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얼마 전 공원의 야외 농구코트에서 열린 대학생들의 경기를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아동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농구대회에 출전했는데 저도 그들을 응원을 하러 갔어요. 긴 팬데믹으로 오래간만에 열린 대회인데 현장의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긴 토너먼트 끝의 결승전이었으니까요. 승부를 가르는 절박한 순간에 공격수가 득점에 실패하자 응원석에서는 안타까운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이어서 얻어낸 자유투의 기회조차 놓쳤고 공격수의 어깨는 더욱 축 늘어졌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이것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 『어스름 나라에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입니다. 응원하는 학생들과 선수로 뛰는 학생들은 모두 얼마 전 수업에서 이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응원단도 선수도 이 구절을 듣자마자 팝콘 터지듯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고 선수들은 활력을 되찾아 날아갈 듯이 뛰어올라 슛을 성공시켰습니다. 마침내 박빙의 경기에서 승리했습니다. 우승하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은 잊기 어려웠을 거예요. 문학작품 속의 말을 농구경기장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고 그 담담한 격려의 말은 농구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전기 『우리가 작고 이토록 외롭지 않다면』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이 아닌지는 확실히 안다. 돈과 물건을 아등바등 긁어모으는 것, 유명인의 삶을 살며 주간지 가십난에 오르는 것, 외로움과 고요함을 두려워한 나머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스스로 묻지 못하는 것.”
그가 1983년에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내일을 알 수 없는 짧은 삶이라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후회 없는 삶이라는 것은 가능할까요? 갑갑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이곳을 벗어나서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나를 좁은 틀에 가두고 가라앉히는 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다고, 이왕이면 더 높이 멀리 날아보고 싶다고 말입니다. 린드그렌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간의 수군거림에 맞서 홀로 자신의 아이를 지켜야했던 청소년 엄마였습니다. 낮에는 자동차 클럽의 경기 진행요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아픈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써서 잡지사에 팔기도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성장하는 사람의 숨 막힐 것 같은 불안을 잘 이해하는 작가였습니다. 자신도 그런 혼미한 시기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앞날이 막막했던 18세의 어느 날에 그는 다섯 명의 친구와 함께 짐을 꾸려 무작정 서쪽으로 도보 여행을 떠납니다. 어디까지든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어느 저택에 닿았습니다. 그 저택은 당시 『어린이의 세기』라는 책을 펴냈던 작가 엘렌 케이의 집이었습니다. 엘렌 케이는 책에서 어린이가 부모를 선택할 권리를 주장했고 학교가 아이들의 영혼을 살해하고 있다고 경고를 보내기도 합니다. 1900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시대를 한참 앞서가는 발언이었어요. 학교와 가정의 굴레를 박차고 여행을 나섰던 소녀들에게 그는 전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집 벽에는 “오늘 하루가 인생이다.”라는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이 말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에게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그가 훗날 동화를 쓰고 아동 인권과 동물들의 자유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지침으로 가슴에 남습니다. 성장은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며 아무리 어리고 약해도 그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스름 나라에서』는 바로 그런 린드그렌의 깨달음이 담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예란은 다리가 아파서 일 년째 침대에 누워 있는 어린이입니다. 그런 그가 아무래도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예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어스름 녘을 그냥 견디는 일”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바둑판무늬 외투를 입고 머리에 높다란 검정모자를 쓴, 아주 작은 몸집의 백합줄기 아저씨가 예란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예란에게 자신의 손을 잡고 어스름 나라에 가자고 말합니다. 예란이 “난 아무 데도 갈 수 없어요. 다리가 아프거든요.”라고 대답하지 아저씨는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강력한 주문처럼 예란을 일으켰고 아저씨와 예란을 창문을 넘어 밖으로 날아갑니다.
어스름 나라에서 우리는 다리가 아파도 얼마든지 마음껏 뛸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백합줄기 아저씨를 따라간 공원에는 크로노베리 공원의 나무에는 사탕이 열려 있고 얼마든지 그 사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운전을 배운 적이 없는 예란은 4호선 전차를 몰고 성 에릭 거리를 달립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친구를 사귀는 일도 가능합니다. 예란은 어스름 녘에만 이곳에 사는 크리스티나와 친구가 되어 춤을 춥니다. 일 년 내내 라일락이 피는 백합의 집을 거쳐 떡갈나무들 위를 훨훨 날아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어스름 나라는 예란을 변함없이 품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만들어진 비행기에 올라타더라도 하늘을 나는 일은 좀 두려운 일입니다. 안전벨트를 매야 하고 승무원으로부터 비상시 탈출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어스름 나라의 비행은 어떤 절차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벽하게 안전합니다. 마리트 퇴른크비스트는 다리가 아픈 예란이 늘 창밖으로 조금 밖에 볼 수밖에 없었던 스톡홀름의 거리 구석구석을 책에 그려넣어 허깨비이면서 현실인 어스름 나라를 재현합니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벅찬 장면은 하늘을 나는 예란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은, 예란의 시점으로 바라본 스톡홀름 전경입니다.
성장하는 어린이에게 가장 큰 불안은 더 이상 자라지 않을 것 같다는 감정일 것입니다. “아마도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은 예란은 걷다와 자라다를 동일하게 생각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걷지 못해도 얼마든지 세상에 나설 수 있다고, 삶의 순간을 즐기고, 어려움을 넘어서고, 자랄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몸의 불편함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스름 나라의 비행은 걷기의 어려움을 압도해버리는 자유의 상징입니다.
그림책 『어스름 나라에서』를 읽으며 장애인의 이동권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누가 과연 예란의 이동권을 제한할 수 있을까요? 예란에게 백합줄기 아저씨가 되어주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서울의 예란들에게, 부산의 예란들에게 어스름 나라는 현실 속 삶의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그림책이 오늘도 우리 곁에 존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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