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과거에는 인종, 성별, 민족과 같은 개념에 힘이 있었습니다."라는 강렬한 첫 문장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회사가 생김새 때문에 지원자를 탈락시키고, 사람들은 피부색으로, 성별로, 신체 조건으로, 태어난 곳으로 구분되던 시절은 이미 오래전의 일.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아이들이 꿈을 버렸던 과거를 지나 이제 세상이 바뀌어 낡은 악습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드디어 꿈꿔 왔던 좋은 세상이 미래에 도래한 것일까? 사람 간의 차별과 혐오와 멸시가 없는 사회를 이룬 것일까? 『마녀가 되는 주문』의 출발은 새로운 세계의 선언임에 분명하지만, 이 선언이 끌고 나가는 사회 분위기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그러므로 작가가 설계해 낸 이 한 편의 SF를 읽으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생존 룰을 알아 버린 아이들이 가감 없이 맞닥뜨리는 세상의 민낯은 굳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르지 않아도 될 것이기에... 작품을 읽고 나면 묻고 싶은 질문이 더욱 많아지는, 단요 작가의 세계를 잠시나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단요'라는 필명의 의미와 짓게 된 계기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현실에서의 삶과 소설을 쓰는 삶을 최대한 분리하고자 하는 편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름과 필명을 따로 두게 되었고요. 단요는 보드게임의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족보 중 하나를 부르는 말인데, 적당히 깔끔하고 어감 좋은 단어라 필명으로 삼고 있어요. 특별한 작명 의도가 있지는 않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일반소설과 장르소설, 성장소설을 유연하게 오가시는데요. 이렇게 다양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동력이 있다면요?
일반소설이 장르소설과 엄격히 구분된다고 보지 않는 편입니다. 일반소설이라고 하면, 보통 문단에서 주로 다루어지는 유형의 소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연하게도 모든 사조와 장(場)에는 그 나름대로의 규약이 있기 마련입니다. 리얼리즘이든, 마술적 리얼리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모더니즘이든 주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등이 나름대로 정형화되어 있지요. 그 점에서 각각의 사조는 하나의 장르라고 보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SF의 규약을 잘 숙지하고 이해하여 SF소설을 쓰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리얼리즘의 규약을 잘 숙지하고 이해하여 리얼리즘 소설을 쓸 수도 있겠지요.
각각의 사조가 곧 하나의 장르라는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작가님이 다루는 이야기에 관해서도 여쭤보고 싶은데요. 지금 우리가 읽어 내야 할 시선과 목소리에 관한 예리한 감각과 성찰이 전제되는 서사로 여겨지거든요. 사회 안팎의 다양한 삶과 사람과 모습, 부조리 들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는 느낌이요. 평소 사회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은지요?
사회적인 부분이라고 하면 다소 포괄적인 것 같고요, 규칙과 관계가 빚어내는 역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조건하에서 어떤 욕망과 필요가 발생하는지, 그에 따라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그 각각의 합리적 선택이 큰 틀에서는 어떤 방향성으로 나타나는지, 그게 종합적으로는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사고 실험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한 사람의 경로를 따라가는 작업이 소설 쓰기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보통 이런 종류의 사고 실험은 사회를 대상으로 하기 마련이라서, 자연스레 사회 현안에 밀착한 글을 쓰게 되는 듯합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 『마녀가 되는 주문』은 그 사고 실험의 중심에 서 있는 작품인 것도 같아요.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경제학자가 1955년에 제안한 계약 형태가 있습니다. '인적 자본 계약'이라는 것인데, 설명하자면 이런 구조입니다. 학비 제공자가 우선 학비를 지원한 다음, 학생은 졸업 후 소득의 일정 비율을 학비 제공자에게 납부하는 것이죠. 일반적인 학자금 대출에서는 원금과 이자를 더한 고정액을 상환하지만, 해당 계약에서는 학생이 고소득을 거둘수록 학비 제공자의 수익도 증가하게 됩니다. 반대로 학생이 저소득 일자리를 얻는다면 학비 제공자의 수익은 감소할 테고요.
인간을 일종의 투자 상품으로 간주하는 계약인데, 이 계약의 핵심을 조금 극단적으로 틀어 보면 흥미로운 배경이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작중에 등장하는 '학교'인데요, 이 학교의 학생들은 학비를 대신 납부해 줄 기업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 기업체의 연구원으로 채용되기 위해 경쟁하고 있죠. 그 경쟁은 21세기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실은 큰 차이가 없고요.
작품을 읽고 '딜레마'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번쩍 스쳤어요. 일찍이 생존의 법칙을 알아 버린 아이들이 빠져드는 고민과 갈등의 순간들요. 그러한 순간이 주인공 서아뿐 아니라 모두에게 닥치지만 이를 어떻게 어디까지 감당할 것인가로부터 이후의 선택과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느낌이었어요. 작품을 통해 가장 마음이 쓰였던 아이가 있었나요? 작품 밖에서라도 좀 더 이야기를 건네주고 싶은 아이가 있는지요?
『마녀가 되는 주문』의 아이들은 모두 인간관계와 물질적 조건 사이에서 복합적으로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여기에서의 물질적 조건은 단순히 돈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 규약이나 주변 환경일 수도 있겠지요. 그중에서 도진이는 사회의 규칙에 순응하면서도 냉소를 보이는, 위악적인 아이인데 단순한 악역보다는 복잡한 심리를 가진 아이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편입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도진이와 현의 충돌과 그 결과도 도식적인 대립을 벗어나 있는데, 여기에서도 생각할 점이 생겼으면 좋겠고요.
함께 작업하면서 '단요 작가님은 탁월한 설계자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어떠한 세계를 설정하고 이를 힘 있게 밀어붙이는 일이, 확신 없고는 쉽지 않잖아요. 게다가 이 작품은 15년 전, 1년 전, 현재로 이어지는 어떤 삶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빈틈없이 꿰어 가고요. 작가님의 작법 방식과 스타일은 어떤 편인가요? 서사의 설정을 먼저 촘촘하게 짜 놓고 기승전결을 향해 쌓아 가나요?
굳이 설정을 한다기보다는, 큰 규칙을 만든 다음 자연스레 파생되는 하위 규칙들을 따라가는 편입니다. 예컨대 『마녀가 되는 주문』에는 대학원과 비슷한 체제로 운영되는 영재학교가 나오죠. 이 학교에서는 막대한 학비를 대납해 줄 후원 기업을 찾지 못하면 학자금 대출이 모두 학생과 그 가족의 몫이 됩니다. 대신 훌륭한 성과를 내서 기업 후원 계약에 성공하면 인생이 탄탄대로로 피고요. 해당 규칙을 대전제로 삼은 다음 일반적인 행동의 이유들을 고려하면 하위 규칙과 전개는 자연스레 발생합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학교의 규칙에 순응하는 아이, 포기를 택하는 아이, 돈과 친구관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아이 등이 있으리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그런 욕망들이 부딪히는 양상도 예상할 수 있겠죠.
글을 쓸 때 특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점이 있다면요?
문학의 완성도에 있어 문장이 중요한가, 내용과 구성이 중요한가 하는 질문이 꽤 오래 지속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저런 요소들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합니다. 예컨대 포크너가 『곰』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 문장으로 『파괴된 사나이』나 『내 총이 빠르다』를 쓸 수는 없는 법이고, 반면 로렌스 블록의 문장은 간단함과 투박함 사이를 넘나들지만 『아버지들의 죄』에는 더없이 어울립니다. 따라서 각각의 내용과 구성에는 가장 적합한 문장의 형태와 리듬이 있기 마련이고, 그 최적의 조합이 쓰이기 전에 이미 존재한다고 느낍니다. 최적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마녀가 되는 주문』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히기를 바라는지요?
내 주변인이 나의 경쟁자인 상황,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과 물질적인 욕망이 충돌하는 상황, 물질적인 생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물질적인 성취로 귀결되는 상황은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와닿는 딜레마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 또한, 고등학생에게는 고등학교처럼, 대학생부터 대학원생까지는 대학교처럼, 직장인에게는 직장처럼 보이도록 설정되어 있고요.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처럼 몰입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작가님의 또 다른 작품들도 벌써 기다려집니다.
아무래도 연초에 수상 소식이 잇달아 두 차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출간 일정도 함께 정해지게 되었는데요, 6월 14일에 문윤성SF문학상 수상작인 『개의 설계사』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건 영어덜트나 청소년과는 거리가 많이 먼 SF예요. 심리 미스테리의 성격도 짙고요. 한편, 7월에서 8월 사이에는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인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가 출간되는데, 이건 페이크 르포 형식의 사변소설입니다. 한편, 연말에는 만진 동물을 케이크로 바꾸어 버리는 남자와 방황하는 중학생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장 소설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네요. 셋 모두 흥미로운 글일 거라고 자신해 봅니다.
*단요 사람 한 명과 함께 강원도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사람이라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즐겨 쓴다. 청소년 성장 소설 『다이브』와 금융소설 『인버스』를 썼고, 문윤성SF문학상과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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