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던 시간, 늘 나를 지켜주었던 책
'소중한 책'
지난봄, 유독 심했던 봄앓이를 하며 꺼내 들었던 책은 윤대녕의 소설집이었다. 따뜻해진 바람에도 그저 마음이 가라앉기만 했던 봄밤, 어쩌자고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애잔하고 고독하고, 또 슬펐으니 말이다.
“그러나 삶이 계속되는 한 그리움은 계속되고 또한 누군가 조용히 숨어 글을 바라고 쓰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윤대녕의 『제비를 기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지난봄, 유독 심했던 봄앓이를 하며 꺼내 들었던 책은 윤대녕의 소설집이었다. 따뜻해진 바람에도 그저 마음이 가라앉기만 했던 봄밤, 어쩌자고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애잔하고 고독하고, 또 슬펐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독한 인물과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따뜻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당신만 고독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대학 시절, 그저 아무 감흥 없이 다가왔던 그의 소설이 그 희미해진 시간을 뒤로하고, 지난봄 나를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다독여주었다. 그의 소설 속 인물처럼 나도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렇게 삶의 속내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삶이 이처럼 고독한 일이고, 또 외로운 일임을 깊게 알아가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말처럼 내 그리움이 어쩔 수 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면 그저 혼자서만 끙끙 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나처럼 고독한 누군가가 쓰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겠다고.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을 애써 참으며 먹먹해진 가슴을 진정시키려 할 때에도, 지나간 시간들이 밀물처럼 밀려드는 밤에도, 시간이 흘러도 그저 켜켜이 쌓여가기만 하는 그리움을 어찌할 수 없는 날에도 늘 윤대녕의 소설집을 펼쳐들었다. 그렇게 그의 소설과 함께 나는 봄을 무사히 보냈다. 그렇게 한 시기, 한 계절 어떤 책은 나를 살아내게 하고, 견뎌내게 한다. 스무 살, 내게로 왔던 책이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스무 살 무렵, 나의 아늑한 도피처는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의 고요한 서가에 발을 디딜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져 오곤 했다. 오래된 책의 냄새도 그저 향기롭게만 느껴지던 공간. 그곳에서 나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오래도록 서성거리곤 했다. 이름 모를 작가의 새로운 작품을 탐색할 때면 떨리는 흥분을 느끼기도 했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들어가듯 파고들었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이 책이 남길 여운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갈 때, 내 마음은 얼마나 떨렸었는지.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자신의 기억을 되찾는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는 또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했었는지. 그의 문장 속에서 자칫 길을 잃을까 나는 또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아직도 기억난다. 불안하고 두려운 손으로 이 책의 문장을 일기장에 베껴 적던 스무 살의 내가. 그리고 소설 속의 문장처럼 수증기처럼 쉬이 사라질 것만 삶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던 그 시절의 내가.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애잔한 아픔으로 일렁거렸던 것도 기억난다. 읽을 때는 몰랐다가, 책장을 덮고 나서야 덮쳐 오던 그 아련한 아픔들. 책장 사이를 유령처럼 배회하면서 나 자신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바로 이 책 속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가 아팠고, 그가 자신의 기억을 찾게 될수록 만나게 되는 그 누군가가 아팠고, 그 기억을 따라 함께 걸어 들어가고 있는 내가 아팠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고 어찌나 단편적으로 보였는지. … 몇 개의 조각들, 어떤 것의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내 수사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인 모양이지요. … 과연 이것은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에서)
그렇게 아프게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그 후로 자주 이 책을 꺼내 들곤 했다. 단편적인 조각들로 자신의 삶을 추적해나가는 남자의 삶의 모습이 내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과 자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다. 그저 흐릿하고 불안하기만 했던 나의 스무 살 무렵의 시간을 지켜주었던 건 바로 이 책이었다는 것을.
‘내 인생의 특별한 책’이라는 주제를 받아들고서, 숱한 사연과 이야기가 숨어 있는 책이 가지런히 꽂힌 책장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책이 떠올랐고, 늘 가방 안에 넣어 다니면서 습관처럼 들여다보던 책도 떠올랐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비밀암호처럼 베껴 적곤 했던 책도 떠올랐다. 힘들었던 시간, 친구에게 선물 받았던 책도 떠올랐고, 힘들 때마다 보면 위로가 되는 책도 떠올랐다.
어떤 시간 우연하게, 그리고 운명처럼 내게 다가와서 나를 다독여주는 책이 있었기에 나는 숨죽이며 울다가도 씩씩하게 울음을 그칠 수 있었고, 조금 더 힘차게 아침을 시작할 수도 있었고, 잠들지 못하는 밤 우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도 있었다. 내 곁에 있는 책 덕분에 나는 혼자서만 아파하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처럼 이렇게 아파하는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픈 마음을 다독이는 것이다. 그렇게 같이 아프고 나면 나는 조금 더 씩씩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때로는 지나간 그리움 속으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 속을 서성거리게도 만들지만 그 책들을 읽는 것은 이상하게 힘이 된다. 아프지만 따뜻한 책. 그런 책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같이 울어버리고 나면 좀 더 씩씩해지도록 만들어주는 책. 그런 책 말이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젠가,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책으로 떠올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내겐 그 책이 있었어, 라고 하면서. 책의 줄거리나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더라도, ‘참 따뜻한 느낌이었는데’ 하고 떠오를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 순간 그 책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고.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지켜주었던 건 바로 그 책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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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처럼 열정적인 독서가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고, 미국의 대표적인 서평가 마이클 더다처럼 그동안 읽어온 책으로 자서전을 쓰고 싶다. 서점에서 새로 나온 책을 처음으로 만나게 될 때나 고요한 도서관 서가를 누비며 알지 못했던 책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듯,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현실을 잊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사거나 읽는 방법 대신, 언젠가 내가 한 권의 책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장 멋진 도피처를 제공해줄 수 있기를. 그래서 내 인생의 특별한 책 이야기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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