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건, 매우 놀랍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내 존재가 살아있다는 건, 400~500만 년 전, 지구 위에 인류의 먼 조상이 등장한 이래, 나의 직계 조상이 한 번도 대가 끊이지 않고, 나에게 이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 생을 60년으로 잡아도 내 앞에 대략 8만 3,000여 명의 조상이 있다는 추산입니다. 인류 초기의 수명은 더 짧았고, 병으로 제 수명을 못다 한 사람도 있을 테니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조상이 있었겠지요.
여하튼 어림잡아 10만 명 안팎의 생명이 자식에게 또 그다음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넘겨주며 나에 이르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류의 먼 조상 특정인 누군가에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하나의 분명한 직선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그 한 사람인 나 역시 생성과 소멸을 끊임없이 반복해온, 지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제 것으로 갖고 있는 위대한 하나의 우주라는 걸 알게 됩니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 삶의 비밀이 사라지지 않고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는 것은 이토록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들 역시 아주 많은 것들을 이어받았을 테지요.
칠레 작가 루이사 리베라의 『어느 등대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사람의 생은 사라져도, 다음 세대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것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은 어느 외딴 섬의 등대지기 할머니입니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 끝의 외롭고 고독한 섬. 이 섬에는 작은 등대가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어둠이 내리면, 섬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인 등대지기 할머니는 등대에 불을 밝힙니다. 외딴 섬이라, 지나가는 배도 많지 않지만, 할머니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변함없이 불을 켭니다. 숙명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새들이 아기를 데려옵니다. 아기는 할머니의 품에서 무럭무럭 자라며 할머니에게서 등댓불을 밝히는 법을 배워나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소녀가 혼자 등댓불을 켤 수 있게 되자, 할머니 등대지기는 다시 찾아온 새들과 함께 멀리멀리 여행을 떠납니다. 이제 세상 끝 섬에서 지나가는 배를 위해 등댓불을 밝히는 일은 온전히 고스란히 소녀의 몫이 됩니다.
루이사 리베라는 우리 독자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전통을 이어받은 작가입니다. 환상, 마술, 신비함을 우리 삶과 뒤섞어 풀어내는 그의 작품 세계는 이 그림책에도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등대 이야기’는 인생에 대한 거대한 마술적, 환상적 은유로 읽힙니다.
작은 섬은 모두 제각각의 삶을, 등대를 켜는 일은 누구나 완성해가는 자기 삶의 소명을, 그중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해내는 거룩한 일들을 보여줍니다. 새가 아기를 데려오고, 다시 할머니를 데리고 가는 것은 거대한 자연 속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우리 삶을 비유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한 생 동안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무언가를 전해주고, 전해 받는 일까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한 소녀의 성장담이기도 합니다. 글이 없는 그림책이기에 읽는 이들이 마음대로 자기만의 텍스트를 써내려가 수 있어, 더 풍성한 이야기를 갖게 합니다. 원시적인 색감은 우리들 안의 깊은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건드립니다.
무엇보다 이 그림책에 끌린 건, 할머니에서 손녀로 이어지는 여성의 서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이들은 대부분 남성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책은 세상의 불을 밝히는 일, 지나가는 배들을 안내하는 위대한 일을 감당해내는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일들, 고단한 일들을 묵묵히 감내해온 여성에 대한 헌사로도 읽힙니다.
할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비법을 손녀에게 알려줍니다. 그리고 손녀가 자라나 제 몫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자, 손녀에게 그 일을 전해주고 떠납니다. 사실 비법을 알려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흔쾌히 알려주고, 흔쾌히 떠난다는 건, 위대한 일입니다. 우리의 먼 조상이 우리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해주고 오늘에 나를 있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그림책 속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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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