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강암 말기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간병하며 SNS에 쓴 3년간의 일기다. 말기 암 판정부터 수술 결정, 항암과 방사선 치료, 이후 회복과 쇠약을 반복하기까지 책 속의 여러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은이가 어머니를 간병하는 모습 속에서 오히려 어머니가 홀로 두고 떠날 아들을 위해 인생 수업을 가르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은이 역시 이 책 『입에 좋은 거 말고 몸에 좋은 거 먹어라』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어머니 간병 시간은 나의 인생 수업 시간이었다. 이토록 멋진 수업을 내가 어디서 또 받아볼 수 있을까."
2019년부터 3년 동안 말기 암인 어머님을 간병하셨다고요. 바쁘신 와중에 어떻게 『입에 좋은 거 말고 몸에 좋은 거 먹어라』를 쓰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책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암 치료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아 조언을 구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하나 올렸는데, 많은 분이 조언과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어머니의 치료와 재활 과정은 물론, 제가 감동한 어머니의 지혜로운 말씀을 지속적으로 올렸습니다. 그때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그 반응이 간병하는 데 위로가 되고 큰 힘이 됐습니다. 그러한 글을 3년 동안 꾸준히 쓰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됐지요.
말기 암 판정부터 수술 결정, 항암과 방사선 치료, 이후 회복과 쇠약을 반복하기까지 그 과정을 함께하느라 무척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드셨나요?
결정의 순간들이 늘 힘들었어요. 암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옳은지, 방사선이나 항암 치료를 받게 하는 게 괜찮은 선택인지... 어머니의 목숨이 걸린 결정인지라 참 어려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제 목숨이라면 오히려 쉬웠을 텐데, 아무리 제 어머니일지라도 제 판단에 생사가 갈릴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고 또 두려웠습니다.
어머님과 함께 보낸 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어머니께서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자식에게 더 이상 폐가 되지 않겠다며 곡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2주간 혼수상태에 계시다 잠시 깨어나셨을 때, 어머니는 제 손을 꼭 잡고 웃으시며 밥은 먹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식 걱정부터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이 남기신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요?
"발이나 얼굴이나 다 같은 한 몸이니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말씀은 이제 삶의 지침이 되었지요. 너무 평범한 듯하지만 참 지키기 어려운 말씀이죠. 내 몸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는 말씀입니다.
페이스북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다양한 조언과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관련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일면식도 없이 페이스북으로만 맺어진 친구들과 제 글을 접한 분들로부터 다양한 정보와 물품이 답지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캐나다, 호주, 미국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머니의 투병을 응원해주셨지요. 백두산 산삼을 열한 뿌리나 보내주신 중국의 친구분도 있었고, 손수 기른 토종꿀을 보내주신 분도 있었고, 입안의 침이 말라 고통받는 어머니를 위해 치료제 정보를 알려주신 호주의 간호사님, 미국과 캐나다의 의사 선생님도 계셨지요. 그야말로 온 세계가 어머니를 함께 돌봐주신 셈입니다.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살아생전, 어머니를 간병하면서 얻었던 가장 큰 깨달음은 나이 들어 노동력을 잃고 환자가 되신 우리 부모님은 결코 잉여 인간이나 피부양자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들이 만든 세상에 살고 있고, 그분들이 지어 올린 성채에서 안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마움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제가 만든 세상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더러 노동력을 잃고 약해지고 환자가 된 부모님을 짐스러워하기도 합니다. 물론, 개개인의 짐이 너무 무겁기만 한 것도 사실입니다만, 아무튼 부모님들도 주눅 들고 미안해하십니다.
하지만 실상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 발전에 기여해온 어르신들을 잉여 인간 취급하며 부양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려는 사회적 분위기와 정부 정책입니다. 정부가 고작 5년간 출산 장려 예산으로만 198조 원을 쏟아붓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정작 살아계신 어르신들의 노령 연금 몇만 원 올리는 것은 아까워합니다. 노인 복지를 위한다는 요양 정책도 업자들을 위한 '요양 사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정부의 정책은 출산 장려·청년 정책에 편중되어가고, 노인들을 잉여 인간 취급하는 청장년 세대의 시선은 고착화되어갑니다. 늙지 않을 청년은 없을 텐데 말이죠.
부모님들은 피부양자가 아닙니다. 열심히 살다 나이 들어 부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지요. 그것도 스스로 이룩한 사회적·개인적 자산을 아주 조금 쓰다 가는 것뿐이고, 그나마도 대다수는 세상에 물려주고 가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들은 더 당당히 요구하고 누리다 가실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권리를 누리게 해드릴 의무가 있습니다. 병들고 약해진 부모님들은 짐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무게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습니다! 세상은 미래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나 청년만이 아닌 노인까지 위하는 나라가 진정한 나라입니다.
저자분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한말씀 부탁드립니다.
사람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니 무조건 힘내라고만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도 내 어머니, 내 가족의 목숨을 살리는 일은 세상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니 지치지 마시라고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강제윤 1988년 <문학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시인. 문화일보의 '평화인물 100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청년 시절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로, 인권 운동가로 살았으며 3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8년, 귀거래사를 부르며 보길도로 귀향했으나 고향에서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보길도의 자연 하천을 시멘트 구조물로 바꾸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려는 행정관청, 토목업자들과 맞서야 했다. 그 결과 자연 하천을 지켰고 33일간의 단식 끝에 댐 건설도 막아냈다. 하지만 2005년 어느 날, 문득 떠돌며 살고 싶은 열망에 이끌려 다시 고향을 떠났다. 지금껏 거처 없는 유랑자로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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