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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대로 읽기

소설 한 편에 집약된 근대-탈근대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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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파리의 연인> 후속작으로,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시청자들에게 애잔함을 전달해 주는 모양입니다. 예술의 도시 파리와 더불어 많은 여행객들에게 ‘가보고 싶은 유럽 도시 1위’로 손꼽히는 프라하는 예쁜 도시건축과 마리오넷 인형극 등 도시 특유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다양한 아이콘으로 가득 찬 도시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프라하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는 <프라하의 봄>이 있습니다. 전 세계적 혁명의 해였던 1968년, 스탈린식 억압적 공산주의 체제에 항거하여 일어난 자유 혁명으로 체코에는 새로운 해방의 기운이 찾아오고, 이를 사람들은 ‘프라하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해 여름에 탱크를 앞세워 밀고 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혁명 지도부는 숙청당하고 다시 한 번 독재의 암울함이 체코를 점령하지만, 그 잠깐의 해방구는 당시 68혁명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그 <프라하의 봄>의 원작 소설이 바로 오늘 살펴 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제목은 무척 유명해 유행어와 각종 패러디가 나올 정도이지만, 책 자체의 내용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남녀의 사랑이라는 사건을 매개로 작가 쿤데라가 풀어내는 것은 인간 자체와 인간을 둘러싼 시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서점 서평에서 쿤데라 책을 소개할 때 놓치는 부분이 많아 구간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책을 되새겨 볼까 합니다. 주인공 토마스는 프라하에 사는 의사입니다. 갑갑한 일상에 지루해 하는 그는 아내 테레사와 사랑하는 사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사비나 또한 사랑하면서 두 다른 스타일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양면성을 모두 만족시켜 보려 합니다. 테레사는 토마스의 그러한 면 때문에 때로는 고뇌하고 때로는 사랑하며 지내고, 사비나의 애인 프란츠 또한 사비나와의 관계 속에 헤맵니다. 공산주의 독재 체제가 붕괴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소련의 압력이 계속되면서 사회는 늘 불안한 상태입니다.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누리는 토마스는 그러나 그러한 사회 분위기의 불안함 속에 탈출구를 찾으려 하고, 아내보다 더욱 편안하고 사랑으로 구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여자 사비나에게서 안정감을 찾습니다. 그러나 열혈정신 사비나는 소련군의 프라하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망명길에 오르고, 토마스는 갈팡질팡하다 같이 망명길에 오르고는 곧 자본주의 사회에조차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다시 돌아온 이들 일행은 시골 의사와 사진작가 등 각자의 길로 살아가다가 결말을 맞습니다. 책에서는 다양한 개념들이 상호 대립하면서 작가의 생각을 대변합니다. 토마스와 사비나는 각기 인생을 ‘가볍게’ 살고자 하는 인물로 묶여 그들보다 ‘무거운’ 테레사/프란츠와 대비되지만, 토마스는 개인적인 침잠에, 사비나는 사회적 참여에 가까운 성향을 통해 또 서로 대립합니다. 테레사와 프란츠 또한 삶의 무게를 무겁게 지는 면에서 동일하지만, 혁명 지지 운동을 하다가 폭사하는 프란츠와 달리 테레사는 끝없이 가정 속의 삶을 추구합니다. 책을 읽고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면 이 책은 결국 뻔한 스토리가 되고 맙니다. 삶을 진지하게 사는 것이든 가볍게 사는 것이든 다 별볼 일 없고, 인생은 참으로 가벼운 것이다.. 라는 시시한 결론. 대부분의 리뷰나 서평도 이렇게 마무리가 되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뻔한 내용이 20세기를 대표하는 10대 문학 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쿤데라의 의도를 제대로 소설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 첫 장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참을 수 없는…』의 첫머리에 나오는 것은 철학자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에 대한 설명입니다. 니체는 삶을 긍정하기 위해 한 가지 가정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생이 끝나면 다시 똑 같은 생이 그대로 반복 재현된다고 하는 것이죠. 조금의 변화도 없이 태어나서 밥 먹고 잠자고 글 쓰고 책 사는 행위 하나하나가 그대로 반복되고, 그 반복되는 일생이 무한으로 이어진다는 가정입니다. 어차피 똑같이 반복될 인생이라면, 그런 삶을 그냥 긍정해 버리고 ‘오냐, 그래!’ 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니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는 초인이란, 그렇게 이 삶이 천만 번 반복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삶의 반복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소설의 첫 장에서 이 이야기를 왜 꺼냈을까요? 소설 후반부로 들어가면서 토마스-테레사 부부는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기 시작합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공 이름을 딴 ‘까레닌’이라는 이 강아지의 일상을 묘사하고 사색하면서 니체의 영원회귀는 이 소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보다 분명해집니다. 강아지 카레닌의 삶은 무척 단순하며, 매일매일이 그대로 반복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부부의 침대로 올라가 재롱을 부립니다. 곧 두 사람은 카레닌을 데리고 아침 빵을 사러 나가고, 카레닌은 빵을 물고 집에 달랑달랑 돌아와 아침을 먹고 열심히 장난을 칩니다. 그리고 낮잠을 자고, 저녁엔 산책을 합니다. 하루하루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카레닌의 삶이야말로 우리 눈에 보이는 ‘영원회귀’의 삶입니다. 반면 카레닌의 삶과 대비되는 인간의 삶은 어떠할까요? 등장하는 시대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프라하는 공산주의 체제 하에 있었고, 공산주의는 인류의 역사와 시간을 직선형으로 규정합니다. 초기 원시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를 거쳐 자본주의 시대를 넘어 비로소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일직선의 시간 흐름을 말합니다. 프라하에서 소설의 주인공이 된 이들의 시간은 카레닌의 순환적 시간이 아닌, 끝이 보이는 직선형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대립이 나타납니다. 순환적 시간의 강아지 카레닌과 일직선적 시간의 토마스 일행이지요. 작가 쿤데라는 그 두 삶을 대비시키며 비로소 묻습니다. 무거운 체 하는 인간의 삶이 진정 무거운가? 아니면 끝없이 반복되는 강아지 카레닌의 삶이 더 무거운가? 그리고 그 무거움은 가치 판단이 가능한 것인가? 직선형의 시간과 순환형의 시간, 이 두 차이는 근대성과 Post-근대성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실제로 직선으로 흐르거나 순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시간의 흐름을 자각하는 근대적 이성의 경우는 직선형의 시간개념을 가지고, 그를 자각하지 않는 경우는 순환적 시간을 갖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인간 이성에 대한 극단적 신뢰를 기초로 형성된 사회주의 체제와 이성을 갖춘 존재로 인정받지 않는 강아지의 시간은 이렇게 대립하면서 소설의 핵심 주제인 근대적 자각과 Post-근대적 자각의 차이를 꺼내 듭니다. 이 주제는 소설의 결말에서 또한 드러납니다. 주인공 부부는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생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독자들은 이보다 먼저 편지로 그들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순서대로 보자면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일어나 파티에서 춤을 추는 듯한 형태로 독자에게 다가오면서 묘한 여운을 남기는데요, 이 또한 결국 영원 회귀의 표현 방식입니다. 그들의 삶은 죽은 뒤에 또다시 반복되는 것이지요. 물론 작가는 그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가치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느 쪽에도 작가는 손을 들어주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참을 수 없는…』에 대해 내려지는 평은 자칫 오류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1968년, 히피 운동과 반체제 혁명, 반전 운동 등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학계에서는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던 그 해에 프라하의 봄을 겪은 작가는 자신이 살고 생각해 온 내용을 바탕으로 당대의 사상을 집약해 한 사건에 응축시켜 보여주는 놀라운 문학적 성과를 발휘했고, 그 결과물은 한 권의 책으로 남아 20세기를 대표할 문학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단순히 이 소설 한 권만으로는 이해하기 버거운 많은 개념들이 함께 들어 있기에, 다른 책들과 함께 연관지어 읽으면 보다 즐거운 쿤데라 읽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원회귀 개념을 설명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고고학자, 과학자, 역사학자가 모여 시간 개념을 설명한 『시간의 종말』 등이 소설에 표현된 시간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데라를 위시한 체코 문학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려면 쿤데라의 작품 외에도 그의 스승인 까렐 차페크의 저서들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어떤 책?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의미, 시간의 직선적 진행과 윤회적 반복의 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부정과 긍정의 개념, 우연과 명, 기독교적 인류학과 생명의 질서 등 다양한 지적 영역을 담은 작품이다. “밀란 쿤데라” 는 누구?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Brno)에서 태어나 그의 첫 저서 『농담 La Plaisanterie』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 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 1968년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에 침공하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의 숙청으로 인하여 그의 처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제거되었고 그 자신은 글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는 역경을 만났다. 1975년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왔을 때 "프라하에서 서양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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