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RLS' INVASION : 소녀들의 역습
케이팝의 지난 역사를 통해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음을 꾸준히 증명해 온 걸 그룹이 가진 태생적 장점과 지난 수 년 간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산업 내외부에 자리한 여성 팬을 비롯한 여성 플레이어들의 인식 변화가 큰 힘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글ㆍ사진 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2022.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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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쉽엔터테인먼트 제공

걸 그룹 전성시대다. 낡은 표현이지만 이만큼 요즘 케이팝 신을 잘 짚어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올해 케이팝 화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걸 그룹이 있었다. 지난 4월 발매된 아이브의 두 번째 싱글 는 상반기는 물론 2022년을 대표하는 곡으로 일찌감치 눈도장을 찍었다. 이 기세를 몰아 5개월여 만에 발표한 는 자신들이 만든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에 쐐기를 박겠다는 단호함이 휘몰아치는 매서운 선언과도 같은 노래였다. 연말까지 음악 차트 10위권에서 두 노래의 선전을 보게 되리란 건 의심할 필요 없이 이미 정해진 미래다.

아직 데뷔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그룹의 노래가 일 년 내내 차트를 장악하는 사이, 이들과 데뷔 동기라 해도 좋을 갓 데뷔한 걸 그룹들 역시 자신들만의 유의미한 선전을 이어갔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신 멤버가 절반을 차지하며, 데뷔 전부터 기대를 모았던 그룹 르세라핌은 첫 앨범 로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수준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 지난 8월 한여름의 신기루처럼 갑작스레 등장한 뉴진스의 활약도 대단했다. 이들의 데뷔는 걸 그룹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물론, 세계관에서 퍼포먼스까지 점차 어렵고 복잡해져 가며 대중과의 접점을 잃어가는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던 케이팝 계에 울린 따끔한 경종이었다.

신인들만 애를 쓴 건 아니다. 올여름 케이팝 신의 가장 큰 축제는 올해로 15주년을 맞이한 그룹 소녀시대의 컴백이었다. 오랜만의 완전체 컴백인 만큼 앨범에서 뮤직비디오, 대형 팬 미팅까지 다채로운 기획을 준비한 이들이 선사한 보름 남짓한 시간은 케이팝을 오래 좋아해 온 이들 모두에게 케이팝을 소재로 한 나만의 추억을 소환하게 했다. 이제 좋아하는 그룹은 각자 달라졌지만, '포에버 원'을 입 모아 외치는 순간만큼은 케이팝을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던 그 시절 그 때 그대로였다. 역시 15주년을 맞이한 카라 완전체 컴백 소식과 10주년 싱글을 발표한 EXID도 반가움을 더했다. 걸 그룹 초동 100만 장 시대를 처음으로 연 에스파와 블랙핑크의 활약도 대단했다. 특히 블랙핑크의 경우, 빌보드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과 영국 오피셜 차트 1위에 오른 첫 걸 그룹이 되었다. 세계 최대 음악 플랫폼 스포티파이 주간 차트에서는 한국 가수 최초 1위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케이팝의 'Next Big Thing'을 찾아 산처럼 쌓인 보이 그룹 더미만 헤치던 이들이 놓친 달라진 흐름의 역습이었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언제는 걸 그룹이 인기가 없었나 싶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게임판 자체가 바뀌었고, 게임에 임하는 이들의 자세도 달라졌다. 대중 인지도가 높은 멤버를 중심으로 히트곡 몇 곡 만들어 여기저기 행사를 돌리는 것으로 수익원을 만드는 게 걸 그룹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제 없거나 멸종 직전 상태에 놓여 있다고 봐도 좋다. 케이팝 걸 그룹은 이제 '걸 그룹'이라는, 우리가 지금껏 생각해온 어떤 특정 프로토타입이 아닌 '케이팝'이라는 보다 큰 개념 안에서의 어엿한 비즈니스 상수로 자리한다. 그룹을 만드는 이도, 그들을 사랑하는 이도 걸/보이라는 성별을 기준으로 한 뻔한 구분보다는 이들이 대중 앞에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게 설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관심을 둔다.

좋은 노래, 완벽한 퍼포먼스, 아이돌로서의 매력, 섬세하거나 획기적인 스토리 등 케이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다양한 요소는 성별과 상관없이 그 자체의 영향력으로 팀의 주목도를 높인다. 그렇게 높아진 주목도는 앨범 판매량과 팬덤 형성에 그대로 반영되며, 케이팝 신 내에서 걸 그룹과 보이 그룹을 둘러싼 흐름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신호를 꾸준히 보내고 있다. 그 밑바탕에 케이팝의 지난 역사를 통해 대중과의 연결 고리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음을 꾸준히 증명해 온 걸 그룹이 가진 태생적 장점과 지난 수 년 간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산업 내외부에 자리한 여성 팬을 비롯한 여성 플레이어들의 인식 변화가 큰 힘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케이팝 신에 불고 있는 걸 그룹 열풍이 일시적이라거나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도 그곳에 있다. 재능 있는 이들이 짧지 않은 시간을 거쳐 세상을 학습하며 흐름을 바꿨다.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들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2022년은 물론, 당분간 케이팝 안에서 소녀들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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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하(대중음악평론가)

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 등 각종 온·오프라인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KBS, TBS, EBS, 네이버 NOW 등의 미디어에서 음악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EBS 스페이스공감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TBS FM 포크음악 전문방송 <함춘호의 포크송> 메인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한마디로 음악 좋아하고요, 시키는 일 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