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이렇게 만난 우리
튀르키예에서 태어나 여섯 살에 한국으로 이주한 베튤. 여성, 배우, 사회학 연구자, 이주민 등 여러 자리에서 경계를 교차하며 쌓아 온 이야기.
글 : 출판사 제공
2025.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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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라는 산문집을 선보인 작가 베튤 준불. 여섯 살에 튀르키예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삼십 년 가까이 서울에 살고 있는 이주민 여성. 손쉽게 해명되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분투하며 살아온 웃픈 이야기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자신을 증명하는 일은 항상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기에 현재는 연극 무대에 오르며 자신과 타인의 삶을 증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이지만 너무 많이 들어왔을 질문 같아 망설여집니다. 베튤 준불(Betul Zunbul)이라는 이름도, 이국적인 작가님의 모습과 유창한 한국말도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킬 듯합니다. 본인을 어떻게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는 항상 어렵네요.(웃음) 우선 객관적인 사실부터 나열하자면, 저는 여섯 살에 부모님과 함께 한국으로 이민을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주민입니다. 계산해 보니 한국에 산 지 28년쯤 되었네요. 스스로를 이주민이라고 소개하곤 하지만 사실 어디까지가 이주민이고, 어디까지가 원주민인지 참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를 들면 평생을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주한 사람도 이주민일 수 있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나’기 마련이니까요. 엄밀히 따지면 저는 너무 어릴 때 타의로 먼 거리를 이주해서 그런지 본인의 선택으로 이주를 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제게 한국은 이미 삶의 터전이라 여길 떠나는 건 상상할 수 없거든요. 


몇 해 전부터 스스로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한국 사회의 이주민, 여성, 예술 프리랜서(무자본 자영업자), 본국의 블랙리스트 등등의 경계가 교차되는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요. 이 문장만큼 명료한 문장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생각해 보면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는 이 문장을 설명하기 위한 책 같기도 해요. 저에겐 아무래도 ‘이주민’이라는 정체성보다 ‘경계’라는 키워드가 더 적확한 정체성으로 느껴지거든요. 

 

누구나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과정에서도 그 내용과는 다르게 이해되는 상황에 쉽게 노출될 것 같아요. 다시 말하면 너무 많이, 쉽게 오해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달까요. 베튤 작가님이 자주 듣는 오해의 말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책 속 입학처 에피소드처럼 근래 들었던 그런 오해의 말 중 재밌었거나 난처했거나 혹은 또 다른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 말이 있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책에서 여러 번 독립 의지를 다지는 대목이 나오는데요, 절묘하게도 책이 발행된 6월 18일에 제가 드디어 독립(?)을 했답니다. 책 내용이 다 사기처럼 느껴지시려나요? 아무튼 결혼을 하면서 그렇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또 신세계더라고요. 오해의 말이라고 범주화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질문을 보고 혼인신고 에피소드가 떠올랐어요. 결혼을 하고 배우자와 함께 혼인신고를 하러 갔는데, 제가 아무리 한국말을 유창하게 해도 구청 직원이 저를 직접 응대하지 않더라고요. 저에 관한 모든 것들을 배우자에게 질문하거나 제가 직접 해야 할 것들을 배우자에게 열심히 설명했어요. 제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유려하게 설명을 해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혼인관계의 ‘외국인’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한국인 배우자의 부속품 같은 존재구나 싶었죠.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색다른 경험이라 코미디로 잘 승화해서 배우자와 함께 웃어넘겼어요. 


혼인신고를 했으니 이제 비자를 결혼비자로 바꾸려고 해요. 결혼비자가 좀 더 안정적이기도 하고, 귀화를 하기 위한 필수적인 관문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야 법적으로 ‘국민과 동일한 지위를 가졌다고 인정되는 외국인’이 될 수 있어요. 아 이건 제 표현이 아니라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원 대상자를 규정하는 문장인데, 이 범주에 들어가는 비자가 난민, 영주, 결혼비자 딱 세 개밖에 없더라고요. 아무튼! 그래서 결혼비자 신청 절차를 알아보다가 또 한 번 적나라한 언어에 놀랐어요. 우선 제 배우자가 저에 대한 ‘신원보증서’를 작성해야 하고요. 또, 업체를 통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서(!) 6개월 이상 연애를 했다는 사진 혹은 카톡 대화 같은 사적인 자료를 증거 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제 배우자가 저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다는 기준이 되는 액수 이상의 자산을 증빙해야 해요. 원래 제 비자가 석사학위 이상의 고학력자에게 주는 ‘우수 인재’ 거주 비자인데, 결혼과 동시에 졸지에 제 신원조차 스스로 보증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우수 인재’였던(!) 제가 모든 것이 배우자를 통해야 하는 부속품이 된 기분이랄까? 아직 진행 중인 사안이라 다 정리가 되고 나면 이 복잡 미묘한 아이러니를 또 글로 쓰려고 해요.


아 참! 혼인신고를 하니 구청에서 ‘태극기’를 주더라고요. 외국인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혼인신고를 하는 모든 부부에게 선물로 주는 것 같아요. 마지못해 태극기를 받아오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단 태극기를 선물로 주는 자체가 너무 웃긴데, 저는 또 함부로 웃기만 할 수 없었어요. 분명 다른 신혼부부들과 똑같이 받은 태극기인데 제가 뽑아 드는 순간 국뽕의 최전선에 있게 되는 그림이라 또 하나의 적절한 블랙코미디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진지하게 이걸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고민이에요. 가지고 있자니 집에 둘 곳이 마땅치 않고, 화끈하게 계양하자니 다른 의미로 읽힐 것 같아서 그건 아니다 싶고……. 태극기 같은 상징물은 태워서 처분해야 한다는데 제가 나서서 태우자니 아무리 정중한 마음이어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고 말이에요.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를 펼쳐서 읽으면 베튤 작가님의 정체성과 이국적인 외모, 종교적인 배경 같은 조건을 오래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 같아요. 글을 읽으면 그저 우리 곁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사는 2030 여성 같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들거든요. 책에 ‘답답해서 글을 썼다’고 적었는데, 작가님에게 가장 떨쳐내고 싶던 답답함은 무엇이었나요?

다행히 여성 독자분들께서 많이 공감해 주시는 것 같아요. 얼마나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는 분들이 여럿 계세요. 평소 ‘멋진 여자 선배’를 갈망하고, 여성 동료들과의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는 맥락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편이라 그런 후기들이 참 든든하고 즐거워요. ‘답답함’이라는 건 결국 헤아려지지 못한 경험에서 발현되는데 안타깝게도 동시대 여성들 대부분이 이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책에도 썼듯이 누군가를 헤아릴 수 있는 섬세함이 결국 헤아려지지 못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헤아려지지 못 해봤기 때문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더더욱 여성 독자분들께서 제 이야기에 공감하고 반응해 주시는 것 같기도 해요.


글쎄요. 특별히 가장 떨쳐내고 싶은 답답함이라…… 답답함이란 게 진득한 덩어리가 뭉쳐 있고 엉켜 있는 감각이라 어떤 순간, 혹은 하나의 정의를 꼽기가 힘드네요. 조금 추상적이겠지만, 벼려낸 언어가 좌절될 때? 라고 답해야겠어요. 저는 항상 무언가를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왔거든요. 조금만 미끄러지면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만큼 불안한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늘 더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언어를 벼려냈어요. 그런데 그렇게 벼려낸 언어마저 통하지 않을 때 크게 좌절했던 것 같아요. 단어 하나하나를 수백 번씩 곱씹어서 선택했는데, 그런 노고를 전혀 몰라주는 상대들이 있잖아요. 사실 제가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결의 사람들인 거죠. 그걸 알면서도 그런 일이 반복되고, 결국 제게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설명해 내지 못해서 미끄러질 때 겪는 답답함이 가장 마음을 어렵게 만들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그건 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상대가 조금만 저를 헤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까지 미끄러지지 않았을 거예요. 반대로 곱씹어서 벼려낸 말을 단번에 알아봐 주고, 헤아려주는 사람이 딱 한 사람만 있어도 엉켜 있던 마음이 쉽게 풀려요. 여성 독자들께서 많이 공감해 주시는 것도 이런 맥락 같아요. 저도 여성 작가님들 글을 읽을 때 적확하게 곱씹어낸 언어를 마주하면 쾌감을 느끼거든요. 아무래도 비슷하게 헤아려지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그 노고가 보이는 것이겠죠? 그게 또 언어를 벼리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번역 일을 한다거나, 주식이나 NFT를 공부한다거나, 블로그나 전자책으로 돈 버는 법을 찾는다거나, 튀르키예 음식을 만드는 영상을 만들어보려고 했다는 내용을 읽고 참 반가웠어요. 해보지 않은,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다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또 있네, 하면서요. 사회학 연구자이자 배우로 사는 건 어떤가요? 배우라는 직업이 본인의 정체성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사실 연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우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지 않은데, 업계 사람이 아닌 분들에게 배우라고 소개되는 것은 늘 조금 어색하긴 해요. 배우라고 하면 ‘연예인’을 많이 상상하곤 하니까요. 그럼에도 업계 안에서 통용되는 심상의 배우라는 정체성은 이미 제 커다란 일부입니다. 회사에 다녀도 일과 일상이 분리되기 어렵다고들 하잖아요. 그래도 출근과 퇴근이 있으니 분리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배우 같은 직업들은 그보다 훨씬 일상 안에 녹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자꾸 영감을 받고 사고를 해야 창작의 과정으로 어떤 소재들을 끌어올 수 있기도 하고요. 관심사를 찾는 방법은 창작자들마다 다르지만, 저에겐 순간순간 화두가 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걸 진득하니 언어화하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러다 보니 창작자로서의 배우라는 정체성을 잊고 살기 좀 어려운 것 같아요.


제가 ‘창작자’와 ‘배우’라는 단어를 혼용해서 썼는데, 사실 업계에서도 조금 낯설 수 있는 조합이에요. 대우가 옛날에 비해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보통 배우는 누군가가 짜놓은 작업 세계 안에서 그것을 재현하는 도구로 인식되기도 하거든요. 작업 환경이 배우에게 얼마나 자유도를 주고, 얼마나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작업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권위적이지 않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작가가 쓰고 연출이 구성한 세계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 배우는 창작의 여지가 그렇게 크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서 작업 세계가 배우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정말 고단하고, 잘 맞더라도 염려되는 것들이 더러 있어 저는 항상 창작에 갈망을 가지게 돼요. 


이 일을 늦게 시작한 편이라 이런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아요. 어쩌다가 진로를 이렇게 확 바꾸게 되었느냐고요.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사회학 연구자와 배우는 너무 동떨어진 것으로 느껴질 테니까요. 그런데 제게 이 둘은 사실 아주 명료하게 맞닿아 있어요. 책에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연기를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만큼 저는 배우가 몸을 매개로 무언가를 또렷하게 말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스스로 감각하기에 동시대성을 가진 화두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탐색하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시선을 가지고 말한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거나 연기를 하는 일은 표현의 수단이 조금 다를 뿐 서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이런 부분이 제 정체성인 것 같아서 ‘창작자로서의 배우’라는 또 하나의 복잡한 화두에 갈망하고 집착하고 있어요. 


 

얼마 전 〈생추어리 시티〉라는 연극으로 ‘아마르 볼드’라는 배우를 만났어요. 처음엔 그의 외모가 너무 이국적인데 한국어를 꽤 잘해서 놀랐거든요. 극 중 역할 때문인지 서툰 한국어를 썼지만 다른 역할의 배우들과 충분히 소통할 수 있는 정도의 유창함이었는데, 연극이 끝나고 그에 대해 검색해 보니 그는 몽골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민이더라고요. 극의 주제였던 ‘이주민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정한 체류 자격’을 잘 보여줄 수 있어서 아마르 볼드라는 배우를 캐스팅했고, 어눌한 한국어도 일종의 설정이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아마르 볼드라는 배우도, 베튤 작가님도, 작가님의 친구인 아누팜 배우도 각자의 어려움을 갖고 있을 테고, 베튤 작가님도 〈생추어리 시티〉의 ‘헨리’ 같은 역할을 만난 적이 있으시지요? 이런 마음을 실제 극에 담아내신 적도 있으시고요. 배우로서 베튤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고, 어떤 어려움과 자주 만나나요? 또 배우로서의 그런 고민을 담아내셨던 최근 작품과 이어지는 고민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요. 

아마르 공연을 보셨군요.(웃음) 직접 알거나 건너 건너 알지만 애정하는 동료들이 많아서 꼭 보고 싶은 공연이었는데, 저는 작업과 겹쳐서 시간을 내지 못해 너무 아쉬웠어요. 재밌게 보신 것 같아 괜히 제가 기분이 좋네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배우가 몸을 매개로 말을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현실은 고유성을 가진 존재의 기호를 스스로 지워야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아서 어떤 갈망을 계속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환경이 권위적이지 않고 작업 세계와 제 신념이 잘 맞는 작품들을 선택하려고 많은 노력(?)을 한답니다. 먹고살려고 버둥대다 보면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말이에요. 그중에서 몇 개의 작품들은 확실히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면 아마 제게 그 작품들이 ‘헨리’ 같은 역할이지 않았나 싶어요.


몇 년전에 정진새 연출님과 함께 작업한 〈신파의 세기〉와 올해 ‘팔꿈치의 활동범위’라는 팀과 채민 작가님이 콜라보한 〈하지만 나는 당신의〉라는 작품은 아마 앞으로도 오래 간직할 것 같아요. 〈신파의 세기〉에서는 한국말을 잘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코미디적 설정으로 ‘디아스포라’라는 캐릭터를 연기했어요. 한국 ‘신파’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신파극들을 하나하나 패러디하는 극중극을 하는 3인방 중 한 명이었죠. 예를 들면 〈명량〉의 이순신을 제가 연기하면서 젠더와 이주 담론에 빗대어 국뽕의 맥락을 완전히 비틀어버린다거나, 〈약속〉의 결혼식 장면을 퀴어버전으로 비틀어버리는 작업이었는데, 그 비틀어짐에서 엄청난 쾌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나는 당신의〉에서는 ‘산업의 신’이 되어서 미등록 이주 아동 ‘아모’와 아모네 가족의 이야기를 서술했어요. 당사자의 이야기가 그대로 캐릭터가 되고 드라마가 될 때 생략되는 맥락들이나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라 그런 작품은 늘 조심스럽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산업의 신이 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를 소설처럼 서술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물을 지독히 불쌍하게 만들거나 대상화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서 아주 신나게 했어요.


이렇게 어떤 비틀어짐을 만들거나 기존의 것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면 제가 가진 기호들의 쓸모를 감각하게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든든해요. 그런데 한국에서 ‘외국인 배우’라는 타이틀로 활동을 하면서 이런 작업을 많이 만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운이 좋아서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지만 연극이라 가능했다는 맥락도 있어요. 연극은 뭐든 우기면 가능한 매체니까요.(웃음) 영상 매체에서는 아무래도 이런 비틀기를 쉽게 선택할 수 없거든요. 영상에서는 진짜처럼 보여지는가가 정말 중요한데, 저는 아무래도 진짜처럼 보이지 않는 거죠. 이국적인 생김새를 가지고 한국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인물을 상상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우니까요. 그러다 보니 기존의 것을 강화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더 많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요. 생각해 보면 여성 서사가 각광을 받고 영상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잖아요? 그런 여성들이 현실 세계에 없었던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아마 새로운(?) 이주민이 등장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지금은 이주노동자 아니면 국뽕 외국인으로 한정되는데 이런 역할을 제 고유성을 지우면서 연기하는 것이 외려 현실 세계의 제 존재를 지우는 일에 가담하는 것 같아서 선택하기가 꺼려지더라고요. 이 아이러니가 제 창작의 환경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적 화두이기도 하답니다. 작년에 창작집단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와 함께 〈P와 함께 춤을〉이라는 공연을 올리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직접 쓰고 공연하기도 했어요. 이 작품도 제겐 오래 기억될 텐데, 앞으로도 이런 맥락의 이야기들을 많이 할 수 있는 창작자-배우가 되고 싶어요. 


〈신파의 세기〉

 

첫 책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를 통해 작가라는 정체성을 얻게 되셨어요. 이제 작가님을 증명하는 데 있어 이 책의 의미가 작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첫 책을 내신 소감이 궁금합니다. ‘독자’라는 새로운 존재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도 함께 부탁드려요.

사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았던 지인들에게도 연락을 많이 받았고요. 전혀 모르는 분들께서 글을 읽고 남겨주신 이야기들을 마주하면서 뭉클해질 때가 많아요. ‘이렇게 잘 읽어주셨다고?’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놀라요. 뭉뚱그려지는 게 답답해서 쓴 글인데, 많은 분이 거기에 공감해 주시고, 복잡한 것을 복잡함 그대로 이해해 주셔서 답답한 게 싹 잊히는 느낌이랄까요? 사람이 정말 단순한 동물이구나 싶어요. 그냥 단순한 공감 한마디에 30여 년간 쌓아온(?) 분노와 울분이 글쎄 녹아내리더라니까요. 


글을 쓰면서도, 출판을 위해서 이리저리 수정하고 편집자님과 의논하면서도 스스로 의심스러웠거든요. 이 글들이 세상에 나오는 의미가 뭘까? 힘을 가질 수나 있을까? 그런데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독자분들께서 한땀 한땀 힘을 새겨주시는 것 같아요. 제 글이 그 자체로 갖는 힘이라기보다는 독자분들과 만났을 때 덧붙여지는 감각들이 저를 떠나서 다른 인격체로서 힘을 가지게 되는 느낌이에요. 이게 저에게도 느껴지는 것이 너무 신기해요. (저만 설레발인 것 같기도 하지만요.(웃음))


너무 뻔한 말이 될 것 같지만 이렇게 한땀 한땀 감각을 새겨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독자분들게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언제든 지치고 소외된 마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길, 혼자가 아니라는 데서 그 마음이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한 분 한 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됩니다. 어떤 글과 무대를 계획하고 계시고, 또 글을 읽는 독자, 연기를 보는 관객들과 어떻게 만남을 이어가고 싶으신가요? 

저는 또 어디선가 사부작사부작 균열을 내고 있지 않을까요? 계란으로 바위를 열심히 쳐서 내는 균열일 거라 당장은 안 보이겠지만요. 제가 직접 연출하고 출연하는 작품들을 내년에 무대화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있어요. 배우로서는 이 자체도 하나의 균열을 내는 행위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려면 우선 지원사업의 문을 열심히 두드려 봐야 해요. 외국인 예술인 증빙 같은 행정적인 자격 문제 때문에 올해 지원사업에 서류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고요. 자전적인 1인극을 만들고 싶은데, 공연용 대본을 올 하반기에 구성해 보려고 하고요(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녀야 작업을 할 것 같아요!). 작년에 우연한 기회의 낭독공연으로 〈웨이 투 와이키키〉라는 작품을 만났는데, ‘경계’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언어화해 준 작품이라는 생각에 냅다 작가님에게 제가 연출하면 안 되겠냐고 연락을 했어요. 다행히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귀중한 동료들을 모았는데, 내년에 꼭 올릴 수 있도록 이런저런 궁리를 하면서 올 하반기를 보내지 않을까 해요. 그 외에도 소소하게 공연을 하면서 관객들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관객들과의 만남은 어느 정도 틀이 잡히는데, 독자들과의 만남은 엄두가 나지 않지만, 슬슬 새로운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선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에서 펼쳐 보였던 화두들을 잘 떠나보내야 할 것 같아요. 답답해서 봇물 터지듯 쏟아냈던 말들이기도 했으니까요. 아직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언어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 오랫동안 부여잡고 있었던 화두여서 새로운 화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곤 합니다. 무언가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역시 글을 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당분간은 과도기적 습작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해요. 공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분명한 건, 글이나 연기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기존의 것들을 비틀어서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롭게 질문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요. 발칙하지만 무해하고 귀엽게 균열을 낼 수 있는 방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저부터 계속 새롭게 질문해야겠죠?

 

마지막으로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를 통해 만날 ‘독자’분들께 인사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빈 화면에 커서를 띄우고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책은 어떻게 썼나 싶어요. 글을 쓰면서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정말 많이 썼어요. 어느 순간 왜 이렇게 ‘내가 많아?’ 싶어서 ‘나는’을 지우는 연습을 했을 정도로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어의 글들이 자의식 과잉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 글이 독자를 만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계속 의심했어요. 작가는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나 봐요. 많은 독자분이 저보다 선명하게 제 글의 의미를 찾아주고 계신데도 불구하고 계속 의심하고 있어요. 


어쩌면 이 글들이 의미가 없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루빨리 빤하고 낡은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그만큼 제게도, 제 이야기에 공감해 주시는 많은 분에게도 이 이야기가 절실한 이야기로 느껴져요. 누군가 글을 읽어줄 때마다 그 절실함이 선명해져요. 


글을 읽어주신 분들, 읽어주실 분들 모두에게 이 책이 작고 하찮은 계란 같은 무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아주 큰 바람이 있어요. 한 분 한 분 계란을 들고 바위를 내려치다 보면 바위가 부서지지는 않겠지만 더럽고 냄새나서 자연스럽게 피해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생기지 않을까요? 저는 더럽고 냄새나는 바위 주변 어딘가에서 푯말을 새우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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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