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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물건들] 메달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

<은희경의 물건들> 19화 - 풍경과 힘의 파장 속 성취의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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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올라가 내려다보면 풍경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2022.11.23)


<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2002년, 한 신문사가 공동 주최하는 서해안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이 문장은 반만 사실이다. 그 대회에 참가는 했지만 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신문사 신춘문예의 중편 소설 여성 당선자 모임의 멤버였는데, 그 무렵 그 모임은 공동으로 책을 내고 함께 여행도 하는 등 꽤 활동적이었다. 신문사에서는 대회 홍보를 위해 우리를 초청 혹은 동원한 거였다. 모두들 5킬로미터 구간이라니 걸어도 충분하겠다며 바닷바람이나 쐬자고 가벼운 여행 준비를 할 때, 혼자 걱정에 빠진 내가 있었으니... 나는 K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달리기는 어떻게 하는 거지?" 

뭔가가 궁금하면 늘 그렇듯 K는 달리기 입문서를 구입해 먼저 읽어본 다음 내게 충고했다.

"먼저 옷을 사야 해."

운동복의 기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달리는 사람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러니 타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스쳐갈 수 있도록 복장을 갖춰야만, 쓸데없는 신경 안 쓰고 자기 몸의 운동에 집중을 할 수 있다고. 그 의 말대로 나는 스포츠 매장에 나가 운동복을 샀다. 물론 운동화도. 그러고 나니, 일단 뭔가 시작은 한 기분이 들어 안심이 됐다. 하지만 경기 날 갑자기 중요한 일정이 잡히는 바람에 기념사진만 찍고는 그대로 대회장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뭐야, 옷값만 아깝게 됐잖아.

그런데 얼마 후, 나를 지도 편달하는 재미로 입문서를 읽었다가, 스스로도 달리기에 흥미를 느끼게 된 K가 또 다른 대회 소식을 가져왔다. 환경 재단 주최로 열리는 난지한강공원 달리기 대회. 나는 순전히 새 운동화와 운동복을 써먹을 마음에 신청서를 냈다. 이번에는 5킬로미터를 진짜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은 2년 체류 예정으로 시애틀로 떠났고, 동네 전체가 공원 같았던 그곳에서 나의 달리기는 자연스럽게 생활 조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호숫가를 돌고 다리를 건너고 언덕을 오르며, 온 동네를 탐험하는 동안 K는 나의 페이스 메이커 같은 존재였다. 늘 앞에서 달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딴 생각을 하다가 잠깐 사이 길을 잃고 사라져버릴 때마다 나를 찾아 여러 번 되돌아와야 했으니까.

서툴고 무능한 이방인이자 소수자로 지내야 했던 외국 생활에서, 달리기는 내게 사소하나마 성취의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내 몸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견인해서 원하는 지점에 이르는 순간 내가 조금 더 강해진 느낌, 할 만큼 해봤다는 후련함. 어쩌면 그것은 강해졌다기보다 내가 약하지만은 않으며, 내 안에 힘이 들어 있다는 확인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쯤 되니 낡은 운동복이 제법 어울렸는데, 옷에 신경을 안 쓸 만큼은 배짱이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의 달리기는 한국에 돌아온 뒤로도 이어졌다. 호수공원 앞의 작은 작업실에서 지낼 무렵 가장 자주 달린 것 같다. 글이 막히는 순간이면 랩탑을 덮고 한잠 잘까, 아니면 나가서 달려볼까 망설이곤 했는데, 언제나 두 번째 선택이 더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또, 저녁 술 약속에 가기 전 달리기를 하면 화장이 잘 받았다.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까지 달릴 때의 열기가 뺨에 남아 있었고, 출정하는 술꾼으로서 그 홍조가 은근히 기분 좋았다. 지방에 있는 작가 집필실에 입주할 때에도 언제나 운동화를 챙겼었다. 대학 캠퍼스의 밤 트랙과 벚꽃나무가 늘어선 호수, 공단 지역의 하천가 모두 나의 달리기 코스였다.

SNS에 달리기에 대한 소회를 올리기도 했다. 여름 저녁에 호숫가를 달리고 있으면 어느 틈에 모기에 물리기 일쑤였다. 그런 날은 '뛰는 놈(나) 위에는 역시 나는 놈이 있었다'라고 썼다. "달리다보면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조금 뒤에는 다시 내가 그들을 앞질러가게 된다. 나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던 것이다"라며 잘난체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도 달릴 때에 문장이 잘 떠올랐다. 힘들어서 도파민이 더 분비되는 것인지, 걸을 때보다 한층 머릿속 생각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다. 힙합과 달리기를 좋아하는 17세 소년이 주인공인 장편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뿐 아니라, 나의 많은 소설에 호수공원이 등장하는 것은 그곳에서 구상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역시 내 안에 힘이 있다는 그 성취의 감각이 나를 독려해주었다.

하프 마라톤도 여러 번 완주하게 되었다. 모두 K와 함께였다. 차량이 통제된 강변도로나 비무장 지대를 달리면 가슴이 '웅장'해졌고, 대회 참가를 위해 강원도의 숙소에 묵었을 때는 원정 경기(?)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지역 특선주를 자제하는 성숙함도 갖추게 됐다. 완주 기념으로 티셔츠나 펜, 쌀 같은 물건을 받는 기쁨도 있었다. 하지만 완주 메달은 포장 비닐도 뜯지 않은 채 서랍에 던져두곤 했는데, 메달이란 금은동일 때에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다고 완주도 겨우 해내는 내가 하프 마라톤에서 메달권 안에 드는 사태는 절대로 일어날 리 없으니 메달은 애초에 내 관심 밖일 수밖에.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내가 한 마라톤 대회에서 3등을 한 것이다. 이 말을 하는 게 자랑은 아닌 것이, 알고 보면 특별히 자랑스러운 점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큰 대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날은 4월답지 않게 몹시 춥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신청해놓고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는데, K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대회장에까지 나갔지만, 역시 달리는 건 무리라며 포기했고 나까지 만류하려 들었다.

마라톤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시간에 따라 몸의 상태가 변하므로 기복이 따른다. 위험 요소도 적지 않다. 오래 달린다는 것은 몸이 전혀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면 남자들은 유두에 티셔츠가 2시간 넘게 반복적으로 쓸려 상처가 나므로 미리 반창고를 붙여야 한다. 컨디션이 나쁜데도 달리기를 강행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생각이 아니다. 달리기가 건강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운동 자체에도 있지만, 컨디션 조절 덕분이라고 한다. 달리기 위해서는 꾸준히 연습을 하며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형편없는 기록으로 3등을 한 것은 바로 그 덕분이었다. 아마추어 대회이긴 하지만, 사실 프로에 가까운 참가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포함해서 노련한 러너들이 대거 출전하지 않은 틈을 타서 행운을 거머쥔 거였다.

내가 숨을 몰아쉬며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자 스태프가 와서 목에 이름표 같은 걸 걸어주었다. 읽어보니 '3등 수상 후보자'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이 나의 메달인 셈이었다. 그날부터 나에게 인류는 하프 마라톤에서 메달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나에게는 그 농담이 "내 안에는 힘이 있어"라는 다짐이었다. 그 무렵 일도 많이 하고 허튼짓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달리기를 한다고 하면, 1년 내내 뛰는 걸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대회가 있으면 몇 주 동안 관리를 하지만 평상시에는 내키는 대로 종종 뛰는 정도였다. 보통은 10킬로미터이고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시속 10킬로미터인 셈이었다. 나는 그런 내 체력과 인내심의 한계를 알았으므로, 하프코스로도 전혀 아쉬움이 없었다. 하지만 K는 딱 한번 풀코스에 도전한 적이 있다. 차가 많이 막혀서 대회장에 지각을 해버린 날이었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하프 코스 신청자였는데 도착해보니 하프코스는 막 출발한 뒤였다. 뒤늦게라도 그 그룹을 뒤따라가기로 마음먹은 나와 달리 K는 갑자기 도전 정신을 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뒤이어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 풀코스 참가자 쪽에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두 시간쯤 뒤 하프 코스를 가까스로 완주한 내가 피니시 라인에 서서 그의 도착을 기다리기 시작하는데... 후발 주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앰뷸런스가 두 대나 지나가고,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놓는 마지막 주자가 박수를 받으며 완주에 성공하고, 이제 스태프들도 자리를 떠나고 시상식 무대가 차려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K. 마침내 그를 내려준 차량이 있었으니 이른바 수거 버스, '낙오자'들을 태우는 버스였다.

죽을 힘을 다해 달리던 그는 완주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피니시 라인을 가리키는 팻말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탈진한 참가자들을 태워가는 버스가 나타나 그의 옆에 섰다. 책 속에서 길을 찾는 사람답게 그는 모 작가의 달리기 산문을 읽었으며, 수거 버스에 실려가는 마라토너의 복잡한 심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작가가 그것까지는 설명해 주지 않았던지 수거 버스가 나타나면 무조건 타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으므로, 충분히 달릴 수 있음에도 그 버스에 자발적으로 올라탔다는 거였다. 여기에서 교훈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안다고 생각할 때야말로 틀려 있을 수 있다, 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게 일단 그 버스에 타니까 갑자기 한 발짝도 못 걸을 상태가 돼버리는 거야. 그리고 그런 상태에 안도하게 되더라. 나는 생각했다. 당신의 속에는 힘이 남아 있었는데 버스에 타야 한다고 판명되는 순간, 그 순간 그 힘이 꺾여버린 거야.

몇 년 전부터 나는 달리기를 하지 않고 있다. 어느날 한쪽 무릎에 시큰한 느낌이 왔다. 십수 년을 달리는 동안 그 때문에 몸이 고장나 병원에 가본 적이 없었고 그때 역시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방면에 경험이 많은 친구가 한 병원을 적극 추천했다. 인테리어가 화려한 스포츠 전문 외과 병원이었다. 세련된 분위기의 젊은 의사는 크게 놀라는 표정으로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놔두었냐"라며 나를 꾸짖었다. 무릎 한쪽이 문제가 아니고, 두 쪽 다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하며 당장 달리기는 멈춰야 하고, 잘못하면 걷는 데에도 지장이 있다는 거였다. 나는 그 말을 다 믿은 건 아니어서 병원에 다시 가지는 않았다. 무릎도 다시 좋아졌다. 하지만 어쩐지 달리기를 하지 않게 되었는데, 바로 힘이 꺾여서라고 생각한다. 내 안에는 힘이 있지만 그것을 꺾어버릴 일은 늘 일어나는 법이다. 다시 힘을 낼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지난주에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쓰고 있는 상자에 우연히 눈길이 닿았다. '저게 뭐였더라.' 열어보니 여행지에서 샀던 각종 기념품 사이에 나의 완주 메달들이 있었다. 비닐을 벗기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달리기에 대해 산문을 써야지. 사진은 얀 베르트랑의 사진집 『하늘에서 본 지구』 위에 놓고 찍는 게 좋겠다. 멀리 올라가 내려다보면 풍경이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나의 달리기 완주 메달들, 내가 달리던 때의 먼 풍경과 그 힘의 파장 속으로 다시 나를 데려가주기를. 

다음 이야기는 '책상에 앉으면 보이는 것들'이다.



소년을 위로해줘
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저
문학동네
하늘에서 본 지구
하늘에서 본 지구
얀 아르튀스-베르트랑 사진 | 레스터 브라운 외 글 | 조형준,문혜영 역
새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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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은희경(소설가)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이중주」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상속』,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이너리그』, 『그것은 꿈이었을까』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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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저10,400원(0% + 5%)

내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모두, 준비됐나요?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또하나의 방식 신춘문예 당선과 문학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혜성같이 등장한 후 21세기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꼽히는 은희경의 신작 장편소설. 이 세계의 개인으로서 타인을 사랑하는 새로운 방식 하나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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