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시 좀 읽을만한 거 추천해 줘요.”
가을 바람이 싸늘하게 불어오자 시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양입니다. 가슴 시린 계절을 메우는 데에는 감성 가득한 문장들이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 후배도 그랬나 봅니다. 평소에 시라고는 별 관심도 없던 제 후배는 뜬금없이 시집을 물어보았고, 저는 제가 예전에 선배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그 선배들의 답은 거의 모두 한결 같은 한 시인을 꼽았는데, 그가 바로 기형도였습니다.
비단 저 뿐 아니라 8-90년대에 젊은 시절을 살아온 많은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기형도를 꼽습니다. 음울하고 우중충하고 사방팔방 둘러봐도 다정한 모습 한 구석 보이지 않는 외로움만 시집 내내 가득한 그의 단 한 권 뿐인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영화의 모티브로(<질투는 나의 힘>), 노래 가사로('종이달'), 광주 비엔날레의 몇몇 작품들로 스며들며 오늘날의 문화 코드에까지 영향을 주며 살아있는 시의 숨을 쉽니다.
매캐한 최루탄 연기와 군화발 소리, 극한의 독재와 그에 맞서는 극한의 목소리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80년대에 시인은 젊은 날을 대학에서 보냅니다. 시인의 표현대로 ‘플라톤을 읽을 때마다 총성이 울리던’ 시절, 그러나 시인은 그 시대의 한 구석에 웅크려서 조용히 주변을 서술합니다. 많은 시인들이 부조리에 대항하였고, 다른 시인들은 아예 무릉도원의 이야기를 할 때 그는 그 싸움의 현장에 서서 아무런 감흥 없이 상황을 읊조릴 뿐입니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대학 시절’-
그의 시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받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현실을 벗어나 서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이끄는 중심에 들어가 있는 이도 아닙니다. 한창 독재정권에 대한 반대 데모로 학내가 조용할 날이 없었던 그 시절 그는 연대 백양로 한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로 끌려가고 감옥으로 끌려가는 친구들 곁에 있었습니다. 군중 속의 일반인이 세상을 느끼는 위치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의 중심에 서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것도 아닌, 그다지 내 의지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어떤 흐름 속에 들어가서 흘러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 느낌. 그것은 일종의 고독감이며, 그 고독감이 진하게 묻어나는 기형도의 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미처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내면의 깊은 상처를 건드리며 오래도록 남는 것이 아닐까요?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하나같이 위와 같은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살짝 세상에서 동떨어진 채 먹먹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는 내면의 고독이 시어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대학 시절과 같은 일상사부터 광주사태를 다루었던 ‘잎 속의 검은 잎’, 사랑 이야기를 쓸쓸하게 다룬 ‘그 집 앞’… 공포와 슬픔, 고독과 연민이 배어나는 시인의 단 한 권 뿐인 시집은 그렇게 우리 내면의 우울과 고독을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들은 그렇게 고독한 내면을 건드리면서도 내내 따뜻한 손길을 놓지는 않습니다. 외로움에 대해 딱히 이렇다 저렇다 칭송이나 면박이 없는 대신 그 외로움을 부르는 호칭은 연민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아래 시는 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로, 사랑을 잃은 이가 보내는 것들에 대한 역설적 감정이 덧씌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고독한 짧은 생을 살다 간 기형도의 시는 한국 문학사에서 이상에 비교하는 평론가가 있을 정도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그 독특함이란 난해하고 현학적인 문학기교가 아닌 읽는 독자가 가슴으로 느끼고 음미할 수 있는 것이어서 평단이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에게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습니다. 특히나 그의 독특한 스타일과 언어구사,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어두운 한 구석을 다루기에 더욱 친숙하고 더욱 큰 감동을 가져다 줍니다. 누구나 느끼는 고독과 공포를 누구나 동감하도록 언어로 빚어낸 고독한 문장가. 이 스산한 시인은 마치 자신의 시와 같은 분위기로 스물 아홉의 푸른 나이에 종로 한 구석의 어느 3류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고독의 시인답게 너무도 쓸쓸한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는 단 한 권의 시집이라는 아쉬움을 애호가들에게 남긴 채 이제는 남겨진 시로서만 말합니다. 바람이 차가와져 스산하다는 단어가 머릿속을 빙빙 도는 요즘, 문득 후배의 시집 물어보는 말에 기형도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비단 저 하나 뿐만은 아닐 듯 합니다. 내일은 출근길에 기형도 시집을 들고 와야겠습니다. 그리고 출근할 때가 아닌, 퇴근할 때 읽으며 가야겠습니다. 스산한 계절엔 스산한 그의 시가 어울릴 듯 합니다.
--------------------------------------
‘기형도’는 누구?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했으며 84년에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문화부·편집부 등에서 근무했다. 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그는 이후 독창적이며 강한 개성의 시들을 발표해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상자했으나 89년 3월 스물 아홉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타계했다.
------------------------------------------------------------------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은 어떤 책?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시집에서 기형도는 일상 속에 내재하는 폭압과 공포의 심리 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 세계는 우울한 유년 시절과 부조리한 체험의 기억들을 기이하면서도 따뜻하며 처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시공간 속에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