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평의 신작 『튜브』에는 계속된 사업 실패에 이어 자살 시도마저 실패한 남자가 등장한다. 한 번은 너무 추워서, 한 번은 어이없는 실수로 죽지 못한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삶을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한다.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은 무엇일까. 손원평 작가는 일면식 없는 무명의 누군가를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말했다.
한 때는 나에게 필요했던 이야기
작가의 말에서 "내가 쓴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의뢰 혹은 주문에 기대 쓴 글에 가깝다"고 했어요.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요?
언젠가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다가 한 포털 질문란에 올라온 글을 보게 됐어요. 검색 키워드는 기억나지 않는데, 파도를 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달하잖아요. 누군가 "실패한 사람이 다시 성공한 이야기를 추천해 달라. 지금 나에게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글을 올렸어요. 답변은 없었고요. 그걸 보는 순간 '내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때는 저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절실하게 필요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 사람에게 화답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어요.
소설을 쓸 때 제목을 빨리 정하는 편이시라고요. '튜브'라는 제목도 그랬나요?
이번에는 제목을 짓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여러 차례 제목을 바꾸다가 마지막에 편집자님께서 '튜브'라는 제목을 지어주셨죠.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곱씹을수록 좋았어요. 다시 떠오르는 상승의 이미지가 연상됐거든요. 소설의 주인공 김성곤이 기획한 사업인 '지푸라기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지푸라기가 엄청나게 커다란 튜브가 되기까지'라는 문장이 나오기도 하고요.
김성곤은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성공하는 인물이에요. 그러다 반전을 맞으며 새로운 이야기가 또 펼쳐지죠. 김성곤을 보며 '진정한 성공이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소설은 '성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패했던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는 이야기'에 방점이 찍혀 있어요. 성공의 의미가 '대기업 입사'나 '돈을 얼마 이상 벌기' 같은 특정한 목표라면, 거기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다 실패한 게 되잖아요. 하지만 삶의 긴 여정을 전체로 놓고 보면 영원한 성공도, 영원한 실패도 없어요. 결국 성공이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를 계속 돌아보며 변해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요.
『튜브』를 읽으며 전작 『서른의 반격』 작가의 말이 떠올랐어요. '처음부터, 완전한 0에서, 아무런 힌트도 없이, 그저 다시 시작하라는,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지령이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곤 했다'는 문장이요. 0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건 김성곤이 자주 내뱉는 말이기도 하죠.
저의 힘들었던 시절을 되새기며 소설을 썼거든요. 습작하고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의 제 모습이요. 20대 때는 나름대로 능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제가 만든 작품을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하고,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적도 있었거든요.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 영화 평론상도 타고요. '조금만 더 하면 금방 잘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작은 성과들이 완전히 사라지더라고요. 그 이후로 계속 실패의 경험만 쌓이다 보니 나중에는 정말 우울해졌어요. 그 경험이 『튜브』의 밑바탕이 됐죠.
그 시간을 견디는 데 위로가 되었던 건 무엇인가요?
사실 위로는 일시적인 힘이 될 뿐이었어요. 꼭 푹신한 소파 같은 느낌이었죠. 앉아있으면 편안하고, 마음이 조금 진정되지만 일어나는 건 결국 내 두 다리로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위로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힘든 사람에게는 분명 위로도 필요하지만, 문화 시장에서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럼 낙담한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건 뭘까요?
응원이요. 위로는 다시 일어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도 할 수 있어요. "괜찮아. 계속 쉬어도 돼"라고요. 하지만 응원은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죠. 더 이상 달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응원할게"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응원은 건네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에게 에너지를 줘요. 과거를 돌이켜보면 저는 "괜찮아"라는 위로보다 "너는 잘할 수 있어"라는 응원의 말에 더 큰 힘을 받았던 것 같아요. 이 소설이 바라보는 키워드도 '응원'이라고 생각해요.
벽돌을 격파하는 마음으로 쓴다
50대 중년 남성 '김성곤 안드레아'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자연스럽게 떠올랐어요. 저는 소설을 쓸 때, 주인공의 성별과 연령대가 즉시 떠오르는 편이거든요.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서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그 연배의 인물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성곤이 자살 시도에 거듭 실패한 뒤, 갑자기 인생을 바꿔보겠다고 결심하며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어요. 첫 번째 시도는 등을 펴고 자세를 바로 하는 거였죠.
제가 힘들었던 시기에 그렇게 작은 노력을 하며 버텼거든요. 영화든 소설이든, 인정받으려면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게 답답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걸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 5분씩 5개의 언어를 공부했어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의 기초 회화를 매일 딱 5분씩만 봤죠. 별거 아닌데 1년쯤 하다 보니 아주 기초적인 회화를 하게 되더라고요. 매일 몇십 개씩 다리 들어올리는 운동을 하니까 어긋났던 두 다리의 길이가 꼭 맞아지고요. 그러면서 마음의 근력이 커졌어요. 어쩌면 김성곤도 저와 비슷할 것 같았죠. 완전히 바닥을 친 자신을 보며 작은 각성을 한다면, 그게 무엇일까 고민했을 때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했어요.
소설에서 되풀이되는 질문이 있어요. '삶은 운명일까, 행동의 결과일까?'라고요. 작가님께 이 질문을 드린다면요?
운과 행동의 결합 아닐까요. '운칠기삼'이라는 말처럼 분명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어떤 운이 삶을 좌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잖아요. 비단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건강을 잃거나 사고가 나는 것도 그렇고요. 결국, 삶이란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도로를 운전해서 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운전대는 내가 쥐고 있지만,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죠. 인생은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지금 성공이라고 보았던 게 돌이켜보면 재앙의 씨앗일 수도 있어요.
제일 공감하게 되었던 인물이 있나요?
없어요(웃음). 왜냐면 저는 소설을 쓰는 게 전혀 즐겁지 않거든요. 빨리 끝났으면 좋겠고, 매 순간 내가 이걸 쓸 수 있을까 고민해요. 아직도 소설을 쓸 때마다 '이번에는 진짜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게 신기하죠. 고통 속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어떤 인물에게 마음을 주는 일은 별로 없어요. 그냥 이 인물들이 빨리 내 삶에서 사라지기를 바라죠(웃음). 그건 소설을 다 썼다는 뜻이니까요.
과거 인터뷰에서 종종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소설 쓰기는 직업일 뿐, 거창한 의미는 없다"고요.
직장인들이 '회사 가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저도 디폴트값이 '쓰기 싫다'예요(웃음). 제 옆에는 항상 '하기싫어 노트'가 있어요. 거기에 너무 하기 싫다고 낙서를 하면서 쓰죠. 벽돌을 격파하는 기분으로 계속 소설을 쓰는 것 같아요. 요즘은 '이렇게 하기 싫은 데도 계속 하는 걸 보면 사실 좋아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어요(웃음).
인터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기자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때로는 작품을 분석해 의도를 묻는 게 작가에게 실례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제 인생의 첫 인터뷰 때, 어떤 기자분이 마지막 질문으로 "어떤 작가가 되고 싶냐"고 물으셨는데요. 제가 "인터뷰를 하지 않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대답해서 그분이 굉장히 당황하셨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책을 출간했다면, 그걸로 작가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그래도 인터뷰 자체는 정말 즐거워요. 저는 원래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대중 앞에 너무 많이 나서지는 않으려고 해요. 지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작가의 말을 최대한 자세하게 쓰는 편이에요.
데뷔작 『아몬드』가 100만 부를 돌파했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감개무량한 일이지만, 실감이 잘 안 나요. 천천히 이루어진 성과라서요. 사실 『아몬드』의 당선 소식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어요. 갑자기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응급실까지 갔을 정도로요. 아마 그 당시에 "이 책은 5년 후 100만 부가 팔린다"는 말을 들었다면 졸도했을지도 모르죠(웃음). 하지만 서서히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새삼 놀라워요. 남의 얘기 같기도 하고요.
지금 구상 중인 작품이 있을까요?
우리는 데이터로 기록되는 삶을 살고 있잖아요. 요즘 태어난 아이들은 탄생의 순간부터 자기의 모습이 영상이나 사진으로 남아있고, SNS나 커뮤니티 등에도 매일 수많은 정보가 올라오죠. 가끔 '후대가 이걸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거기서 착안한 SF소설이에요. 냉동 인간처럼 보존되어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깨어났는데, 의식의 데이터 일부가 지워진 거예요. 그래서 기억의 데이터를 복원해 주는 업체를 찾아가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이 2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기록을 찾아보며 자신과 세상을 반추하는 이야기를 쓰게 될 것 같아요. 언제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주제는 제가 찜했습니다.(웃음)
*손원평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영화과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2001년 제6회 <씨네21> 영화평론상을 받았고, 2006년 제3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공모에서 「순간을 믿어요」로 시나리오 시놉시스 부문을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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