 처음으로 쓴 책입니다. 제가 다른 경제학자들보다 글을 쉽게 쓴다고 자부하지만, 그때까지 썼던 글은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한국에 나왔던 몇 권의 책들(『개혁의 덫』『쾌도난마 한국경제』『장하준, 한국경제 길을 말하다』)은 제가 직접 썼다기보다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글을 모았거나, 대담을 정리하거나, 인터뷰거나 했거든요. 제가 대중을 위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쓴 책은 아니지요. 그래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저에겐 특별한 책이에요.
|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펴낸 장하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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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학자들이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을 쓰는 것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있는데요. 영국은 어떤가요?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미국 다 비슷한 분위기인데,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처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원로급 학자나 하지 젊은 학자들은 하기 힘들죠. 해봤자 연구실적 반영도도 낮고. 학자는 연구하고 공부를 하는 게 일이지만 대중들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학자가 해야 하는 사회 공헌이라고 봅니다. 연구 실적은 이 책을 쓰느라 떨어졌을지 몰라도 제겐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해야 할까? 장하준 교수는 자신이 한국에 낸 책 중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많이 읽히길 원했다. 그런데, ‘불온도서’로 지목됨으로 다시금 책이 독자들 사이에 화제에 오르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책을 다시 펴서 읽는 독자들도 있고, 새롭게 장하준이라는 학자를 발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국방부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다시 읽게 한 최대의 공훈자다. 사람의 심리는 추천도서보다 불온도서에 더 끌리기 마련이니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해 이번에 나온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사다리 걷어차기』를 비롯한 책과 논문을 읽고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네가 비판한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정책입안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매뉴얼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고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하고 같이 썼습니다. 저는 산업, 무역 쪽을 담당하고 그레이블 교수는 자기 전공인 금융과 거시경제학에 대해 썼습니다.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개발도상국의 정책입안자나 개발정책을 연구하는 사람,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사람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은 영어로는 2004년에 나왔습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보다 3년 전에 나왔는데, 한국 독자들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먼저 읽었어요. 그래서 비교적 어려운 내용이지만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고 기초적인 것은 다 알고 있는 상태니까 책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독자들은 어떻게 보면 운이 좋은 건지도. (웃음) 이 책이 먼저 나왔으면 ‘굉장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책이다.’라고 던져버렸을지도 모르죠.
책 구성도 독특합니다. 한눈에 논리 구조를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있고, 핵심 내용은 굵게 표시해서 정말 바쁜 사람은 굵은 부분만 읽고도 책 전체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점이요.
보통 때는 그렇게 안 씁니다. 이 책은 일부러 그렇게 했습니다. 정책에 대해 연구하다보니 관리들을 많이 만나요. 그런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느 나라의 관리들도 사무관급들은 30페이지 논문도 필요하면 읽어요. 국장이 되면 다섯 페이지 서머리가 아니면 읽을 시간이 없거든요. 돌볼 일이 워낙 많으니까. 장관이 되면 한 페이지 이상은 읽기 힘들어요. 국회의원은 반 페이지 정도. 바쁜 분들은 굵은 부분만 읽어도 내용 파악이 되고,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밑의 내용을 읽으면 되고, 좀 더 전문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책 뒤에 수록한 참고문헌을 찾아보면 되도록 글을 구성했습니다.
경제 관료들 중에 이 책을 읽은 분들이 계신가요?
읽었다고 저한테 말씀하신 분들이 꽤 계세요. 그런데 정책에 얼마나 반영할 진 모르겠어요.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이미 과거에 했던 것들입니다. 과거에서 대안을 찾으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책에 나온 정책들 중에 굳이 다른 나라들이 안 썼는데 우리가 이론을 발전시켜서 제안한 것은 국제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 부분입니다. 이것도 저희(장하준 교수와 그레이블 교수)만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이미 많이 논의가 됐던 부분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정책입안자들이 ‘대안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사실 대안이 굉장히 많다는 거죠. 과거의 정책들만 제대로 살펴도 수많은 대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게 이론으로 실험하는 겁니다. 과거에 그런 실험을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경제학자라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죠. 과거의 정책은 그 당시 사람은 고통을 받은 사람도 있고 손해 본 사람도 있지만 역사에서 이미 실험을 했단 거죠. 18세기 영국에서 최근의 러시아까지. 그것을 보고 배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정책을 가지고 하는 실험은 실험실에서 흰 쥐로 하는 실험과는 다릅니다. 정책 실험은 적게 할수록 좋습니다. 왜냐면 실제로 사람들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과거를, 역사를 자주 돌아보는 편입니다. 그런데 요즘 경제학 하는 분들이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어요. 경제학을 물리학 같은 과학으로 보는 게 주류거든요. 이미 이론에 다 있는데, 뭐 하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떠들어 대냐, 이런 분위기거든요.
그런데 IMF나 세계은행에 반대하시는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 중에 ‘붕어빵 정책’이라는 게 있어요. 틀이 하나 있고, 어느 나라나 그걸 하라는 거예요. 그런 걸 비판을 하면 ‘독일의 물리학과 인도의 물리학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경제학은 과학이다. 독일에서 맞으면 인도에서도 맞고, 가나에서도 맞다’고 말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에 반대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이론의 타당성을 규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라고 주장하니까 주류에서 많이 벗어난 셈이죠. 공저자인 아일린 그레이블 교수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죠. 전체 경제학자 중에서 5%, 많아야 10% 정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그런 걸 볼 필요가 없다고 하시죠.
교수님이 지금껏 내신 책들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요?
첫째는 쓰는 책마다 의도하는 독자가 달랐어요.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정책입안자를 겨냥한 거고,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일반 독자를 겨냥한 거고, 『사다리 걷어차기』는 학계를 위해서 쓴 거고.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전달할 필요가 있었어요.
또, 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소수예요. 백 명 중 다섯 명도 안 돼요.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진 95분은 한 번씩만 이야기해도 95번이 반영이 되지만 저는 열 번을 해도 그분들의 반의반도 반영이 안돼요.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이야기를 해야 제 목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하는 거죠.
주류의 의견에 반론을 제시하는 사람,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생각할 때 맞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데,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아요. 60년대, 70년대에는 제가 했던 이야기가 개발도상국에서는 오히려 주류였었죠. 아마 제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주류 경제학자’라는 소릴 들었겠죠. (웃음) 저는 선천적으로 반골기질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말 잘 듣는 모범생이었거든요. 저는 경제학자로 내가 하는 주장이 다 맞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이 하나밖에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또, 학자의 책무는 남들이 어떻게 이야기하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학생들을 훈련시킬 때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쳐요. 무조건 딴죽만 걸라는 건 아니에요. 일단 기존에 있는 것-주류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죠. 그다음에는 노벨상을 탄 사람이든, 국제적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든 의심을 하라는 거죠. 거기서 학자적인 창의성이 나온다고 봅니다.
학자가 꼭 가져야 할 소양 중 중요한 것이 다양성을 포용하고, 겸손함을 가지는 건데, 그걸 갖기가 참 힘든 것 같습니다.
학자는 자기 의견을 가지고 먹고사는 사람이니까, 자기 의견을 비판받을 때 기분 좋을 사람은 없죠.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볼테르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 의견에 100% 반대하지만, 당신이 당신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위해서는 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요. 그 말이 정답이 아닐까요. 의견이 다를 수 있고, 거기에 대해 논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의견이 맞으니까 너는 얘기도 하지 마라,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죠. 다양성을 존중할 때 학문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워낙 복잡하기에 다양한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보는 방식으로만 봐도 곤란하고, 다른 분들이 하는 방식으로만 봐도 곤란합니다.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타협’ 역시 한국 현실에서는 역시 힘든 일인데요.
타협을 해야죠. 아니면 반대파를 완전히 다 쓸어버려야 하는데 그럴 수 있나요? 인간 사회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능력도 다르고, 가치도 다르고 원하는 것도 다르고……. 그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통제할 수 없거든요. 지금 힘들고 안 된다고 포기해서는 안 되죠. 지금 타협에 성공한 나라도 처음부터 쉽게 타협했던 건 아니거든요. 좋은 예로, 스웨덴이 1930년대 대타협으로 노사관계가 안정되었는데, 20년대에는 스웨덴이 세계에서 파업률이 제일 높은 나라였습니다. 타협을 하지 않으면 문화대혁명처럼 반대파를 몰아내거나 칠레의 피노체트처럼 총을 쏴 죽여 버리는 해결책밖에 없어요. 저는 그런 것에 절대 반대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될지는 계속 해 나가봐야 알겠지만 타협이라는 제 목표는 뚜렷합니다.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는 지금의 청년 세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나라만큼 사는 나라 중에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나라가 또 어디 있어요? OECD 국가 중 최고예요. 하다못해 터키보다 비율이 높아요. 복지제도도 잘 안 되어 있고.
정책과 제도를 바꿔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다면 이들의 희생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표본이 되는 거죠. 앞으로 계속 그렇게 될 테니까. 끔찍한 일이지만. 그 세대가 희생양이 되는 게 미안하죠.
책에서 제안한 수많은 대안들의 결론을 거칠게 말하자면 ‘잘살기 위한’ 거잖아요. 교수님께서 제안하신 대안들이 공평하고 공정하게 시행되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근본적인 질문이죠. 힘 있는 나라들이 그렇게 잘 안 해주거든요. 싸워서 쟁취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 학생들이 ‘희망이란 없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희망을 제대로 가지려면 현재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장벽들이 있는데 모른 척하고 ‘하면 된다’라고 하면 할 수 없잖아요? 현재 선진국들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막고 있는지를 알아야 그다음에 극복도 하는 거니까. 장기적으로 인간 사회는 수많은 것을 극복해 왔어요.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가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갔고요, 50년 전 후진국들의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감옥에 갔잖아요. 20년 전에 남아공이 인종차별정책이 철폐되고 만델라가 풀려날 줄 누가 알았을까요? 단기적으로 보면 굉장히 어려워보여도 장기적으로 놓고 보면 사회가 계속 발전을 합니다. 그걸 빨리 하려면 현재 문제가 뭔가, 대안이 뭔가 계속 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장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말이죠.
우리는 왜 경제 책들을 읽고, 세계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민주주의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 우리의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거든요. 국민 노릇이 사실 제일 힘듭니다. 쉬우려면 그것보다 쉬울 것이 없고요. 대통령이나 공무원들은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지만 누가 국민 노릇을 제대로 하는지 감시하나요? (웃음)
농림부 공무원이면 농림부 일만 신경 쓰면 되지만 국민은 농산물도 신경 써야지요, 교통도 신경 써야지요, 건축경기도 신경 써야지요, 유가도 신경 써야지요, 알아야 할 게 많죠. 민주주의가 되려면 국민들이 기본적인 정보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경제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경제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경제는 전문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잘못하면 전문가들에게 휘둘리기 쉽습니다. 공식 몇 개 쓰고 통계 막 뿌리면 ‘맞나 보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 것에 안 당하려면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공부를 하는 게 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국민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책을 쓰는 게 학자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부터도 처음에는 왜 이런 걸 썼는데 이해를 안 해줄까,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내가 보기에는 옳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왜 딴 짓들을 할까, 그랬어요. 그런데 그건 학자들의 잘못이지 국민이나 정책입안자들의 잘못이 아니에요. 언제 알아듣게 제대로 이야기해줬나요? 학자로서 아쉬운 점은 공부를 할 때 대중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딴에는 아무리 쉽게 쓴다고 해도 일반 대중들은 ‘모르겠다’는 소리가 나오는 거죠. 양쪽이 다 의무가 있어요. 학자들은 최대한 쉽게 쓸 의무가 있고, 독자들은 조금 귀찮더라도 주권 있는 시민으로 공부할 의무가 있습니다.
장하준의 경제학에는 인간이 중심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는 쉽게 절망도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불편한 진실과 고통과 희생, 타협의 끝에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미래다. 과거부터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한 지성과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