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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언니들의 귀환! - 박완서의 『잃어버린 가방』 & 오정희의 『내 마음의 무늬』

박완서는 여행지에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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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와 오정희, 그녀들은 어느덧 할머니라고 불리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를 잊었다. 오히려 세월이 힘인 듯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어디에나 ‘왕언니’가 있게 마련이다.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함을 주고, 쉬라 하여도 쉬지 않고 되레 그 힘을 발휘하는 지도적인 이들이 있는 것이다. 한국 문학도 예외는 아니다. 이름만으로도 뿌듯함을 주는 박완서와 오정희, 그녀들이 있기에 한국 문학은 왕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듬직한 이들을 지니게 됐다.

박완서와 오정희, 그녀들은 어느덧 할머니라고 불리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나이를 잊었다. 오히려 세월이 힘인 듯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들이 책을 냈다는 사실이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왕언니들은 돌아오는 게 당연하니까. 그리하여 우리의 가슴에 믿음을 심어주기 마련이니까.

박완서는 여행지에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가

귀환한 왕언니들의 무기를 보자. 박완서와 오정희 모두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박완서는 기행산문집, 오정희는 산문집이다. 이 중에서 먼저 눈길이 닿는 것은 박완서의 것이다. 지금 박완서의 이름과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라는 기행산문집이라는 장르의 만남이 범상치 않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근에 등장한 ‘여행책’들을 생각해보자. 대개 두 가지의 흐름, 즉 실용적인 측면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여행의 로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박완서라는 소설가는 어떨까? 추측해보면 두 가지 흐름 중 어느 것에도 낄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렇다면 박완서는 기행산문집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통해 박완서가 찾은 곳은 남도, 하회 마을, 오대산 등의 국내 여행지와 티베트, 카트만두, 바티칸 등 해외 곳곳의 여행지다. 장소만으로 본다면 여타 책들과 크게 다른 건 없다. 이미 다른 작가들의 여행에서도 몇 번 볼 수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박완서의 여행길은 좀 남달라 보인다. 익숙한 곳을 찾은 것 같지만 한참을 걷다보면 익숙하다고 믿었던 것이 낯선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많은 여행가들이 여행지에 자신을 동화시키려 애썼다.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맛본 그 감정이 지나쳐서인지 지나온 삶, 그리고 생각을 그곳에 맞추려는 모습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여행이 삶을 껴안은 것이다. 하지만 박완서는 여행을 껴안았다. 삶의 한 모습으로 담을 뿐이다. 하여 여행의 맛은 인생의 ‘절정’이 아니라 밥에 얹어 먹는 김치의 맛, 시골에 방문해 맡게 되는 상쾌한 향내처럼 살며 겪는 ‘하나’에 불과하다.

때문에 추측대로 실용적인 측면이나 여행의 로망은 없다. 다른 여행책들과 달리 『잃어버린 여행가방』에서 언급한 여행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오래된 미래』 이후 신화적으로 여겨지던 ‘티베트’만 해도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보면 씁쓸해진다. 다들 좋다고 말할 때, 박완서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일제 시대의 단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자주 책장의 맨 앞을 보게 된다. 정말 기행산문집인가 하는 의문에.

기행산문집인지 아닌지 하는 생각을 문득 문득 하다가 여행의 종착지에 이르렀을 때, 쉽사리 감정을 정리하기 어렵다. 끝자락에 걸린 여운이 남다르다. 무슨 까닭인가. 여행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갖게 만들기 때문일 게다. 국내든 해외든 장소를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육신을 갖고 시작한 ‘삶’이라는 여행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일 게다. 진지하다.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게 만드는 그 맛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진지할 따름이다.

오정희가 밥 짓기 싫어 울었다고?

박완서가 기행산문집에서 진지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정희는 다소 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풀어진 모습이라는 건 무엇을 뜻할까? 1968년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이래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국내 유명 문학상을 다 거머쥐었으며 2003년에는 독일 리베르라투르 문학상까지 받은 오정희는 소설가로서 화려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내 마음의 무늬』에서는 그러한 소설가의 모습보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이 드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뿌듯해하고, 하고 싶은 일과 가사일의 충돌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인가. 춘천으로 가출하려 했던 치기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떠나버린 은사님들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보인다. 이렇듯 『내 마음의 무늬』는 소설가 오정희에 가려져 있던, 꿈꾸는 소녀 오정희를 비춰주고 있다.

『내 마음의 무늬』의 첫 장면. 오정희는 연휴를 맞아 집에 들렀다가는 자식들을 생각한다. 쓸쓸하다고 해야 할까? 자식들이 떠난 뒤 남편과 함께 탄 차를 ‘빈 차’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놀라는 그 모양이 낯설다. 오정희의 모습은 성장한 자식들을 돌려보내는 어머니이건만 낯설게 여겨진다. 어째서인가? 그녀 또한 분명 엄마, 어머니로 불리는 한 여인이었건만 화려한 빛 속에 가려져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오정희는 글을 쓰고 싶지만 조용히 집필할 공간이 없었단다. 그래서 주방에서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것이 못내 서러워 눈물지었다 한다. 그 장면을 상상하면 왈칵 눈물이라도 터질 것 같다. 소설을 쓰고 싶어도 남편과 자식에게 밥 먹일 걱정을 하고, 그런 걱정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던 오정희의 아련한 마음이 느껴지니 그럴 수밖에.

나이 듦에 대한 것, 문학을 사랑하는 것, 떠나보낸 이를 그리워하는 것…. 『내 마음의 무늬』에 담긴 그것들 하나하나가 오롯이 오정희의 마음을 비추는 듯 하다. 이런 것을 두고 노장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일상’을 갖고 보일 듯 보이지 않게 삶을 잘근잘근 씹어보게 만든 오정희의 『내 마음의 무늬』, 산문집다운 그 모습 그대로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사소한 것으로 아주 강력하게.

왕언니들, ‘짱’입니다!

박완서의 글은 거대한 붓으로 천지를 그리는 것처럼 웅장하다. 또한 고풍스럽다. 절로 기품이 느껴진다. 특유의 카리스마는 요즘 들쭉날쭉하게 등장하는 주제를 한 자리에 고정시켜 이 분야의 다른 책들을 움찔하게 만들 정도다. 왕언니다운 저력이 느껴진다.

오정희는 어떤가. 그녀의 글은 연필 하나 들고 스케치하는 것처럼 소박하지만 완성도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자고로 소박한 것에서 위대한 것이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문학을 생명력으로 여기던 일상에서 끄집어낸 글들은 두 번, 세 번 읽어보아도 그 감흥이 충분하다. 특유의 시선으로 삶을 관통한 오정희의 저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테다.

뜨고 사라지는 순간이 찰나로 통하는 시대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기도 어렵다. 하지만 박완서와 오정희는 되레 ‘짱’ 소리를 들을 만큼 듬직하게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잃어버린 여행가방』『내 마음의 무늬』를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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