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색채의 마술사’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 |
『데이지』
왼쪽의 표지 그림을 보세요.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경비행기의 날개 위에 암소 한 마리가 올라가 있지요. 그런데 눈썰미가 좋다면 뒷좌석에 앉아 이 암소를 촬영하는 카메라를 든 남자도 찾아내셨을 겁니다. 표지의 그림은 어른 책이든 아이 책이든 간에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표현해 내야만 합니다. 혹은 책 속의 내용을 독자로 하여금 궁금해서 못 배기게 해야 하지요. 빨강 지붕이 알록달록하고 초록과 노랑으로 물이 오른 구릉 위를 비행하는 저 비행기가 향하는 곳이 어디일까요? 우선은 이런 호기심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해봅시다.
우리 나이로 16살부터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 그림책 작가가 55살이 되었다면, 그 작가의 그림은 인공적인 미보다는 자연적인 미를 많이 담아내려고 할 거예요. 거기에다 그가 어린 시절을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보냈더라면, 노년을 코앞에 둔 작가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가득 느껴지게 마련일 거예요. 흔히들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를 두고 ‘색채의 마술사’라고 부르는데, 이 그림책
『데이지』에서도 그가 세상을 해석하는 코드로서 색(色)을 얼마나 중요시해 왔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자연물에는 본연의 색이 있습니다. 그 색은 자연물 그 자체의 건강 상태에 따라 명도를 달리할 수도 있고 계절이나 빛의 양에 따라 채도를 달리할 수 있지요. 그런데
『데이지』를 포함해서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의 그림책을 보고 있자면, 풍성한 일조량 덕분에 따사로운 햇살이 넘실거리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반면 그와 함께 영국의 3대 그림책 작가로 꼽히는 찰스 키핑의 작품 속 그림은 일조량 부족으로 차갑고 쓸쓸한 인상을 줍니다. 이왕 이 점을 언급한 김에 존 버닝햄 그림책 속의 일조량도 생각해봐야겠네요. 저는 그의 그림을 보면 땡볕 아래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일조량이 시력의 한계를 넘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심리적 신경 반응이겠지요. 세 작가가 모두 20세기 영국의 그림책계를 진두지휘했던 대작가인데도,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자연을 바라보는 심미관에 따라 혹은 그들이 태어나 자란 자연환경에 따라 빛을 다루는 기법도 많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참고로 지금 소개하는 와일드 스미스는 광산촌인 페니스턴에서 태어났고, 찰스 키핑은 램버스에서 태어났지만 유아기를 런던에서 보냈지요. 존 버닝햄은 서레이 파넘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유랑했고요. 저는, 와일드 스미스는 5월의, 찰스 키핑은 11월의, 존 버닝햄은 8월의 빛을 담아낸 작가라고 생각해요.
자, 그럼 계절의 여왕 5월의 빛을 따라, 데이지가 탄 경비행기가 가는 곳을 역추적해 보도록 하죠. 데이지는 농부인 브라운 아저씨가 키우는 암소예요. 브라운 아저씨는 한가해질 때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낙인 평범한 시골 농부였어요. 아저씨가 텔레비전을 볼 때면,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데이지도 창문 밖에서 텔레비전을 봐요. 데이지는 사람 말을 못하지만, 생각을 할 줄 알아요. 덕분에 우리도 데이지의 생각을 알아차릴 수 있고요. 하루는 텔레비전에서 도시가 나오자, 데이지가 혼잣말을 해요. ‘나도 온 세상을 구경하면 참 좋겠다.’
그러던 어느 날, 풀어놓고 키우던 데이지는 열린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와 시골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어요. 브라운 아저씨네 풀밭에서만 생활하던 데이지에게 마을도 커다란 세상이었지요. 데이지가 또 혼잣말을 해요. ‘이게 바로 세상이라는 거야.’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생각에 빠진 데이지는 언덕 자락과 연결된 마을의 빨간 지붕 위로 발길을 옮겼어요. 지붕 위에 있는 암소 데이지를 발견한 동네 사람들은 데이지를 지붕 아래로 내리려고 노력하죠. 마침 데이지가 브라운 아저씨의 암소인 것을 알아본 마을 사람은 아저씨를 불러요. 그런데 발 빠르게 TV 취재팀이 데이지 구출 작전을 녹화했어요.
이제 데이지가 지붕 아래로 구출되는 장면이 TV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었어요. 데이지는 TV 스타가 된 거예요. 흥분에 들떠있던 어느 날, 영화감독이 브라운 아저씨에게 제안을 해요. 데이지를 영화에 캐스팅하겠다는 거였죠. 아저씨는 잘 돌봐달라는 부탁과 함께 데이지의 영화 출연을 허락해줘요. 드디어 데이지는 그렇게 원하고 갈망하던 소원을 성취하게 된 거예요. 커다란 배를 타고 영화의 메카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영국 시골 암소 데이지는 나날이 유명해져 잡지 표지의 모델 노릇도 하고, 웅대한 음식 대접도 받게 되지요.
하지만 데이지는 재미가 없어요. 매일 먹는 훈제 연어니 캐비어가 입맛에 맞지도 않았어요. 데이지는 시골 향기 가득한 풀이 그리웠어요. 향수병을 앓는 데이지는 식욕만 잃은 게 아니었지요. 삶의 의욕도 잃어 우울증에 시달리고 점점 야위어 갔어요. 보다 못한 영화감독은 데이지를 데리고 병원에 찾아갔어요. 훌륭한 의사는 데이지의 병의 근본 원인이 심리적임을 알게 되지요. 다행히 마음씨가 고운 영화감독은 데이지에게 마지막 영화를 찍자며, 데이지를 태우고 경비행기에 올랐어요. 이제 처음 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네요. 그렇죠, 표지의 그 장면, 즉 데이지를 찍던 카메라를 떠올리면 돼요. 데이지는 풀과 흙이 있던 소박한 그곳, 그러나 행복했던 그곳, 브라운 아저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이 그림책의 또 다른 묘미는 곳곳에 기발한 장면이 숨어 있다는 거예요. 반쪽짜리 페이지가 들어있는 플랩북의 묘미는 카메라의 ‘줌 아웃 - 줌 인’ 기법을 연상하게 해요. 이 책에서 데이지가 영화에 출연한 것을 생각해볼 때, 더욱 그럴싸한 연결이죠? 이런 식이에요.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빨갛고 근사한 새 트랙터를 보며 감탄하는 아저씨가 나오는 페이지의 오른쪽 플랩 페이지를 넘기면 시간상 바로 연결된 장면이 나와요. 아저씨는 여전히 부러운 시선으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클로즈업된 암소 데이지가 도회지의 모습이 나오는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거죠. 그런데 이런 반쪽 페이지의 플랩북(flap book) 기법은 비단
『데이지』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랍니다.
『데이지』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2년 전에 나온
『펠리컨』과,
『데이지』 이듬해에 나온
『개에게 뼈다귀를 주세요』에도 같은 방법이 활용되거든요.
5월 빛의 그림책 작가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1930- )는 존 버닝햄, 찰스 키핑과 더불어 영국 현대 그림책 3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힙니다. 이들은 저마다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여 60년대 이후에 활동한 많은 그림책 작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요.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 가운데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색채의 마술사’로 칭송받는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는 자연의 소리나 아름다움, 사물의 본질을 색이라는 시각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 능통합니다.
와일드 스미스는 영국 요크셔 지방, 페니스톤의 광산촌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어린 시절 탄광촌에서 가졌던 색깔에 대한 목마름이 그를 열렬한 색 예찬론가로 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여섯 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반슬레이 미술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이후 런던 대학의 예술학부로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낮에는 미술교사로, 밤에는 책 표지 디자이너로 일했지요. 그러던 중, 옥스포드 출판사의 동화책 편집장인 메이블 조지(Mabel George)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책 작업을 제안했습니다. 그 덕분에 강렬한 원색의 대담한 대비가 돋보이는 그림책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의 ABC』(1962)를 데뷔작으로 세상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흑백이나 단순한 색감의 그림책이 다수를 차지하던 60년대 당시의 영국에서, 이 그림책은 색채 혁명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는 이 책으로 영국 최고의 그림책상인 ‘케이트 그린어웨이 상’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그림책계에 화려하게 데뷔하게 되었지요. 이것을 계기로 옥스퍼드 출판사와 40년 이상 함께 일하면서, 『Cat on the Mat』을 비롯한 수많은 그림책을 만들었습니다.
한편 음악적인 재능도 아주 뛰어난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는 한때 Royal Military School of Music에서 음악을 지도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가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미술적 재능 사이에서 방황할 때 그의 부인은 미술에 전념하기를 수차례 당부하였다고 할 정도로 그는 두 가지 재능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두고, 현재 프랑스 남부 지방에 살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와일드 스미스는 자신의 그림을 ‘햇빛의 흐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햇빛의 흐름’이 자신의 책 속에서 자유롭게 넘실거리도록 하고자 그는 충분히 아름답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노력 뒤에는 그림책이야말로 아이들을 예술과 문화에 동시에 노출하는 힘이 있는 장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명해주는 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림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러한 나의 자세가 내 작품에 스며들어 아이들이 아름다운 세계를 관찰하고 이해하며 감상할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삶이라는 높은 산을 오를 때, 정상에서 깨달음과 동시에 열린 시각의 희열을 느꼈으면 합니다.”
이처럼 그는 분명한 그림책 철학을 지닌 작가입니다. 또한 그는 ‘아름다운 것은 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미학적 지향점을 넌지시 강조한 바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동식물과 함께 살아갑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 소통할 수는 없지만 자연과 사물 모두는 고유한 영혼을 지녔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그림에 내적인 영혼을 표현할 수 있는지 다양한 방법을 궁리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궁극적으로는 내적인 영혼을 담은 그림만이 진정으로 아이들의 정신세계도 풍요하게 채울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그는 일상 사물이나 동식물에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깔을 입힘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박동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왜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를 좋아할까요? 첫째 화려한 색이 눈길을 빼앗기 때문이겠지요. 둘째, 전래동화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이야기가 갖는 신비감과 완결성이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셋째, 그의 그림책을 보면서 아이들 스스로 이야기꾼이 되었다는 환상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그림책은 다양한 재화(再話)의 가능성을 지녔습니다. 독서 활동 자체가 작가 중심으로 한정되지 않고, 독자가 개입해서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하여 재창작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높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의 그림책을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6,70년대의 초기 작품은 주로 우화에 그림을 담은 그림책과 서커스, 다람쥐 등의 특정 동물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그림책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아직 작가적인 자신감이 부족했을 초기 시절에는 주로 전래동화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 속에 이야기의 핵심을 뽑아왔지요. 우화를 차용해서 재창작한 그의 대표작이
『팔려가는 당나귀』『바람과 해님』이지요.
『서커스』『다람쥐』『달님이 본 것은?』 등은 사물이나 동물에 대한 정보를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초기 작업 시기의 대표작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그의 생각도 더욱 심오해져 화려한 색채에 뒤지지 않게 내용도 깊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동물을 의인화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발달심리학적 문제라든가, 그릇된 실험을 통해 환경이 파괴되는 환경 문제를 다룬 그림책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갑니다. 예컨대
『펠리컨』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알에서 태어난 못난이 펠리컨이 온갖 말썽을 피우며 지내다가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자신이 다름 아닌 펠리컨이었음을 깨닫는 자아정체성의 문제를 다룹니다. 또한, 1994년에 자신의 딸과 공동 작업을 통해 출판한
『잭과 못된 나무』에서는, 채소를 빨리 자라게 하려고 벌인 여러 실험에서 자라난 못된 나무 한 그루가 오존층을 뚫어 우주 괴물이 지구를 침략하게 된다는 발상으로, 과학의 발달이 가져올 수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3기의 작품은 앞서 말한
『잭과 못된 나무』가 포함되는 8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색채가 화려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만든 창작품이 가득한 시기였지요. 잠시 후 본격적으로 소개할
『회전목마』가 이 시기에 속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상과 현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도입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꿈의 세계와 현실 세계를 구분 지으려고 화면을 두 개로 분할하는 기법을 시도해보기도 했던 시기입니다.
정글파티
『정글 파티』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우화입니다. 우화는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사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을 녹여 낸 이야기인데, 이 책은 1974년 『비단뱀의 파티(Python's Party)』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된 후, 와일드 스미스 그림 특유의 아름다움과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닮은 우화 속 동물들이 주인공입니다. 특히 원제인 『비단뱀의 파티』에서 알 수 있듯이, 알록달록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비단뱀이 문제의 인물이 됩니다.
깊은 정글 속, 교활한 비단뱀은 주린 배를 채우려고 잔꾀를 냈습니다. 파티를 열어 동물들을 초대하는 것이지요. 속마음은 그렇게 친구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꾀를 내어 잡아먹으려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잠깐 의심하는 것도 같더니 모두 파티라는 말에 흥에 들떠 무섭고 잔인하고 야비한 비단뱀이 주선한 파티인데도 참석합니다. 그들은 선보일 묘기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곧 화려한 파티를 만끽합니다. 펠리컨이 자신의 커다란 주머니 입을 자랑하면서 정글의 동물들을 그 안에 담자, 영악한 비단뱀은 자신의 입은 더 크다며 으스댑니다.
어리석은 동물 친구들은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그만 비단뱀이 벌린 커다란 입속으로 하나 둘 줄지어 들어가게 되죠. 배를 채운 비단뱀은 입을 딱 닫아버립니다. 뱀의 기다란 몸통을 따라 정글 속 여러 동물의 모습이 이리 삐죽 저리 삐죽 솟아있습니다. 모두들 억울해하며 큰 소리로 꺼내달라고 아우성치지만, 이제 배가 부른 비단뱀은 잠에 빠져버립니다. 그때 정글을 지나던 코끼리가 비단뱀의 몸속에서 나는 아우성을 듣고 비단뱀의 꼬리 쪽을 그 육중한 발로 밟습니다. 그 참에 비단뱀이 입을 열고, 잡아먹혔던 불쌍하고 순진한 정글 친구들은 벌린 입을 통해 튀어나옵니다. 이처럼 코끼리의 도움으로 모두 무사히 탈출하여 살아난 동물들은 비단뱀을 혼내줄 궁리를 하고, 비단뱀의 꼬리를 매듭으로 묶어줌으로써 복수극은 끝이 납니다. 너무 약한 복수라고요? 하지만 우화가 지나치게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다 보면, 교훈성이 짙어져 재미가 떨어지게 되지요.
이 작품은 평범한 우화가 와일드 스미스에 의해 환상적인 이야기로 거듭남을 보여 주는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동물들 하나하나에 주어진 자유분방한 색채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듯 섬세하고 생생합니다. 또한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구현된 파티에서 펼치지는 동물들의 묘기도 무척이나 독특합니다. 멜론을 굴리며 걸어가는 하이에나라든가, 표범의 등 위에 네 마리의 원숭이가 물구나무를 서는 묘기, 서로 네 발을 맞대고 재주를 부리는 여우와 사향고양이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은 재주로 어느 서커스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작가 상상의 산물이지요.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현란한 색과 문양을 뽐내는 동물 캐릭터 중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비춰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캐릭터를 찾는 재미도 느껴볼 수 있을 거예요.
작가는 감언이설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과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줄 아는 자세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전달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노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아이들 스스로 책 속의 교훈을 끌어낼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이미 비단뱀이 당하는 결말을 통해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교훈적인 결말을 제공하다가는 아이들을 김새게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그림책을 참 좋아합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위트가 재미있고, 우화풍으로 작가의 철학을 전달하되, 독자의 흥미라는 요소의 중요성도 끝까지 놓지 않는 작가의 에너지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더욱 결정적인 이유로는, 실재하는 정글 속 동물보다 더욱 화려하게 채색된 동물들을 보면 ‘사르르’ 아이스크림이 녹는 것 같기도 하고, 잔뜩 찌푸렸던 하늘 위로 천연색 무지개가 솟듯 뭔가 신비하면서도 가벼운 기분으로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거든요. 색의 판타지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싶네요.
회전목마
이야기는 로지라는 병약한 소녀를 주인공으로 시작됩니다. 1년에 한 번, 동네에 놀이동산이 들어서는 때가 시공간적 배경입니다. 들뜬 마음에 잠도 제대로 못 잔 동네 아이들은 놀이동산이 세워지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놀이동산이 다 세워지자마자 저마다 좋아하는 놀이기구를 향해 뛰어갑니다. 로지와 오빠 톰은 그중에서도 회전목마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둘은 영원히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지만 며칠 뒤 놀이동산은 다른 마을로 떠나갔고, 한 해를 꼬박 기다려야만 하는 로지와 톰의 마음에 쓸쓸함이 깃듭니다.
겨울이 되었습니다. 약한 체질의 로지는 몹시 아파 매일 의사의 방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의사의 노력에도, 로지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었지만, 로지는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의사는 낙담한 부모에게 ‘로지에게 희망을 심어줘야 한다’는 야릇한 말을 남겨줍니다. 슬픈 마음으로 엿듣던 오빠 톰뫀 로지를 위한 멋진 생각을 해냈습니다. 로지의 친구들을 모아놓고, 로지의 생일을 위해 근사한 것을 준비하자고 제안합니다. 로지의 건강을 염려한 친구들이 하나 둘 선물을 들고 로지의 생일날 찾아왔습니다. 아픈 로지는 병석에 누운 채, 친구들이 건네주는 멋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것들은 로지가 좋아하는 회전목마에 있던 장식을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눈송이, 시계, 캥거루, 이야기를 들려주는 의자, 유니콘과 왕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빠 톰은 자신의 동생을 위해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조그만 회전목마를 선물했지요. 그날 밤 로지는 회전목마 장난감과 아이들이 주고 간 그림을 침대 위에 펼쳐놓은 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크게 펼친 화면은 네 개의 컷으로 구분되어 현실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이제부터는 로지의 꿈과 판타지가 펼쳐지는 세계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가 보여주는 판타지 세계의 마법은 갑갑했던 현실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좌우 면을 전부 이용하는 커다란 화면 위에서 마음껏 펼쳐집니다.
눈을 감고 있던 로지의 귀에 이런 말이 들립니다. “자, 타세요. 우리, 날아가요. 창문을 지나, 하늘을 지나….” 로지는 목마를 타고 얼음과 눈의 나라에 닿았습니다. 여기저기 눈송이가 흩날리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로지의 열은 내렸지요. 그다음 로지는 커다란 시계에 올라탔습니다. 회전목마는 로지에게 “시간이 가장 좋은 약이랍니다”라며 위안의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어느덧 점점 씩씩해진 로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의자에 앉아 지금껏 침대에서 읽었던 책 속의 친구들을 만나게 됩니다. 은하수 저 멀리까지 물결치며 여행했습니다. 별을 따라 로지의 상상 여행은 한없이 어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로지의 꿈은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넘나들었지요.
사실 저는 이 부분을 보면서 로지가 하늘나라로 올라간 것 아닐까, 안타까워했습니다. 대체로 은하계로의 여행이 의미하는 상징이 죽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를 조금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장으로 넘기는 순간, 다시 현실로 돌아온 로지를 만나게 되었죠. 금세 현실임을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다시 화면이 4컷으로 구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컷에서 로지는 ‘쾅’ 하고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침대에서 아이가 떨어질 정도였다면, 뒤척임이 그만큼 많았다는 의미고, 그 아이는 건강한 아이란 뜻이겠지요.
의사 선생님이 로지를 다시 찾았을 때, 로지의 활짝 핀 얼굴을 통해, 다시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을 발견했지요. 로지는 이제 침대에만 누워있지 않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마을을 내려다보며,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듯한 봄이 오자, 로지도 이제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는 의사도 왕진을 오지 않습니다. 톰은 이 기쁜 소식을 동네 친구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곧 로지가 그렇게도 간절히 기다렸던 놀이동산이 다시 마을을 찾아왔습니다.
브라이언 와일드 스미스는 이 책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잃고 시름시름 앓는 사람들의 상징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회전목마를 한동안 탈 수 없는 로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다지 어린이들이 흥미 있어 하지 않는 오래된 탈것인 ‘회전목마’에, 희망을 잃은 마음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판타지 세계의 조력자 역할을 맡깁니다. 이 그림책은 이야기 구조에 커다란 의미를 두기보다는 작가가 현실과 판타지를 풀어가는 시각적 방법을 주목해서 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또한 은하수를 수놓은 별처럼 황홀한 한 장 한 장의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와일드 스미스의 섬세함을 느끼게 되지요.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이 그림책을 접한다면, 아마 많은 독자가 이 그림책의 작가는 아주 여성적인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로지가 아프기 시작하는 때인 겨울, 눈 덮인 마을을 묘사한 컷과, 열린 창문을 통해 앓아누운 로지의 침상이 보이는 장미꽃 핀 정원 컷이 그렇습니다. 그의 책
『정글 파티』를 본 독자라면, 로지가 판타지(꿈) 속에서 만난 책 속의 주인공 컷에서 등장하는 동물들이 무척 친숙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주제와 이야기 구조면에서는 아주 고전적이면서도 따듯한 느낌이 배어있어서, 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소공녀』나
『작은 아씨들』이란 영화가 연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