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USA투데이》는 ‘최근 25년간 사라진 25가지’를 정리해 보도했는데, 그중 15위가 교양이었습니다.
동감하시나요? 여기에 대한 답은 입장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전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지 않습니다. 거의 매일 같이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죠.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교육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당연히 알고 있었던 지식을 요새 사람들이 모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예를 들어, 요새 사람들의 한문 실력은 백 년 전 교양인들에 비하면 형편없죠. 하지만 그들은 기본 지식이 사서삼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옛 사람들이 몰랐던 걸 압니다. 백 년 전 이 땅엔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극히 제한되어 있지만, 요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 교양의 내용도 달라지는 겁니다.
하지만 ‘교양의 죽음’처럼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D모 영화의 토론자 중 한 명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몇 백 년 전 사람입니다!”라고 외쳤을 때, 전 그냥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반교양’의 시꺼먼 실체를 봤습니다. 정치 기사 댓글란에 툭하면 등장하는 ‘좌파’라는 단어 사용의 과격한 자유로움을 볼 때도 비슷한 걸 느끼죠. 최근 차별금지법안과 관련된 많은 토론자들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우리가 쌓은 지식을 뻔뻔스럽게 밟아 뭉개고 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가 접하는 건 단순한 무지가 아닙니다. 원론만 따진다면 무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요. 여기서 보이는 건 그냥 무지가 아니라, 토론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초적인 지식과 교양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토론이라는 것에서 공통된 지식이라는 것은 공통된 언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가장 편한 해답은 입이 달린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은 꼭대기의 몇 퍼센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요. 거기에 대해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으면서요. 질적 하락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거대한 해답은 교양이라는 것이 원래부터 그렇게까지 힘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교양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세상에 대해 거의 모든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21세기 초의 세계는 보편적인 교양이 커버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넓죠. 세상이 바뀌어 지식을 더욱 편하게 보존하고 전수하는 기술이 발명되지 않는 한, 우린 일반교양을 이전처럼 믿고 의지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우린 슬슬 그에 대처할 만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아직 일반교양은 쓸만해요. 이전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안품들도 나와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전 맨 위에 예로 든 “몇 백 년 전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언을 비교적 편하게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중·고등학교 수준의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토론을 한다고 나왔으면서 그전에 컴퓨터 앞에서 자판 몇 개를 두드리면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지식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않은 나태함에 대한 비난입니다. 편견과 나태를 통제할 수 있는 있는 약간의 예절과 부지런함만 갖추어도 무의미한 충돌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은 꽤 좋아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