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도를 잘 건널 수 있나요?
자기의 파도를 건너는 중인 우리들에게,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파도만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걸어본다.
글ㆍ사진 이나영(도서 PD)
202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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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출퇴근 시간마다 꽉 끼는 지하철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며 생각하는 게 있다. '저 사람도 나만큼은 힘들겠지'라고. 짜증스럽기 그지 없는 시간들이지만,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불쾌한 이 시간들을 버틸 수 있다. 지금 내 어깨를 이렇게 치고 가는 건 급한 일이 있어서일 거라고. 저 사람의 오늘 하루가 무척 고되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뿐일 거라고.

"서울살이는 조금은 힘들어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앞에 앉은 사람 쳐다보다가도 저 사람의 오늘의 땀 내 것보다도 짠맛일지 몰라 / 광화문 계단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면 사람들 수만큼의 우주가 떠다니고 있네"  _ 오지은 노래 '서울살이는' 중에서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어쩌다 읽고 싶어 새로 산 책도 단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사진첩에 쌓이는 사진들도 없던 때. 최근 1년 동안의 나는 자주 이런 상태였다. 모든 게 겹쳐왔다. 사람들도 종종 피해다녔다. 읽지 않은 톡이 쌓여가고, 부재중 전화에 콜백을 하지 못했다. 답장을 하는 게 많이 어려웠다. 누군가와 연락을 한다는 게 짐처럼 느껴졌다. 그리 유쾌하지 않은 내 사정을 이야기하며 지금은 조금 이해해달라 말할 힘조차 없었다.

내게 덮친 파도는 좀처럼 멈추질 않았고, 쌓아뒀던 체력도 끝내 바닥을 쳤다. 운동으로 그 모든 걸 털어내던 나는 산책도 버거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피해 의식이란 게 이렇게 생기는 거구나 싶었던 이 시간 동안, 나는 ENFP형 인간에서 ISFP형 인간이 되었다.(스스로도 변한 게 느껴져서 MBTI 검사를 수시로 다시 해 본다) 내게 이런 시간이 왔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떠나보내고 싶었다. 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내가 떠나온 것일까.

그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해하는 사람들은 많아졌다. 내게 이런 상황이 있어서 지금 잠시 그런 것이라고, 지금 내가 내리는 결정들도 당장 살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설명해야 하는 때들도 있었지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그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므로. 이 또한 다 지나가겠지, 언젠가 만나 설명하면 되겠지. 그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그쯤하면 끝나겠지. 조금의 미움을 사는 건 적당히 편하기도 하다는 걸 알아버렸다. 선을 그을 수 있는 사이가 되는 게 나쁘지 않다는 것도.

요즘 다시 사람들을 조금씩 만나기 시작하면서 모두에게 이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왜 유독 나에게만 이런 시간이 왔던 건지 남들과 비교하던 것도 나만 한 일이 아니었다. 저마다 자신의 파도에 휩쓸리던 시기가 있었다고, 그러지 않아도 힘들어 보여서 이제야 나도 이해한다고 말을 걸어주는 이들이 생겨났다. 점차 오해들도 풀릴 거라고 위로의 말도 건네주었다. 그냥 너 자체로 잘 살고 있으면 된다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하는 말을 요즘 자주 떠올린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일 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보이는 그들도 저마다의 사정을 숨기고 사는 걸 거라고, 그러니 너는 너에게만 매몰되지 말아야 한다고. 지금 내가 겪는 이 파도를 다른 이들도 이미 건넜거나, 건너는 중이거나, 아직 모를 뿐일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결국에는 우리의 고된 시간들의 총량은 같을 테다. 이렇게 생각할 줄 아는 뭉툭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 중인데, 나는 여전히 걱정이 많다. 스스로에게 자주 잠긴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타인에게도) 특별한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무언가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고, 더 일찍 시작해가는... 내가 아는 세상이 좁았던 나이에는 그렇게 생각해도 되었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내 행복을 찾아가는 길에 더 가까웠다. '어려서 그랬지'하는 아주 적절한 이유를 갖다댈 수 있었으니까. 

아는 세상이 조금씩 더 넓어지고, 컨트롤해야 할 대상이 나 하나뿐이었던 삶에서 확장되어 갈수록 모두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건너 왔단 말이야? 그러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하면서. 자기의 파도를 건너는 중인 우리들에게, 나에게 감당할 수 있는 파도만 자신에게 주어지고 있을 거라고 주문을 걸어본다. 이 파도가 지나가고 나면, 잔잔한 내가 되었다가, 다시 또 더 큰 파도가 와도 견딜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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