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요일, 김지은 아동청소년 문학평론가, 한미화 출판평론가, 이상희 시인, 최현미 기자가 ‘이토록 다정한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
“저거 콩잎 아니냐, 차 좀 세워봐라!”
국도를 달리는 중이었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엄마가 차를 세우더니 지나온 길을 거슬러 논두렁으로 갔다. 내 눈에는 다 같은 푸른 잎으로 보이건만 엄마는 오뉴월 콩잎을 귀신같이 알아봤다. 오랜만에 보았다며 반색을 하더니 아예 콩잎을 따기 시작했다. 경상도 출신인 엄마는 물에 만 밥에 된장에 박아두었던 노란 콩잎 장아찌를 곁들여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며 향수에 젖어 말했다. 오랜만에 콩잎을 봤으니 장아찌를 만든다 했는데 그때 콩잎 장아찌를 먹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물냉이』는 2022년 칼데콧 메달과 뉴베리 아너를 동시에 수상한 그림책이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물냉이』는 배우 윤여정이 출연한 영화 <미나리> 속의 미나리일 수도 있고, 내 엄마의 콩잎일 수도 있다. 미나리인지 물냉이인지는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우리에게는 누구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를 간직한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 옥수수밭이 끝도 없이 이어진 미국 오하이오 주 시골에서 자란 중국 이민자 출신 안드레아 왕은 어린 시절 경험에서 물냉이를 불러왔다.
그림책을 펼치면 저 멀리에서 낡은 폰티악 자동차가 다가온다. 옥수수밭을 지나치는데 엄마가 “잠깐만!”하고 외친다. 엄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냉이를 발견한 것이다. 엄마와 아빠는 차를 멈추고 트렁크에서 가위와 갈색 종이 봉투를 꺼낸다. 두 자녀를 차에서 끌어내 무엇인지도 모르는 걸 뜯게 한다. 소녀는 난데없이 길가에 서서 풀 쪼가리를 뜯는 일이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혹여 아는 사람이라도 지나갈까 부끄럽고, 대체 이따위 풀을 뜯어서 뭘 하겠다는 건지 화가 치민다. 종이봉투에 담긴 물냉이를 도로 진흙탕 속에 쏟아버리고 싶다.
원래 가려던 목적지도 포기하고 온몸이 흠뻑 젖은 채 물냉이를 들고 집에 돌아온 그날 저녁. 이번에는 엄마가 물냉이 요리를 식탁에 올렸다. 마늘과 기름을 넣어 볶아 깨를 뿌렸다. 소녀는 거지같이 길에서 주워온 물냉이를 먹으라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창피하게 길가에 버려진 가구를 주워오고 물려받은 낡은 옷을 입으라고 하더니 이제는 채소까지 주워온다. 뽀로통한 딸을 보고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방으로 들어가 옛날 사진을 가져온다. 낡은 사진 속에는 엄마가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물냉이처럼 작고 마른 엄마의 남동생이 있었다.
살며 경험하는 가장 보수적인 것 중 하나가 음식이다. 나로 말하자면 가리는 음식도 별로 없고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도 적은 편이다. 그런데도 어릴 때 먹은 음식을 만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는 이제 연례행사처럼 만들던 음식을 하나둘 접고 있다. 된장과 고추장을 담그는 건 진작 포기했다, 봄이면 만들던 게장도 여름의 단골 메뉴이던 오이소박이와 콩국수도 힘이 들어 더는 하지 않는다. 송편, 만두, 녹두부침개 같은 명절 음식도 맛볼 수 없다. 이제야 맛을 알겠는데 그 맛을 더는 볼 길이 없다.
『물냉이』에서 엄마는 처음으로 딸에게 배고팠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기근 때 우리는 눈에 띄는 건 뭐든지 닥치는 대로 먹었단다. 그래도 늘 배가 고팠지.” 여기서 엄마가 말한 중국 대기근은 1958년에서 1960년 마오 주석 시절에 일었던 일이다. 당시 자그마치 4천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어디 중국뿐이랴, 내 부모가 젊었던 시절 만해도 늘 허기가 졌다. 대기근 시절 아직 어렸던 엄마와 남동생이 먹었던 물냉이는 배고픔을 달래준 귀하고 귀한 음식이었을 테다.
그림을 그린 제이슨 친은 2018년 『그랜드 캐니언』으로 칼데콧 영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작가는 황토색 계열을 주된 색깔로 삼고 여러 번 색을 칠하거나 먼 곳의 풍경을 점점이 찍듯이 그려 동양화의 원경처럼 아스라하게 표현했다. 작가가 그린 수채화는 그래서 수묵화처럼 보인다. 특히 그림책이라는 한정된 지면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작가의 말에서 안드레아 왕은 아이들도 “부모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지만 실은 부모도 아이도 준비가 필요하다. 떠나간 동생의 빈자리를 견딜 수 있는 용기와 궁색한 시절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 말이다. 내 엄마는 얼마 전 팥죽을 담아주며 손자에게 먹이라고 당부를 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만든 맛있는 팥죽 있는데 데워 줄까?” 하고 물었다. “다음에 먹을 게!”라는 답이 돌아왔다. ‘애야, 다음은 없는 거란다. 지금 이 팥죽을 먹어야 우리는 같은 기억을 간직할 수 있고 언젠가 팥죽을 그리워할 수 있단다.’ 혼자 팥죽을 먹으며 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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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화(어린이책·출판 평론가)
어린이책 평론가이자 출판평론가. 독서운동가, 사서, 현직 교사 사이에서 ‘책으로 아이와 소통하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어린이책 전문가’로 손꼽힌다. 웅진출판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등에서 일하며 25년 넘게 어린이책을 다루었고, 출판 잡지에 기사를 쓰고 인터뷰를 하며 글쓰기를 해왔다.