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혜윤 PD의 그들은?
진중권과 상상의 도서관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 시대의 악동 진중권은 이미 오래전 우리에게 ‘상상의 도서관’에서 길을 잃는 것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의 책 『미학 오디세이』를 읽다 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목차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를 여행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목차들.
그해 겨울, 대만에서 자랐으되 중국어를 못하고 인터내셔널 스쿨을 다녔으되 영어를 못하고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으되 한국어가 시원치 않았던 (나는 그가 수줍게 내뱉는 한국말을 들을 때마다 ‘참으로 이그조틱한 혀로군!’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당시 그의 꿈은 한겨레문학상은 수상하고 노벨문학상은 거절하여 분단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내 동료 PD가 나에게 신중하게 말했다. “혜윤, 보르헤스를 한번 읽어봐.”
그래서 어느 겨울 밤, 늦은 귀가길에 나는 기어이 그의 가방에서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꺼내 버렸고 우리는 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어둑한 조명 아래서 얼굴을 맞대고 보르헤스의 글들을 읽었다기보다도 들여다보았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가 포장마차의 꼬치 어묵을 호호 불며 나눠 먹는 동안 포장마차의 안주인은 동전을 딸랑거리며 포장마차 기둥에 걸어 놓은 거울을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꼬마전구 불빛 아래서 거울은 한없이 따스했고 그녀 얼굴 역시 형체 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어묵과 튀김을 파는 한편 촌음을 아껴가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포장마차의 안주인이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녀는 어묵을 다 팔아치우면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어디로 갈 요량이란 말인가?” 나는 그의 귀에 대고 이렇게 쫑알거리다가 그 직전에 응시했었던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의 문장을 불현듯 떠올렸다.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는 불빛과 불빛 아래 참으로 비현실적인 따스한 표정 때문이었다.
현관에는 거울 하나가 있다. 그 거울은 겉모양을 충실하게 복제한다. 사람들은 이 거울을 통해 도서관은 무한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나는 그 반짝거리는 표면이 무한을 반영할 뿐 아니라 그것을 확증시켜 준다고 상상하길 좋아한다. 빛은 등이라는 이름을 가진 몇 개의 둥근 과일로부터 유래한다. 각 육각형마다 서로 교차의 형태를 이루는 두 개의 등이 있다. 등들이 발하는 불빛은 충분치 않으나 꺼지지 않고 항상 켜 있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 나는 한 권의 책, 아니 아마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찾아 방황을 했다.
한 권의 책, 아니 책 목록에 대한 목록을 찾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A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A가 있는 장소를 지시하고 있는 B라는 책을 참조하는 이고 B라는 책을 찾기 위해 먼저 C라는 책을 찾아 영원히 떠나며, 스스로 상상의 도서관을 짓는 사람들이고 스스로 불완전한 사서가 되는 사람들이고 스스로 기억의 궁전을 짓는 사람들이고 세계의 무한을 믿는 사람들이고 세계가 무한히 확장됨을 믿는 사람들이다.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처럼 나는 젊은 시절 여행을 했다.”라는 말은 그날 밤 언덕배기 위 아파트 빈방을 향해 걸어가는 내 등을 비추는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되어 나를 덮어 주었다.
며칠 뒤 나는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사서는 사과를 베어 먹어 가며 마루바닥에 엎드려 읽었다. 책을 읽는 동안 사과는 변색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변색된 사과는 나를 슬프게 하지 않았다.
도서관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불을 밝히고 고독하고 무한하고 부동적이고 고귀한 책들로 무장하고 쓸모없고 부식하지 않고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바로 앞에서 ‘무한하고’란 말을 썼다. 나는 수사학적 관습에 따라 이 형용사를 삽입시킨 게 아니다. 내 말은 세계가 무한하다고 생각하는 게 결코 비논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만약 어떤 영원한 순례자가 어느 방향에서 시작했건 간에 도서관을 가로질렀다고 하자. 몇 세기 후에 그는 똑같은 무질서(무질서도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 속에서 똑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나는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도서관의 모든 책들은 동일한 원소들로 이뤄져있다. 띄어쓰기에 따른 공백과 마침표와 쉼표, 그리고 철자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도서관 열람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도서관이 거대하다 할지라도 똑같은 두 권의 책은 없다’는 것이다. 상상의 도서관이 있는 한 말이다. 그런고로 상상의 도서관이 있는 한 세계는 무한하다. 그런고로 상상의 도서관 안에 있는 한 나는 무한히 확장된다.
그러므로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은 무한을 향해 고독 속에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악동 진중권은 이미 오래전 우리에게 ‘상상의 도서관’에서 길을 잃는 것에 대한 열쇠를 제공했다. 그의 책 『미학 오디세이』를 읽다 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목차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를 여행하게 할 만큼 매혹적인 목차들. 여행하다가 길을 잃게 만드는 목차들. 길을 잃더라도 계속해서 더 알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목차들.
1993년에 나온 그의 『미학 오디세이』 1편은 『괴델, 에셔, 바흐』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원한 황금의 노끈’이란 부제를 가진 『괴델, 에셔, 바흐』는 즉흥 오르간 연주의 대가였던 바흐가 하룻밤 사이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열다섯 개의 방안을 돌아다니며 너무나 훌륭한 피아노 즉흥 연주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비록 무한한 불가사의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바흐의 모든 곡들은 결속하는 통일적인 (수학적) 원리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린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는 바흐와 수학자 괴델, 화가 에셔를 황금 노끈으로 묶어 놓는데 수학자 괴델에 대해 바친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괴델에게 수학적 정리가 진주라면 증명 방법은 진주조개라는 것이다. 진주에 비교하는 것은 그 정리의 광채와 명료성 때문이며 진주조개와 비교하는 것은 그것의 내장에서 신비하고도 단순한 보석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치는 행위들에도 이 말을 바치고 싶었다. 우리의 애면글면함이야말로, 우리가 기를 쓰고 증명해내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내장에서 신비하고 단순한 보석을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진중권은 그와 마찬가지로 『미학 오디세이』에서 자기만의 영원한 황금 노끈을 엮는 작업을 시작했다. 가상과 현실이란 분석틀로.
(나는 개인적으로 『괴델, 에셔, 바흐』를 읽는 동안 아주 엉뚱한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했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때문에 에프게니 오게닌을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에프게니 오게닌 한 권을 다 읽기 전에 죽어가는 연인이 나오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책 『연애소설』을 기억하게 되었다.)
진중권 최초의 독서는 피아노 레슨을 다니던 그의 어머니가 부잣집에서 매일매일 한권씩 빌려다 주는 책이었다. 글자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딱지치기를 잘하기 위해 딱지의 글씨를 읽어내려 노력하면서부터였다.
“어렸을 때 우리 아빠가 누나에게 사준 《강소천 문학 전집》은 정말 좋아했어요. 『꿈을 찍는 사진관』은 지금도 기억나고 토끼를 따라 굴속에 들어간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정말 영향을 받은 것은 소년잡지들이었어요. 소년잡지들은 상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어깨동무》도 보고 《새소년》도 봤는데 만화 말고 기사를 좋아해서 ‘UFO, 히말라야 설인’ 같은 기사들을 즐겨 봤어요. 그리곤 마크 트웨인에게는 어려서부터 짓궂은 유머 감각을 배웠어요. 나는 지금도 주위 사람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많이 치는데 전적으로 마크 트웨인의 영향이라 할 수 있어요. 에드가 앨런 포우는 그 전집을 얼마 전에 다시 샀을 만큼 좋아했는데 「검은 고양이」도 좋았고 「황금벌레」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걸 읽고는 황금벌레의 암호 푸는 법 장면을 따라서 어려운 암호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돌려 풀면서 놀았어요. 하지만 애들하고 뛰어노는 걸 좋아하기보다는 혼자 다락방에서 공작하고 나무도시락에 연필로 그림을 그려서 비행기 그림 만들어 오려 놀고 전기 키트 조립하고 납땜질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다락방이란 공간은 나중에 그가 최고로 좋아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고 기꺼이 함께 느끼는 사람으로 발터 벤야민을 꼽는 계기가 된다.
“발터 벤야민은 그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다는 느낌을 받아요. 인간적으로 그냥 이해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나의 다락방은 콜라주 같은 것이었어요, 벽은 신문을 발라 놓았는데 거기에 수많은 기사들이 있죠. 그게 초현실주의적으로 다가왔어요, 사용되지 못한 물건들이 있고 같이 있을 수 없는 물건들이 뒤엉켜있고 어딘가 마법적이었죠. 벤야민의 『베를린의 어린 시절』을 읽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벤야민은 ‘결코 쓰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했어요. ‘모든 것에는 언어가 들어있다. 입이 없어 말하지 못하는 사물들에게 사물들의 메시지를 인간의 육성으로 전하겠다.’ 그런 의지가 있었던 거죠 .나 역시 결코 쓰여지지 않은 것들을 읽는 것에 매료돼요. 텍스트를 읽는다기보다는 사물을 읽는다는 것에 끌리는 거죠. 그러다 보니 간판 하나도 한국 사회를 말하는 것 같아요”
발터 벤야민은 『베를린의 어린 시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자신의 책에 대해 겸허하게 생각했다. 그것을 읽는 사람들을 나의 애독자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그들은 나의 독자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독자일 테니까, 나의 책은 콩브레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은 확대 유리알과도 같이 일종의 확대경에 지나지 않아, 그 덕분에 그들 자신을 읽는 방편을 내가 제공해주는 구실을 한다.”
벤야민 역시 모든 사람이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통해 무한한 확장되기를 소원했다. 다락방의 소녀였던 나 또한 진중권처럼 벤야민의 여러 문장에 가슴 깊이 공감한다. 이런 문장들이 그렇다.
* 어느 부고 - 아마 내가 다섯 살 때였을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이미 잠자리에 들어있는데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아버지가 내게 한 사촌의 죽음에 대해 시시콜콜 들려주셨다. 사촌이 매독으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아버지는 혼자 있기 싫어 들르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방을 찾아오신 것이지 나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다.
* 글자 익힘용 블록상자 - 이 블록상자에서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 자체, 즉 테두리 안의 글자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찾아내어 말이 되게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 속에 놓여 있던 어린 시절 전체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과거에 어떠한 식으로 걸음마를 익혔는지는 몽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걸을 수 있지만 걷는 것을 배우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식료품실 - 내 손은 열린 틈이라고 거의 없는 찬장의 좁은 틈새기로 마치 연인이 밤을 도와 몰래 숨어들어가듯이 비집고 들어갔다. 일단 어둠에 익숙해지자 아이 손은 아몬드나 설탕에 절인 과일을 찾아 나섰다. 사랑하는 남자가 키스하기 전에 소녀를 끌어안듯이 입이 달콤함을 음미하기 전에 촉각이 먼저 그들과 밀회를 나누었다.
* 회전목마 - 음악이 시작된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는 어머니로부터 멀어진다. 처음에는 어머니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렵다. 하지만 이내 아이는 자기가 얼마나 믿음직한지를 알게 된다. 그는 믿음직한 지배자로서 그에게 속한 세계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 크리스마스트리 - 크리스마스 날의 창문들은 고독과 노쇠와 결핍을, 즉 가난한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안에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찬장 - 커피용 스푼, 나이프꽂이들, 과일칼들의 기나긴 줄을 보고 있노라면 그처럼 엄청난 식기들에 대한 감탄과 더불어 우리가 초대한 손님들 또한 식기 한 벌과 마찬가지로 서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밀려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다락방에서 내려와 삼중당문고의 200원, 300원짜리 책을 사다 읽으며 사춘기와 성적 호기심의 시기를 겪어낸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 우연히 만나게 된 『공산당 선언』과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 크게 매료되었다. 1993년 『미학 오디세이』 1권을 짓기까지 그는 대학원을 4년씩 다니면서 노동자 문화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왕의 남자>의 정진영이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출연했던 김의성과 같이)에서 활동을 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벌었다.
“거의 매일 저녁 6시에서 8시, 8시에서 10시 이렇게 두 건씩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 문법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한 건당 50만 원 정도씩 받았어요. 집안이 가난했으니까 그 돈으로 생활비도 대고 유학 자금도 저축하고 빚도 갚았어요. 그러는 한편 『미학 오디세이』를 쓰기 위해서 다섯 개 나라의 자료를 구해 읽었어요. 독일어, 영어, 불어, 일본어, 러시아어로 된 자료를 닥치는 대로 구했고 지방 대학의 석사 논문까지 구하러 내려갔었어요. 당시 대우학술재단에서 만든 러시아 도서관 자료를 많이 복사했는데 때마침 북방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국교 관계가 처음으로 맺어져서 자료는 구할 수 있었죠. 러시아가 정보미학과 기호학이 발달했었거든요.”
94년에 그는 김포 국제공항에서 베를린으로 출국했다. 그때 그의 여행가방엔 남대문에서 싼 값에 산 옷이 잔뜩 들어 있었고 책은 한 권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베를린 자유대학 시절 본격적으로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시작했다.
“개가식 도서관 안에 들어가서 헤매는 게 좋았어요. 한 책이 다른 책을 알려주고 그곳이야말로 미로였죠, 그때 보르헤스의 상상력은 도서관의 상상력이란 걸 알았죠, 도서관에 가서 놀아본 사람은 다 알 거예요. 아무데나 가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면 다른 책의 인용으로 이뤄진 게 책이란 걸 말이죠. 그래서 독창성이란 건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자기 식으로 배치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어요. 들뢰즈 책을 보세요. 들뢰즈는 99% 남의 말을 다시 한 것입니다. 그의 독창성은 바로 배치입니다. 각주와 목록을 따라 컴퓨터 서핑할 때처럼 클릭하면서 비선형적으로 미로를 헤매는 놀이에 몰두할 때, 바로 그럴 때 뭔가 창의적인 생각이 나옵니다. 내가 미학을 한다고 해서 미학책만 보면 정보량이 늘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의 미감은 어떻게 발견되었는가?’ 이런 이야기의 해답은 미학책에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스의 『문명화 과정』에서 찾았습니다. 문명화가 되면 모여 살게 되고 그럼 시력, 청력 같은 자연 지각능력은 떨어지고 대신 근거리 지각이 발달합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의 냄새 같은 것에 민감해지는 거죠. 그러면서 에티켓이 생기고, 근거리 지각에 대한 쾌와 불쾌감정이 미학으로서 민감하게 발달하는 거죠. 상상의 도서관 놀이는 링크한다는 것입니다.”
진중권이 독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추천 도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진중권이 책을 읽는 이유는 감동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 이런 상상의 도서관 놀이를 통해서 그는 그런 책 한 권 쓰고 나면 ‘죽어도 좋아.’라고 말할 만한 책을 몇 권 찾아냈는데 노베르트 엘리야스의 『문명화 과정』,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아리에스의 『죽음 앞에 선 인간』 같은 책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그가 다른 무엇보다도 가상과 현실이란 주제에 오랫동안 천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 『황금가지』에서 볏단들은 베어지는 순간 꺅 하고 비명을 지른다. 볏단이 꺅 하는 순간을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데 다른 무엇보다도 ‘공감’이 필요해서다. ‘살해되는 신’이란 주제는 『황금가지』의 가장 핵심 테마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가 책상에 올려져 있던 걸작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지옥의 묵시록>이다.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변주곡인 이 영화에서 커츠 대령은 『황금가지』를 매일 읽는다.)
베를린에서 그는 그의 전공인 철학책을 사는 한편, 주인에게 버림받아 리어카에 실려 있는 낡은 책들을 헐값에 사기 시작하는데 그가 끌린 책들은 주로 그림이 많고 엽기적인 책들이었는데 이 책들은 그의 개구쟁이 기질을 짐작하게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법령집』, 이를테면 인간을 인도적으로 고문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샀었죠. 이제까지의 고문이 너무 잔혹하니까 사람 손목을 으깨는 고문 도구는 촛불 7개를 넘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정해놓는 책이에요. 막스 밀러 황제책이나, 마녀사냥에 관한 책, 마법에 관한 책들이 많았죠. 마법에 관한 책 중 재미있는 것은 루시퍼부터 온갖 악마들의 사인이 들어있는 책이 있어요. 나도 사인만 하면 악마와 계약할 수 있는 계약서가 딸려 있는 책이었죠. 그런 책들도 『미학 오디세이』 쓸 때 도움이 되었어요.”
그가 전공으로 택한 사람은 진정 천재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괴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이었는데 이를테면 이런 문제 ‘인간이 언어를 혼자 만드느냐?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냐?’에서 진중권은 후자를 택했고 ‘인간은 사회관계 속에서만 인간이다’라는 입장은 정치적으로는 공동체주의를 옹호하게 되고 경제에서도 최소한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며 미학에서 출발한 그가 결국은 정치 시사에 대한 코멘트를 하게 만드는 단서가 되었다.
“데리다 강의를 들을 때였어요. 강의 제목은 ‘세계의 법 비판’이었는데 교재는 「법의 힘」이란 데리다의 텍스트였어요. 그런데 강의 시간에 보니까 독일 바이마르 헌법의 실천을 놓고 학생들이 토론을 하는데 신문기사를 갖고 하는 거예요. 추상적인 텍스트와 오늘의 기사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이게 아마 내가 공부한 이론과 정치적 풍자가 만나는 지점인 거요. 그전까지 나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아카데믹한 교수가 되거나 이론서를 쓸 거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폭력과 상스러움』이란 정치 평론서 같은 걸 쓰게 된 거죠.”
진중권에게 정치는 풍자를 수단으로 하는 공격이다. 풍자는 나긋나긋하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해학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의 화법은 그를 이런저런 논쟁의 핵심에 서게 했다. 그런 그가 사적으로 요새 가장 빠져 있는 것은 비행이다. 그건 그의 어릴 적 다락방 체험과 독일 기차역에서 만난 한 권의 잡지 때문이다.
“비행은 어려서부터의 제 꿈이었어요. 나무도시락에 그림을 그려 오려 놀던 시절부터요. 동네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실물 크기의 글라이더를 만들어서 트럭으로 끌고 여의도 5.16광장으로 갔어요. 그날 비행은 실패했다고 들었지만 내 정서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어요. 그때부터 나도 비행기 모형을 더 열심히 만들었는데 훗날 보니까 라이트 형제가 처음 만들었던 것이랑 비슷하더군요. 그러다 독일 기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항공잡지를 보는데 초경량 비행기 값이 6천만 원으로 나와 있어요. 정말 근사해 보였고 가슴이 뛰었어요. 나도 나중에 돈 벌면 비행기를 한 대 가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어요. 계속 돈을 모아서 2002년에도 가능했었는데 그때 민노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이문옥 씨 선거자금으로 모은 돈을 다 밀어넣어버렸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작년에 교습비 300만 원을 들여 배웠고 솔로 비행에 성공했고 비행기를 사버렸어요. 요즘은 화성의 비행 허가구역에서 비행기를 타죠.”
비행을 할 때 가장 좋은 순간은 아무래도 이륙의 순간인 것 같다는 데 우리는 동의했다.
“활주로 끝에 서서 출력을 가볍게 밀어놓고 엔진 소리가 높아질 때 그 소리가 정말 좋아요. 활주를 하다가 땅의 진동이 딱 떨어지는 순간 지평선이 쑤욱 내려가는데 정말 짜릿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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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 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 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 『인생의 일요일들』, 『뜻밖의 좋은 일』, 『아무튼, 메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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