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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아름다운 산맥, 박완서를 만나다

한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맥, 소설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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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맥,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만났다. 일흔보다 여든이 더 가까운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는 현역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아, 나도 일흔이 넘어서 저런 얼굴을 갖고 싶다’라고 소망할 만큼 담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따스함을 지닌 분이었다. 또, 이런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 그렇게 큰 힘이 있기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문학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한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산맥,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만났다. 일흔보다 여든이 더 가까운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글을 쓰는 현역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아, 나도 일흔이 넘어서 저런 얼굴을 갖고 싶다’라고 소망할 만큼 담박하면서도 꾸밈없는 따스함을 지닌 분이었다. 또, 이런 자그마한 체구 어디에 그렇게 큰 힘이 있기에 지금까지 쉬지 않고 문학의 길을 달려올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구리 아치울 마을에 박완서 선생 댁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아차산 쪽을 바라보면 나지막한 산 아래에 해가 숨어있는 듯한 노란색 집이 있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노란색 집을 찾아오면 돼요.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선생은 차분하게 집으로 찾아오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 설명만으로 집을 찾아갈 수 있을까 했는데 고만고만하게 생긴 전원주택 중에서 선생의 노란색 집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노란색이 눈에 띄는 박완서 선생의 집

“집 색깔이 굉장히 특이해요.”

“색깔 이름이 스패니쉬 옐로우라고 하는데, 햇빛이 강한 스페인에서 많이 쓰는 색이래요. 고흐가 그림 중에 이런 노란색으로 그린 집이 있어요.”

지하에는 서고가 있고, 1층에는 서재와 천장이 높은 마루, 식당과 부엌이 있다. 우편물 정리를 하느라 편지 봉투와 서류 봉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서재의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부엌과 식탁 위 유리 꽃병에 꽂힌 꽃을 보고 있으니 어떤 사람이 선생에게 ‘나이가 많은데 혼자 어떻게 사느냐’라고 걱정하는 소리에 ‘내가 글도 쓰는데 혼자서 밥도 못 해먹을까 봐’라고 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매서운 바람에 숨이 넘어갈 만큼 땡그랑거렸다. 산사에 있는 풍경과는 사뭇 다른 소리다.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도 왕성하게 글을 쓰는
현역 소설가 박완서
“풍경 소리가 시끄럽진 않으세요?”

“매일 듣고 사니까 잘 안 들려요. 여기가 워낙 바람이 강한 동네예요. 오늘 아침에는 풍경이 거꾸로 뒤집혔는데 지금은 바람이 덜 부네요.”

“요즘 새로 쓰시는 소설이 있나요?”

“아뇨, 올해는 쉬려고 해요.”

“올 초에 벌써 책이 두 권이나 나왔네요.”

『호미』는 여기저기 연재하던 것을 추린 것이고, 『대화』는 이해인 수녀님하고 재미나게 수다 떤 이야기예요. 어쩌다 보니 책이 두 권이나 나왔네요. 정말.”

『호미』의 표지에 쓰인 제목 말인데요. 혹시 선생님이 직접 쓰신 글자인가요?”

“아뇨, 디자이너가 한 거예요. 책 나온 후에 보니까 꼭 내가 쓴 글씨 같더라고요.”

마당에는 복수초가 고개를 내밀었고, 산수유가 솜털 같은 노란 꽃을 피웠다. 봄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소설가의 작은 마당은 황량했다. 봄이 오면 마당은 노작가의 손길을 재촉할 것이다.

아침 해가 일찍 뜨는 아치울 마을. 아침에 마당에 나가면 금빛으로 부서지는 한강을 볼 수 있다. 한옥에 살 때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마당을 뜯어서 화초를 키울 만큼 흙과 가까이 사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는 아치울로 이사 와서는 마당을 가꾸는 것이 주요한 일과가 되었다. 생명과 가장 가까이 살면서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한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살고자 하는 아우성에 가깝다. 박완서 선생은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며 자기도 모르게 꽃과 나무에 말을 건넬 때? 많다고 했다.

박완서 선생이 소일하는 마당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별다를 것 없어요. 서울서 대학 다니는 손녀와 같이 살거든요. 손녀딸 보살피면서 할머니 노릇을 하고, 마당 돌보고, 산책하고, 글 쓰고… 그러고 살아요. 이제 봄이 되면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요.”

“마당 돌보는 것이 많이 즐거우신가 봐요.”

“예전부터 흙과 가까이 사는 걸 좋아했으니까요. 서울살이를 오래했지만 아파트에 산 건 얼마 안 돼요. 저 마당이 저렇게 손바닥만 해도 잔디가 고르게 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벅찰 지경이에요.”

“마당 일은 언제 하세요?”

“이 나이가 돼도 얼굴 타는 게 싫어서요. 해 뜨기 전에, 해 지고 나서 마당에서 일해요.”

박완서 선생의 글은 선생이 살아온 세월과 함께했다. 단편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서부터 작가의 시선은 노년의 삶을 향해 있었다. 『호미』에서도 노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시선은 이전의 작품보다 좀 더 푸근하고 인생을 끌어안는 넉넉함이 있다. 박완서 선생에게 노년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우리 사회가 노년을 천시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잖아요. 다들 어떻게 하면 젊어 보일까 고민하는 사회가 아닌가요?”

“나는 손자가 많아서 그런지 노인 대접을 받는 게 그렇게 싫지 않았어요. 오히려 노인 대접 받기 싫어하는 것이 이상해요.”

“언젠가 일흔 이후의 삶은 덤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어떠신가요?”

“일흔 이후의 삶도 나름대로 즐거워요. 많이 가벼워지죠. 젊었을 때, 왕성하게 작품 쓸 때는 나를 유지하려고, 남들에게 욕먹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요. 가족 관계에서도 그래요. 지금 내 나이 정도가 되면 의무적으로 싫어도 해야 하는 일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요. 하기 싫은 일을 안 해도 되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인터뷰만 해도 잘 안 해요. 아마 『호미』 내고 처음 인터뷰하는 것 같은데…”

“인터뷰가 싫으세요?”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왜곡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지’ 생각할 때가 많아요. 옛날에는 인터뷰도 꼬박꼬박 했지만 요즘은 될 수 있는 대로 안 하려고 해요.”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을 것 같네요.”

“그렇죠. 삶을 가볍게 살다 보니 건강에도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걱정이 없어요. 요즘 환경 파괴와 지구 온난화 때문에 야단이잖아요. 근데 나 죽은 다음의 일이니까 솔직히 별로 걱정이 안 돼요.”

“그렇지만 선생님 연배의 어른은 환경 문제에 대해서는 후대에 당당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연스럽게 아껴 쓰는 것이 몸에 밴 분들이니까요. 또 어려운 시절을 겪고 풍요로운 사회를 물려줬다는 자부심도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아껴서 풍요롭게 살 자신은 있어요. 신용카드 대란 같은 걸 보면 정말 걱정을 넘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어디서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것이 참 힘들다’라는 말씀을 하신 게 기억나네요.”

“결국 그 포장을 만드는 사람도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함부로 포장 같은 거 줄이라는 말 못 하겠어요. 밥벌이가 쓰는 것에 달렸으니까. 아, 여전히 어려워요, 그런 건. 친구 중에 오히려 IMF 터졌을 때 좋았다고 한 이도 있었어요.”

“어째서요?”

“그때는 아껴 쓰라고 해도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웃음) 우리 또?가 뭐든 잘 못 버리고 아껴 쓰잖아요. 그래서 자식들한테 아껴 쓰라는 소릴 많이 하는데 다들 잔소리로 들으니까.”

박완서 선생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서재

1970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나목』으로 소설가의 길을 가기 시작한 박완서 선생은 지금까지도 소설을 쓰는 현역 소설가다. 그렇게 쓸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 어떻게 마흔까지 참았느냐고 주변에서 말할 만큼 소설을 줄줄이 이어 발표했다. 한 번도 쓸 거리가 없어서 고민해 본 적이 없을 만큼 쓰고 싶은 것이 내부에 가득 차 있었다.

“글을 쓴다는 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내게 글을 쓴다는 건 내 고통의 일부를 독자에게 나누는 거예요. 내 고통을 글로 옮기면서 내가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지죠. 글쓰기를 통해 마음의 짐을 하나씩 놓아버릴 수 있었어요. 힘들 때를 살아갈 힘도 글쓰기에서 얻었죠.”

“어딘가에서 선생님은 극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고 하신 것이 기억나는데요.”

“아픔과 슬픔은 전혀 극복할 수 없는 거예요. 슬픔을 어떻게 이길 수 있나요? 참고 견디고 사는 문제죠.”

“그럴 때 글을 쓰면 그런 아픔이 사라지게 되나요?”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지만 무게가 한결 가벼워지죠.”

“그럼 선생님은 독자에게 고통을 나누어주는 셈이 되나요?”

“책을 읽으면서 그 고통을 가진 사람도 나처럼 가벼워질 수 있겠죠.”

“보통 작가가 된 사람은 청소년기부터 작가를 꿈꾸고 문학작품을 읽는데 선생님은 어떠셨나요?”

“책 읽기는 좋아했어요. 제가 중학교 때 해방이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우리말로 된 책은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우리 세대는. 우리말로 된 책이 없어서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많이 읽었죠. 그때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친구들은 제가 글 쓰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지만요.”

“문학소녀셨네요.”

“문학작품만 읽은 건 아니고 기쿠치 간이 쓴 얄팍한 연애소설도 많이 봤어요. 그때는 책이 워낙 귀해서 누가 이광수의 『무정』을 구했다고 하면 반 전체가 돌려서 읽을 정도였죠.”

“우리말을 쓰는 것을 금지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우리말이 더 애틋하게 다가왔던 걸까요?”

“우리 세대는 완벽한 이중 언어였어요. 집에서는 조선말을 쓰고, 학교에 가서는 일본어로 말하고. 그래서 해방 후에 우리말만 사용하라고 했을 때 쉽게 거기에 적응했죠. 좀 어리둥절한 건 있었어요. 며칠 전만 해도 조선말을 하면 혼이 났는데 이제는 일본말을 하면 혼이 났으니까요.”

“그럼 언제쯤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6?25를 겪고 나서였어요. 그때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해 두었다가 소설로 쓰자고 생각했어요. 나는 경험으로 글을 썼어요. 고통스러운 경험은 글을 쓰기 전까지는 내게서 물러나지 않아요. 전쟁이 끝나고 결혼해서 평온하게 살아갔던 몇십 년은 오히려 짧게 느껴지고 6?25 때 겪었던 몇 달간의 경험이 더 길게 느껴져요. 아이를 키우며 평온하게 살 때도 잠이 들면 그때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 기간이 굉장히 길게, 내 삶 전부처럼 느껴졌어요.”

“특히 6?25를 배경으로 쓰신 작품을 보면 살아남은 사람의 죄책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프리모 레비도 그랬지만 덜 선한 사람이 살아남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죄책감도 많이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썼을지도 모르죠. 평화로울 때보다 빈한할 때 인간의 악이 더 잘 드러나잖아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남을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자를 단죄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있었어요. 잊어버려야지, 잊어버려야지 하면서도 계속 그때 이야기를 쓰게 되네요. 손자는 저보고 요즘 누가 6?25 때 이야기를 읽느냐고 ‘할머니 그만 쓰세요’ 그러지만요. 그런데 저는 어떻게 다들 그렇게 과거를 금방 잊을 수 있는지 그게 더 신기해요.”

“선생님 글을 읽다 보면 참 꼬장꼬장하고 결벽에 가까울 만큼 구질구질한 것을 싫어하신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타고나신 성격인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아니면 개성 사람의 기질인가요?”

“우리 집안 내력이에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소리는 다 하는…. 개성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많죠. 제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창씨개명(일본식 성명 강요)을 거부했어요. 그때는 독립투사 자녀도 혹시 표적이 될까 봐 창씨개명 할 때였는데 제 할아버지가 죽어도 창씨개명은 안 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건 우국충정과는 또 다른 거였어요.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을 하는 그런 집안은 아니었거든요. 평범한 소시민 집안이었는데 창씨개명을 절대 안 했어요. 해방 후에도 거기에 대해 한 번도 내세운 적이 없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정치적인 것에 항상 비판적인 것은 그런 반골 기질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반골 기질이긴 한데, 좀 이상한 반골 기질이죠. 운동권도 없으면서 항상 반체제적이었으니까요.(웃음) 진보가 정권을 잡으면 보수적이 되고,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진보를 지지하니까요. 반골이라는 말이 딱 맞아요.”

“항상 선생님 작품은 개성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짙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맛볼 수 없는 넉넉함과 따스함이 있는 시절이었는데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미망』을 썼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 개성에서 서울로 유학 왔어요. 그때만 해도 굉장히 드문 일이었죠. 아들자식도 아니고 딸자식을 공부시키려고 서울로 온다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울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서울생활이 처음에 너무 고달팠어요.”

“어떤 점이 가장 힘드셨는데요?”

“인간이 빈부로 나누어지는 것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서울에 와서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비참하게 산다는 걸 알았어요. 개성에서 살 때는 제 고향 마을이 시골이긴 했지만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거든요. 번지를 모르면 집도 못 찾아가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시골에서는 누구네 집이라고만 하면 편지가 갈 정도인데 도시는 번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긴 번지를 외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래서 지금 사는 마을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죠.”

박완서 선생은 여성주의라는 말이 낯설었을 때부터, 한국에 여성학이 뿌리내리기 전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두고 거기에 대해 줄기차게 소설을 써왔다. 작업실에서 글을 쓰는 모습보다 앞치마를 두르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의 모습을 요구하는, ‘여성 소설가’에게 가하는 무언의 압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제가 데뷔했을 때는 남녀평등이라는 말조차 낯설었을 때였어요. 갈등이 많았어요. 신문에 연재소설을 쓸 때는 집안일을 완전히 팽개치고 썼거든요. 아이들에게 죄책감이 많이 들었죠. 또, 그 시대적인 분위기를 거스르는 것이 힘들었어요.”

“그때는 여성 소설가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였나요?”

“여성 소설가뿐만 아니라 일하는 여성에게 살림도 일도 모두 잘하기를 요구했어요. 그런 전체적인 분위기를 개인이 무시하기 어려워요. 부담이나 압박으로 작용하죠.”

“어떤 식으로 그런 압박을 받으셨는지요?”

“제가 데뷔를 늦게 한 여성 소설가라 그때는 꽤 희귀한 케이스였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취재를 많이 했는데 작가로서의 모습보다 주부로서의 모습을 부각하는 거예요. 작가로서의 제 포부를 묻기보다는 집안일을 얼마나 잘하면서 글을 쓰나, 그런 면만 주목했던 거죠. 저는 여성 작가로서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집안일도 잘하고 글도 잘 쓰는 작가로 부각되는 게 싫었어요. 사실도 아니고요. 그런 걸 보고 좌절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니에요? 저는 슈퍼우먼은 없다고 생각해요.”

“집안일을 하시면서 이 일이 아니면 더 작품에 매진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신 적이 있나요?”

“많죠. 집안일을 하면서 이런 소모적인 일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하나 화가 나기도 했어요. 이 시간에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어요. 늘 그런 갈등과 죄책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썼던 것 같아요. 끝까지 거기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여전히 지금의 직업여성은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한데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잖아요? 저는 일과 집안일 사이에서 고민한다면 일을 더 존중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남편에게 당당하게 분담을 요구하세요. 그리고 둘 다 잘하려는 욕심은 버려야겠죠.”

“항상 어려운 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박완서 선생은 여전히 글쓰기가 어렵다고 했다. 1970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오래, 그렇게 열심히 글을 썼는데도 한 번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고…. 이유를 물었다. “창조에는 숙련이 없으니까요. 항상 어려운 건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힘들지만 그것이 재미있어 소설을 써온 세월이었다.

박완서 선생은 『호미』의 어느 구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칠십 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인데, 거기서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어 눈물이 날 정도로 허망했다고…. 그렇지만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하나씩 놓고 점점 가벼워져 모든 것이 다 지나가고 나서 찾아오는 위안과 평화를 맛보는 소설가의 표정은 아름다웠다. 삶은 재능을 소진하고 시간을 소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것을 비워내 거기에 평화와 위로를 담는 것임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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