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동안, 입은요?] 차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표일배는 간단히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도구로, 거름망이 달려 있어서 편하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차가 우러나면 버튼을 눌러, 차를 내려 마시는 방식이다.
글ㆍ사진 염승숙(소설가)
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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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마감 때 무엇을 먹을까?
염승숙 소설가와 윤고은 소설가가 글쓰기와 음식에 관한 에세이를 번갈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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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를 바보 멍청이라고 원망하다니, 제정신인가!(언제 어디서든 응급실 의사처럼 소설을 쓸 수 있어야 한다니, 순간 울컥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투정 부리고도 싶어지는 것이다. 소설가는 작품을 공들여 완성하고 나면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빈 종이와 다시 마주한다. 모니터 앞에서, 깜박이는 커서만이 독려하듯 기다려주는 시간을 견딘다. 견뎌내야 한다, 고도 말할 수 있다. 이건 누군가에게는 희열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체로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편이다. 수없이 거듭해도, 소설 쓰기라는 건 기본적으로 능숙해지지는 않는 거란 걸(소설을 써오는 와중에!) 깨달았기 때문인데, 이건 익숙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사전적으로, 익숙하다는 '어떤 일을 여러 번 하여 서투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소설가는 그저 소설 쓰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수행해서 결과물을 내는데, 완성도나 만족도와는 별개로, 사실 이건 '웬만큼 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다만 소설을 쓰는 게 익숙한 사람이 소설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어떤 작가도 작품을 완성하고 난 뒤에 "기가 막힌 걸 썼어! 나는 천재야!"라고 흥분하거나 오열하진 않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가는 일상적인 자기 의심과 패배감에 자주 시달리면서도, 대체로는 묵묵히, 쓰는 사람으로 돌아간다. 능숙해지지 않더라도,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생활의 달인>에 출연할 수 없는 직업군이라고 하더라도...) 책상에 앉는다. 잠잠히, 커서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익숙함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왜냐하면 소설을 써온 사람이라면, 소설을 잠시 쓰지 않았을 때 혹은 소설을 쓰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위치로 돌아오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소설가란 소설을 호기심으로 언젠가 한 번쯤 써본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지금, 계속, 쓰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서, 소설이라는 장르는 '프로 레슬링' 같아서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다고 말했는데 그건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소설가는 시간과 체력의 영속성을 믿지 않고, 시대 사회와 불화하고, 더불어 스스로를 불신하면서도, 그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 냉연히, 책상 앞에 앉는다. 단어와 문장을 점검하며 백지를 채워나간다. 써야 한다고 여기고 쓰는 사람만이 마침내 쓸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엄혹한 시간인 것만은 분명하다.

앞서 사과했던 필립 로스에게 돌아가자면(그를 원망만 할 수도 없는 것이죠... 흠), 그도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언제 어디서든 소설 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소설가의 삶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속적인 의심이 어떤 식으로든 사라지지 않으므로 글쓰기는 끔찍한 악몽과 같으며, 실제로 모든 작가에게 필요한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는 일을 하며 조용히 앉아 있는 능력이라고.

중요한 건 이거다. 소설을 쓰며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남들보다는 분명히 좀 더 오래, 조용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 나 홀로 집중하고, 깊이 몰두하는 시간을 필연적으로 가져야만 하는 직업적 특수성이 소설가에게 있다. 

조용히 혼자 '잘' 앉아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실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태생부터 고독한 동물이 틀림없지만, 공허를 견디는 것엔 수련이 필요한 법이니까. 차고 뜨거운, 마실 것이 담긴 잔을 손에 쥐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다. 차를 마시는 건, 그래서 소설을 쓰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차를 고르고, 다구(茶具)를 꺼내고, 차를 우리고, 마시는 모든 단계가 '구상-예열-집필-완성'이라는 소설 쓰기의 상황과 닮아 있는 것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 뭔가 먹는다는 생각은 좀처럼 할 수가 없는데 아이와의 충전으로 50%쯤 돌아온 정신 사이에서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마시고 싶어지고, 마셔야 한다는 조바심에 시달린다. 물 한 컵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이가 먹을 것을 챙겨주고도 나는 전혀 먹지 않지만, 다른 의미로 바쁘게 움직인다. 차를 마시기 위해서다. 차를 마셔야 정신적인 에너지가 90%에 가까워질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시는 건 내게 생장(生長)의 의미다. 성장(成長)은 점점 커진다는 뜻이니까 성년 이후의 삶에는 어쩐지 머쓱하게 느껴지지만, 생장은 다르다. 한 해씩 시간을 사용하고 나이를 먹으면서도 생장하기 위한 의식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나고 자람'을 지속하기 위한 앎과 배움의 여정이 저마다의 삶 속에 있고, 그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쾌적의 몸 상태를 만든다고 한다면 차는 필수적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보이차를 가장 좋아한다.

내 기준에 차는 오래, 그리고 많이 마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녹차나 백차는 몸이 차가워지는 성질이라 괴롭고, 무이암차나 대만 우롱차는 어째선지 마실수록 지나치게 마음이 가라앉아 힘들고, 홍차나 커피는 카페인에 약한 내겐 '1일 1잔'이 최대치라서 항상 아쉽다. 보이차는 카페인이 미미하달 정도로 적어서 물 대용으로 마실 수 있고, 마시면 허리부터 아랫배까지 따뜻하게 데워진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많은 양을 마셔도 위장이 편해서 좀 더 오래, 조용히 집중해서 앉아 있을 수 있게 해준다. 소설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차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나는 주방에서 물부터 끓인다. 혼자일 때는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렸지만, 역시 가장 편리한 건 전기 포트. 물이 끓는 동안, 어떤 차를 마실지 고르고, 찻잎을 적당히 꺼내 무게를 달고, 다구를 이용해 차를 우린다. 다구는 차를 마시는 데 이용하는 기물이라서 헤아릴 수 없이 방대한 세계가 있겠지만, 차를 매일 마시기 위해서는 쉽고 편리한 도구가 제일이다. 보이차도 물론, 자사차호라는, 돌로 만든 찻주전자를 사용하면 훨씬 더 깊고 고요한 음용의 과정을 즐길 수 있다. 차와 차호의 종류를 바꿔가며 수차례 뜨거운 물을 부어 찻잎을 달게 우려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감을 앞둔 소설가에게 그것은 사치 중에 사치... 더욱이, 마감에 늦은 상태라면 겸허하게... 양심을 챙겨야 한다. 그래서 꺼내 드는 건, 언제나 표일배.

표일배는 간단히 차를 우려 마실 수 있는 도구로, 거름망이 달려 있어서 편하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차가 우러나면 버튼을 눌러, 차를 내려 마시는 방식이다. 가격도 저렴해서 부담이 없고, 빠르게 차를 만들 때 유용하다. 용량도 다양해서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닐 때도 사용하기 좋은 편. 모양도 제각각인데 몇 개를 깨뜨리고 다시 구매해도 여전히, 주둥이가 긴 호를 그리며 튀어나와 있는 걸 고른다. 차를 잔에 덜어낼 때 그게 좀 더 보기에 균형 잡혀 있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나부낄 표(飄), 편안할 일(逸), 잔 배(杯). 바람 풍자가 들어가 있으니 '나부끼다'의 뜻이 가장 먼저 나오지만 이 기물에 쓰인 '표'는 '빠르다'의 뜻이 우선인 듯 보인다. 빠르고, 편안하게, 한 잔 마실 수 있게 해주는 그릇일 테다. 표일배만 있다면 잔은 머그컵이든 뭐든 상관없어진다.

마감을 앞둔 오전에도, 마감이 임박한 날에도 그래서 내내 마신다. 마시며 쓴다. 쓴 문장을 읽고 또 고쳐 쓰고, 장면을 이리저리 옮겨 배치하거나 사건의 세부사항을 조율하느라 진 빠지는 마감이 예정된 오전에도, 나는 눈을 뜨면 보이차를 마신다. 더 바쁘고 심각한 날에는 표일배도 사용하지 않는다. 마감에 너무 늦어서 표일배를 꺼낼 여력조차 없을 때는 보온병을 사용한다. 물을 끓이고 차를 여러 번 우려내는 수고로움조차 덜어내려고. 찻잎을 다시백 안에 담는다. 2리터짜리 하리오스 유리 보온병에 던져 넣는다. 펄펄 끓인 물을 가득 채워 차를 만든다. 이 정도만으로도 사실 더 바랄 것 없이 충만해진다. 표일배는 그러니까 차호와 보온병 사이, 여유로움과 초조함 사이에서 나의 '갈급'을 해결해주는 '애정템'인 셈!

한 잔, 두 잔, 마시다 보면 50%였던 배터리 잔량이 또 빠르게 채워진다. 70%, 90% 가파르게 솟는다. 단지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 기운이 좀 나고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노트북의 전원을 켤 수 있는 힘이 솟아난다. 그리고 그때에야 내가 어제 무엇을 썼는지, 어디까지 썼는지도 기억이 난다. "이런... 차나 마시고 있을 때가 아니야!"라고 소리지르며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어진다. 그러나 마감은 매번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나는 이런 시험에 이제는 제법 오래, 대응해왔다. 나는 "캄 다운... 싯 다운..." 중얼거리며 노트북을 연다. 언제나 이미(!) 도착해 있는 메일을 들여다본다. 마감이 며칠 남았다는 친절한 편집자님의 알림이라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마감이 지났는데 원고는 언제...' 정도의, 분노를 삭인 연락이라는 걸 안다. '죄송해요, 저는 틀려먹었어요...'라고 답장하고 싶지만 가까스로 제어한다. '죄송합니다, 내일까지는 꼭 보내드릴게요, 하루만 더... 출근(부디 출퇴근이 있으시길 바라며)하시면 볼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빨리...' 구구절절 변명한다. 편집자분들은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시겠지... 알고 있습니다. 흑.

절망하고 있을 수만도 없으니 다시 원고 파일을 연다. '네, 저예요... 아직 이 모양이에요...'라고 소설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 와중에도 계속 마신다. 뜨거운 보이차를 마시고, 마시고, 계속 마셔서 속에 담는다. 예열. 보통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기 전에(보다 직접적으로는 소설이 '써지기' 전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설을 쓸 몸과 마음을 정비하는데 그걸 '예열'이라고 부른다. 청소를 한다거나 음악을 튼다거나 카페로 향한다거나 초콜릿이나 음료 등을 책상 위에 배열한다거나, 아마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동료 작가 J는 집에서 도보로 20분이 걸리는 곳에 작업실을 구해놓고 짬이 날 때마다 가서 소설을 쓰는데, 자주, 이렇게 탄식한다. 

"애들 학교랑 유치원 보내놓고 딱 두 시간의 여유가 생기는데 아무것도 못해! 왕복 40분인데 예열하다가 시간 다 간다고!"

보이차를 우려서 오래 마신다. 많이 마시고 몸을 데운다. 이건 나의 예열. 조용히, 오래 앉아 있기 위해서, 허리를 바로 펴기 위해서... 부디 오늘은, 마감하기 위해서. 어서 예열하고, 다시 소설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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