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허구를 구별하는 능력
그러고 보면 역사는 생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출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역사가들의 몫은 아니죠. 하지만 그 역시 역사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환상의 기반이 되고 장르의 터전이 되는 것 말이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에는 귀족 남성이 미래 남편을 대신해서 신부에게 은장미를 주고 청혼을 하는 풍습이 나오는데, 이건 20세기 초를 살았던 현대 작가 호프만스탈의 창작이죠. 하지만 일단 오페라를 보고 나면 그런 풍습이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만큼이나 그 풍습이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오스트리아 제국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지요. <장미의 기사>라는 작품 자체가 당시 오스트리아를 그린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장미의 기사 풍습은 오페라 밖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당시를 배경으로 한 다른 작품에서 그 풍습을 본 적은 없어요. 넣고 싶어도 넣기가 좀 애매하고요. 넣는다고 해도 <장미의 기사>의 패러디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장미의 기사>는 비교적 얌전한 예입니다. 허구의 이미지가 현실의 역사를 이기는 경우는 흔한 편이죠. 사람들은 역사책보다 소설이나 영화과 같은 허구의 예술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런 매체는 그렇게까지 엄밀한 사실에 의존하지는 않죠. 특히 후대 작가의 작품은 당시 시대의 특징을 부풀리고 과장하고 자신의 비전에 맞게 왜곡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가 그에겐 동시대였던 1940년대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슬쩍 로맨틱한 비전을 첨가했다면, 그 시대를 그리는 지금의 하드보일드 소설가들은 실제 역사보다는 챈들러의 소설을 참고하며 이미 로맨틱하게 뒤틀린 당시를 또 뒤틀겠지요. 그러다 보면 이 장르는 실제 역사에서 필요한 부분만 적당히 추려내어 만든 또 다른 가상세계를 창조하게 됩니다.
다른 예를 원하신다면 중국 무협 소설을 들 수 있지요. 김용과 같은 작가가 그럴싸하게 그려낸 무림 세계는 실제 중국 역사에서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할리우드 작가들이 하나의 고유 세계를 만들어낸 서부극도 마찬가지죠. 할리우드 서부극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이 시기는 굉장히 짧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그 시대 역시 할리우드 영화가 그리는 것처럼 신나지는 않았으니까요. 서부극이 그리는 미국 역사는 그 자체가 거대한 허구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서부극은 전염성이 꽤 강했습니다. 미국 밖의 수많은 나라가 자기네 나라의 역사를 그리면서 서부극의 관습을 택했습니다. 전 마카로니 웨스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냥 미국을 무대로 한 이탈리아 영화 장르니까요. 그보다는 60년대에 잠시 유행했던 한국의 만주 웨스턴이 더 좋은 예일 겁니다. 20세기 초의 만주라는 실제 공간을 서부극의 관점을 통해 본 이 난폭한 장르는 곧 김지운 감독에 의해 부활될 예정이지요.
그러고 보면 역사는 생산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출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역사가들의 몫은 아니죠. 하지만 그 역시 역사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환상의 기반이 되고 장르의 터전이 되는 것 말이죠. 성공적인 문화라면 그 가상 역사 몇 개를 부록처럼 달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에서 시간은 단선으로 흐릅니다. 이걸 피할 수는 없죠. 하지만 상상력과 욕망이 있는 한 우리가 이 지루한 현실에 굴복하며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사실과 허구를, 소설과 역사를 구별하는 능력은 늘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거겠지만요. 유감스럽게도 요새는 허구와 사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꼭 우리나라 이야기만도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