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본가에 내려가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에 만났으니 십 년이 훌쩍 넘은 사이다. 고향에서 만나면 가는 장소는 매번 비슷비슷하다. 늘 가는 카페에 갔다가 가끔은 졸업한 학교 근처를 걷고, 늘 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헤어진다. 우리가 살았던 동네는 변화가 빠르지 않다. 사라지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간혹 함께 영화를 볼 때도 있는데, 어렸을 땐 그토록 커다랗던 상영관이 한없이 작게 느껴질 때마다 세월을 체감한다.
동네에 있는 낡은 영화관에서 <슬램덩크 더 퍼스트>를 보고 나와 함께 공원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 친구가 말했다.
"우리, 학생 때는 진짜 시시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어. 십 년째 같은 이야기를 해도 안 질리잖아."
그러자 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좀 신기해. 우리가 학생으로 만나서 학교에서 함께한 시간은 고작 삼 년인데, 왜 그 이후 십 년보다 고작 삼 년 동안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될까? 기억도 그래. 성인이 되고서도 너희와 함께한 것들이 많은데 제일 선명한 건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야."
그 말에 우리는 모두 동의했다. 대단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게 아닌데도 술이라도 들어가면 늘 특유의 음침했던 학교를 되새김질했다. 그야말로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크게 바뀐 것 없이 낡아가는 동네 풍경을 마주하면 금방이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집에는 여전히 교복이 있고, 한숨 푹 자고 난 뒤 그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면 졸음의 기운이 가득한 아침 영어 듣기 시간이 반겨주고... 어차피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는 실없는 상상의 방향을 바꾼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하는 말이 있다. 딱 한 달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서 지내고 싶다는 말이다. 시험을 더 잘 보겠다거나,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걸 시도하겠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 느껴보고 싶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내가 하이틴을 좋아하는 이유다.
하이틴이라면 다 좋다. 아무리 유치해도, 비호감으로 오버하는 주인공이 나와도, 공감성 수치를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연달아 터져도 괜찮은 (아마도) 유일한 장르, 하이틴. 오히려 학생 때는 그 매력을 몰랐었다. 현실은 잘생긴 쿼터백 남주인공은커녕 소통할 수 있는 남자라곤 머리가 벗겨져 별명이 주꾸미였던 담임 선생님이 유일했고, 알록달록한 영화 속 학교와 달리 지은 지 백 년 된 유서 깊은 학교 건물은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음산할 거 제대로 음산하면 콘셉트적이기라도 했을 텐데, 리모델링을 거친 회색 건물은 그냥 못생기고 낡은 공립 학교 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실이 이런데 외국 십대들이 '하하 호호' 사랑을 불태우며 성장하는 하이틴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하이에나처럼 새로 뜨는 하이틴물을 찾아 각종 OTT를 정처 없이 헤맨다. 지난 회차에 언급한 오컬트, 호러처럼 기를 빨리게 하는 작품을 보면, 그다음에는 무조건 상큼 발랄한 하이틴으로 정화를 시켜줘야 했다. 십대의 양기를 이용한 일종의 구마 의식이랄까? 가끔은 보면서도 어이없을 때가 있다. 나는 이걸 왜 보는가? 감정의 파도에 집어삼켜진 십대들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게 내용의 대부분인 이런 걸 왜 이렇게 좋아하지?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 <시니어 이어>에는 사고로 코마에 빠져 20년의 세월을 통째로 잃어버린 주인공이 나온다. 몸은 서른일곱 살이지만 정신은 열일곱에 멈춘 고등학생 주인공이 꿈이었던 프롬 퀸(prom queen)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사고의 원흉에 대한 복수보다는 잃어버린 시간과 꿈을 되찾는 게 주된 줄기다. 별생각 없이 틀어둔 영화의 끝자락에 나는 청승맞게도 눈물을 훌쩍였다. 주인공이 처음 사고를 당했던 치어 리딩을 완벽하고 즐겁게 소화해 내는 엔딩 장면이었다.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잃어버렸음에도 결국 행복하게 웃으며 끝나는, 그 답답할 만큼 천진한 결말이 좋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마 이십 년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애초에 치어 리딩은커녕 재활 치료를 하는 데만도 수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간직하고 있던 꿈보다는 고난을 안겨준 악역에 대한 미움이 훨씬 커질 테고, 장르는 코미디 드라마가 아니라 잔혹한 스릴러 복수극으로 방향을 틀었을 것이다. 나는 애초에 이 영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이 어설프게 행복한 결말이 불쾌할 것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어차피 하이틴물이란 다 그런 것이지 않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십대 시절에 대한 환상을 파는 이야기. 물론 넓디넓은 미국 땅 어딘가에는 분명 하이틴 드라마 같은 삶을 사는 이들도 존재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니까.
아기자기하게 세팅된 허구 속 세상의 주인공은 보여준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극복이 가능하다는 걸, 다시 괜찮아질 수 있다는 걸. 이 꽃밭 같은 결말이 나는 무척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그건 아마도 허구 밖에서 그 메시지가 통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또한 화면 밖에서는 그러기 힘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므로. 하지만 힘들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다. 자주 두 표현의 차이점을 잊는다. 시즌2까지 나온 <더 폴리티션>의 주인공은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이 목표다. 아직 십대에 불과한 주인공은 진지하게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믿고, 그 첫발로 청소년 정치극에 뛰어든다. 미국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것과 될 수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내 사촌 동생이 주인공 같은 말을 하고 다녔다면 등짝이나 때렸을 테지만 나는 이 어이없는 욕망에 이끌려 이야기에 빠져들다가, 이내 설득되고 그를 응원하게 된다. 과하게 희망적이라 무모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이, 아주 적은 가능성을 천연덕스럽게 파고드는 이야기들이 좋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다 알고도 속아주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시니어 이어>처럼 희망적인 하이스쿨 하이틴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아이 엠 낫 오케이>는 우울한 초능력 소녀가 주인공이고, 최근 즐겁게 보고 있는 유럽 드라마 <유포리아>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온갖 일탈을 뮤직비디오처럼 세련되게 보여준다. <유포리아>의 충동적인 주인공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의 착실하다 못해 광기 어린 입시 청소년들이 나오는 <스카이 캐슬>과 <공부의 신>이 떠오른다. 영상 콘텐츠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작년엔 백온유 작가님의 『유원』을 무척 감명 깊게 읽었으며,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 역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분명 청소년들이다.
나는 무수한 작품들을 통해 짧은 차원 여행을 거듭한다. 내가 되어보지 못한 십대 생활을 다채롭게 누리다 보면 바보 같은 실수와 가벼운 웃음 사이에 존재하는 가능성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심란한 뉴스와 일상의 피로에 지친 어느 날, 별생각 없이 고른 하이틴물을 보며 '어렵다'와 '없다'의 차이를 떠올리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된다.
추신.
금발의 미남, 미녀만 등장했던 옛날과 달리, 요즘에는 비교적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는 것도 즐거운 감상 포인트다. 동양인의 비중은 아직 너무 적지만 말이다. 요즘 제일 기다리고 있는 건 자칭 '찐따'인 인도인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즌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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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소설가)
소설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등을 썼다. 스릴러, SF, 호러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있다.
영영
2023.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